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시야 (작가: 유권조,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12월, 조회 64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확증편향’이라는 것이 있다.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확증편향에 정보의 객관성은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미 ‘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대단히 확증편향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두 가지 의미로 그러하다. 하나는 주인공의 확증편향, 다른 하나는 독자의 확증편향이다.

우선 주인공의 확증편향부터 이야기해볼까. 사실 작품 내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힌트들이 산적해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본인이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힌트를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린다. 가령 늑대의 경우가 그러하다. 작품 내에서 의안이라는 장치의 기능은 순전히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증강현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디서부터 증강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주인공은 분간해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는 걸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은 눈앞에 나타난 늑대를 쫓아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벽에 손을 가져다 댄다. 벽은 푸근한 색으로 보이나 거칠고 차가운 감촉이 난다. 그리고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이게 작가가 독자를 설득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았다. 주인공의 확증편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편향된 독서를 하도록 만든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주인공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하나로 이어진다. 벽은 만져서 증강현실임을 알 수 있지만, 늑대는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고개를 끄덕이므로서 늑대는 증강현실이 된다.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의 눈앞에 있는 늑대를 증강현실이라고 치부하고, 독자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늑대를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늑대는 무엇이 되는가. 나는 이 늑대를 무의식의 상징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늑대는 실재하는 존재였음에도 말이다. 보통의 소설 역시 어느정도 독자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곤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증강현실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해석의 틀을 너무 크게 벌려놓았다. 그 점이 별로였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럴리가”라고 대답해야겠지만.

내 대학 후배 중에는 소설보다 시를 더 좋아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광범위하지만, 소설은 그 기나긴 서사로 인해 해석의 여지가 점차 좁아지게 된다고, 그 점이 별로라고 녀석은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소설은 굉장히 시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일종의 ‘분기점’ 같은 것이 굉장히 널리 분포하여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분기의 절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 한 사람이 머리를 굴려봐도 최대 5개의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다. 이 리뷰를 읽고 있는 당신이 이 작품을 읽으면, 나와는 다른 해석을 도출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린 결말’로 해석하기 곤란하다. 열린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계속하여 ‘확증편향’으로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소설 속에서 읽고 싶은 것만 읽고, 그래서 가끔은 작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작품을 해석하곤 한다. 그게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통제하지 못한 해석이 거꾸로 작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때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 작품?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그럴 일이 없을 거 같다.

다양한 사람이 이 작품을 읽고, 그만큼의 해석이 나오기를 나는 열렬히 기대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