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분명 가지고 있을 ‘꿈’이라는 유류물… 공모 공모채택

대상작품: 유류물遺留物 (작가: 선작21, 작품정보)
리뷰어: 후더닛, 17년 12월, 조회 62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뭔가 되고 싶어하고 뭔가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은 소수만이 받는 축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산 또는 사산의 고통만 겪다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만 간직하고 살아갈 뿐이죠. 현실의 삶이란 우리 생각보다 무겁고 훨씬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 말하는 ‘유류물’은 아무래도 그런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새’입니다.

그녀는 꿈을 쫓아 날기 원하는 인간에게 그 꿈을 실현하라고 자신의 날개를 주었었죠. 아마도 날개가 있으나 삶의 중력에 너무 짓눌린 나머지 그 날개를 통해 이제 아무런 꿈도 쫓을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그 사람을 통해 대리만족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인간은 절벽에서 추락하여 숨지고 맙니다. 소설은 그의 죽음 이후에 여자가 가지게 된 기나긴 상실과 절망을 비슷한 인물의 처지들을 삽입하면서 그리고 있습니다. 돌아올 길 없는 꿈이란 유류물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을…

굳이 존재들이라 운운한 것은 이 소설엔 죽은 사람말고 인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들 동물입니다. 주인공처럼 새이거나, 비둘기이거나, 용 또는 수탉 혹은 고양이.

이런 동물들을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 보입니다.

날개 없는 새, 날아 오르지 못하는 용, 비둘기, 수탉, 고양이… 모두 갇힌 존재들이죠.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비둘기, 자신의 안마당을 벗어날 수 없는 수탉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고양이. 그들 모두 굴레에 갇힌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두고 있는 굴레란 무엇일까요? 이런 존재 모두가 현실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 그 직업이 자신의 거주 공간이라는 점에서 굴레가 무엇인지는 확연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디. 바로 그들의 밥벌이, 그렇게 매이게 된 일상이라는 것이.

허기든, 타협이든, 방관이든, 결국 자신의 꿈을 스스로 포기하고 일상이란 중력 속에 함몰되기로 선택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문장에서 선명하게 떠오르지요.

다들 그렇게 잊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그러므로 유류물인 꿈에 대한 그들의 바람은 그것이 설령 간절하다 해도 동경 보다는 미련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련 또한 엄밀히 말하면 자기 보호 장치의 일환입니다. 주인공을 비롯하여 이들 모두 현실의 삶이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깨닫고 있습니다. 일례로 주인공은 도축업자인데, 닭의 목을 기계로 자르는 일을 합니다.

사실 닭은 주인공의 분신입니다

. 왜냐하면 닭도 주인공처럼 ‘날지 못하는 새’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주인공은 밥벌이를 위해 매일 자신의 목을 자르고 있는 것입니다. ‘꿈을 포기한 자의 일상은 사실 ‘느린 자살’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을 이 장면만큼 선명히 보여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꿈을 쫓으려 하지 않습니다.

모두 포기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드는 짓도 피하려 합니다. 애써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일상을 포기하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은 다만 미련일 뿐입니다. ‘한 때 내가 그런 꿈을 꾸었고 노력도 했었지’ 하는 것을 통해 ‘적어도 내가 완전히 시체는 아니었어’라며 스스로 위로하기 위하여.

그래서 소설 내내 ‘빈소’나 ‘1주기’ 등 장례의 분위기가 흐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 ‘장례’란 죽음처럼 꿈의 추구 역시 결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최종 확인 입니다. 다시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깨끗이 소진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한 때의 꿈을 유류물로 가지고 있는 이들이 과거 자신과 꼭 닮은 이의 죽음을 기리며 모이고 대화를 나눕니다. 과연 이들의 마음 속은 죽은 자에 대한 추모로만 가득할까요? 그와 비슷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추모는 없을까요?

죽음은 일상의 정지이고 그래서 더없이 비일상의 영역입니다.

죽음의 영역에선 일상이 가진 중력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일상의 굴레에 갇힌 자들은 그 죽음의 영역에서 비로소 일상에서 강요 받은 시선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추모란 그렇게 자기 본연이 모습으로 깊이 침잠하는 것이고 바로 거기서 한 때 진정한 생명을 가졌던 때의 기억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미련은 그런 기억을 인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겐 그런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주인공의 일상 묘사에서 드러나듯,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이 살아 숨쉬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저 정해진 일상 궤도를 반복해서 맴도는 기계에 불과할 뿐. 내가 살아 숨쉬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그들에겐 그런 기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미련은 자기 보호 장치라는 것이죠. 그만큼 그들이 자신의 존재 증명에 절박하다는 뜻도 될 테구요.

그러고 보니 특이한 소설이군요.

꿈을 잃거나 포기한 자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거꾸로 꿈을 꾸고 노력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소설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꿈을 꾸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삶아 숨쉬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걸.

그러므로 ‘유류물’의 의미까지 우리는 달리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건 그저 꿈만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들이 꿈을 버렸을 때, 자신도 버린 것이니까요. 네, ‘유류물’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참된 나’인 것, 그게 바로 ‘유류물’인 것입니다.

꿈을 꾸고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쉽게 삶과 타협하라고 권합니다만 이제 그래선 안될 거 같네요.

대차대조표 상의 손익 차이가 너무 나니까요. 일상을 위해 꿈을 포기할 때 우리는 늘 실은 악마와 거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마가 요구하는 것 그대로 우리의 영혼을 안락의 대가로 지불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세상을 다 아는 척 조언하기 보다는 그저 믿고 응원해줘야겠습니다. 저 역시 이제부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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