나와 세상의 치열하고도 쓸쓸한 싸움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자절(自切) (작가: 하른, 작품정보)
리뷰어: 노말시티, 18년 3월, 조회 109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죠.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고, 자신과 동등한 타인이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걸 이해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과 부딪히며 조금씩 자신을 깎아 나가죠. 세상과 타인에 자신을 맞춰 나가는 건 고통스럽고 쓸쓸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형화 된 모양을 갖추고 나면 또 그럭저럭 익숙해집니다. 세상을 꽤 잘 살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어느날 문득 생각합니다. 진짜 나는 어디갔지?

 

네가 나를 잘라냈어.

 

어느날 나는 내가 머리만 남은 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걸 발견합니다. 머리가 없는 나의 몸뚱이는 마치 타인처럼 내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나의 몸은 태연하게 네가 나를 잘라냈다고 말합니다. 아니 적습니다. 머리가 없는 몸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머리가 없는 나는 멀쩡하게 사회 생활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해냅니다.

길지 않은 글이니 더 이상 글 내용을 소개 드리는 것보다 직접 읽어 보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밝히기는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싫고,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관계에 걸림돌이 될까 걱정되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내가 그걸 정말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기도 하고요. 또 그런 거 너무 내세우다 보면 피곤하잖아요. 그냥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고 대세를 따르는 게 솔직히 편하죠.

밖에 나가서는 그렇게 살다가 집에 들어와서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홀로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좋아하는 영화를 틀죠. 아 그래 이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또 쓸쓸해요. 이런 나를 이 모습 그대로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서로 다른 ‘내면의 나’와 ‘사회적인 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몸이 없는 머리와 머리가 없는 몸으로 표현합니다. 목이 잘린 사람이라는 기괴함에서 그런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주변인들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고 결국 머리는 집에 두고 혼자 돌아다니는 몸이 의미하는 상징이 밝혀지는 과정이 저에게는 무척 자연스럽게 읽혔습니다.

머리가 없는 몸은 작정한 듯 나를 버리고 사회에 적응합니다. 알레르기가 있는 닭고기도 먹고, 마음에 딱 들지 않는 선배와 사귀기도 하고, 머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 – 내면의 내가 필요로 하는,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물건들이겠죠 – 을 버리기도 하고. 가족, 친구, 회사, 모두 그런 몸을 더 좋아하죠.

그래도 몸은 머리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이사할 때도 잘 챙겨서 데려가죠. 진짜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요.

머리가 없는 몸은 어디까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가까워진 뒤에 선배는 몸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머리를 본 선배는 결국 도망가버리죠. 그 선배가 보고 싶은 건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나의 진짜 모습도 자신이 원하는 형태에 맞춰지기를 바랬던 거겠죠.

‘사회적인 나’는 그렇게 공허합니다. 아무리 남들이 그 모습을 좋아해 주고 그걸로 성공한다고 해도 껍데기일 뿐이죠. 결국 나는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초라하고 외롭더라도 ‘내면의 나’는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죠.

 

네가 나를 잘라냈어.

 

앞부분에 나오는 이 대사는 몸이 머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게 재미있었어요. 이 이야기는 분리된 몸과 머리의 이야기지만 철저하게 머리의 시선으로만 서술됩니다. 마치 진짜 나는 ‘내면의 나’라는 걸 강변하는 것처럼요. 심지어 저 대사처럼 몸과 머리를 분리한 것도 머리입니다. 이상하죠. 팔도 없는 머리가 어떻게 몸을 잘라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잘라내기 전의 나는 몸과 머리 모두가 ‘내면의 나’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내세우며 사는 건 너무 힘들죠. 결국 버티다 못한 나는 몸을 잘라내기로 결심했겠죠. 밖에 나가서는 ‘사회적인 나’가 되려고. 그렇게 몸을 잘라내야 하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나의 중심을 끝까지 ‘내면의 나’에게 놓는 강한 의지가 보입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인 <나에게는 네가 있다>에도 그렇게 강한 자아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성별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네요. 현수.

여기서 나는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걸 기억하고 모든 걸 사실대로 이야기하죠. 이 주인공은 ‘내면의 나’와 ‘사회적인 나’가 일치합니다. 단순히 그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곧 자신이며 자신이 곧 세상이자 신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세상을 자신에게 끼워 맞춥니다.

안타깝게도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두 명의 현수는 모두 관계 맺기에 실패합니다. ‘사회적인 나’를 버리고 ‘내면의 나’가 직접 세상과 부딪혀 세상을 자신에게 끼워 맞추려 한 것도 (나에게는 네가 있다), 아예 깔끔하게 분리시킨 ‘사회적인 나’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맡긴 것도 (자절) 결국에는 모두 실패로 끝납니다.

두 편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뭘까요. ‘내면의 나’를 유지하고는 세상과 관계 맺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지도 말고, 세상과의 관계를 포기하지도 말고, 계속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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