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아름답던 그 기억이 난 아파서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사춘기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7년 12월, 조회 323

0.

 

내 눈동자의 나의 것
눈썹을 깜박이는 것도 나의 의지입니다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는 것도 나의 의지
내 손은 나의 것
담배를 피우거나
비벼 끄는 것은 나의 의지입니다
연기가 피어올라 공중으로 사라져가듯,
나의 말은 나에게서 나와
당신에게로 흘러들어갑니다
당신이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어느 날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거리에 불이 켜지면
나는 거리로 나갑니다
어느 날 가로등들이 꺼졌다 켜졌다 하듯이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나는 쏟아지는 불빛을 거리에서 맞습니다
나의 의지는 나만의 것이지만,

 

1.

제가 이 글에 마지막으로 단문응원을 남긴 날짜가 11월 28일이었으므로,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한 달간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고, 또 생각나기를 반복하는 관계로 결국 리뷰를 쓰기로 했습니다. 꽤 오래 고민해왔네요.

이 글은 개인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딸’들에게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부모님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거나, 이혼을 했거나, IMF를 겪으며 집안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거나 기타 등등의 어느 누가 들어도 “딱하다.”고 혀를 찰만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남들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구김없이 자랐고,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학원도 보내주고 등록금이 나오는 대기업에 다니더라도 손찌검하지 않는 부모님과 오빠 밑에서 자라 공부도 잘하는 누구더라도 말이에요.

평범해서 너무나 평범해서 힘들게 살고, 학대를 받는 친구들에게 한 번이라도 나서서 내가 겪은 아픔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중산층 자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하나쯤은 안고 있을 가정사. 하지만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사는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가정사라서 오히려 묵혀두고 안고만 있어야 했죠.

우리 부모님은 너무 좋은 분인데, 나는 왜. 라며 자책하는 모든 소녀들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죄책감은 너의 것이 아니라고 손 잡아 주고 싶어요.

 

2.

하재연의 시에서

“나의 의지는 나만의 것이지만,”이라고 하며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끝나는 것처럼

진은영의 시에서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고 <가족>이란 단어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소통은 이미 안에서부터 곪아 있는 단어일 수도 있어요.

현대의 가족은 훨씬 더 개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 대가족에서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르고 큰다고 했죠. 애틋하게 살뜰하게 대화를 나누고 챙기고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기는 정도의 여유도 없었을거예요. 그저 아프지 않게, 굶지 않게, 잠은 집에 와서 자는 정도면 족했을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하나나 둘이고 그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요. 보살핀다는 것의 개념을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주인공은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대여섯살 시절부터 사춘기가 끝나지 않을 24살까지 부모님의 보살핌이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부모님의 보살핌은 어린 아이를 돌보기엔 소홀했다고 볼 수 있고 대학생인 딸을 돌보기에는 너무나 지나쳤다고 할 수 있죠. 옆에서 보기에 그래요. 제 3자의 눈에는 그래요.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을 때에는 절대 알 수 없겠죠. 저는 오빠가 좀 더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서 그 객관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랐어요.

너는 왜 나한테만 그러냐, 부모님을 이해해 보려고 해봐라는 말일 나올 때마다 주인공만큼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차라리 없었다면.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차라리 없었다면.

 

3.

명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이런 명절은 이제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됐죠. 주인공의 아버지가 책임감으로 붙들고 있는 명절은 이제 어디에도 없어요. 그 자체로도 트라우마를 유발 할 수 있는 단어인 ‘사촌동생’에 대해 아버지가 그 막중하다는 책임감으로 마저 다 책임져줬으면 좋겠네요.

“이건 혼잣말이니까 가정폭력이 아니다, 내가 이상한거다. 딸은 원래 그래야만 했으니까.”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어린 아이의 갸냘픈 사고가 그 위태로운 세계가 안타까워서 글 한 줄에 한 숨 한 번이 나오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더딘 걸음으로 완주해내기가 꽤나 힘들었습니다. 진창에 빠져버린 수레를 버릴 수 없어 밀고 끌고 가는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주인공은 괜찮은건지 힘들어도 궁금해서 놓을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이해하려 “여자는 원래, 나는 원래”를 붙여가며 세계를 확장해 나가도 그래도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전부 누를 수는 없어서 어느날 외숙모에게 “아줌마는 식모에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죠.

그리고 그 질문이 잘못된 것이란 눈치는 있었던 주인공에게 명절과 친척은 더더욱 어려운 존재가 되어 어떤 것도 궁금해 할 수 없게 만들었을거예요. 입이 막힌 자의 영악함은 눈치를 빠르게 만들어주니까요.

 

4.

“저는 활발한 아이였고.” “저는 집에만 오면 감정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와 같이 이중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고단함.

부모님은 집 안에선 단속을 하고 통제를 하면서도 학교에서는 밝고 긍정적이고 공부도 잘하면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길 바랐죠. 그런 지구가 뒤집힐 정도의 거리를 ‘현명함’으로 메꾸길 바랐고요.

주인공은 부모님께 의식주라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저당잡힌 채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거나 무시하며 살아가야 했어요. 처음에는 순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외우려고 노력했고요. 말을 잘 듣고 칭찬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집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고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할 수 있고 자신이 겪은 일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버렸습니다.

부모님과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의 안에는 ‘부모님은 좋은 사람’이라는 각인된 기억이 남아서 이해 안되는 일들에 대한 이유를 요구할 수도 그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면서 자신의 꿈과 의지와 목표를 포기하지도 못해요.

저는 외모에 대한 지적보다 이 부분이 가장 아팠어요. 주인공 안에서 유리된 자아가 보였기 때문에요.

주인공은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는죄책감을 견디지 못해하고 끊임없이 우리집은 평화롭고 화목하지만 내가 잘못된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뒤로 갈 수록 부모님은 여전히 좋은 분이고 우리 가정은 화목하다는 논지가 유효하지만 주인공의 상태에 대해서는 표현이 거칠어져요.

“지랄, 발광, 추하다, 못돼먹다, 쓰레기,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의 죄책감을 느꼈다.”

덧붙여서 이를 악물고 말하죠.

“왜냐면, 자신들이, 잘못한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친가가 정말 싫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희열을 느끼고 싶었는데 느끼지 못했어요.

주인공은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고 이미 처참하게 부서진 뒤에 내뱉는 진심은 너무 작은 절규였어요. 게다가 주인공의 사춘기는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5.

리뷰를 쓰기 위해 메모지에 끄적거릴 때

<너는 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꽃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가시 덩굴이면 어떻겠어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겠죠.

주인공이 철학과를 간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요. 주인공은 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영역에 머물러 있어 그저 철학 속에서 답을 찾았길, 글로 자신감을 얻었길.

그리고 오롯이 혼자가 되었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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