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유권조라고 합니다. 평소 감상을 잘 남기지 않는 터라, 조심스럽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맴도는 좋은 이야기를 만나 짧게나마 남겨요.
원고지 137매라는 분량은 자칫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부담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은 것이 사실이어요.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까지 읽었을 때에 내린 결론은 조금 다른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글이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지요.
이는 다른 매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많은 표현방식 중에 글이 가진 특성과 가장 어울리는 이야기였다는 의미였어요. 다음 문단부터는 직접적인 줄거리와 관련한 내용이니 스포일러 처리를 하였습니다. 궁금하시다면, 본편을 읽고 오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제목인 여우녀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구미호로 대표되는 존재를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0. 단락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그 생각에 조금씩 확신을 보태지요. 독자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아내가 마을 사람들을 해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앞뒤를 따진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이는 글자를 중심으로 한 텍스트에서 두드러지는 효과입니다. 제한된 정보를 전달하며, 독자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완성하죠.
단락이 1. 로 바뀌며 많은 시간을 건너뛰어 이야기는 현대로 넘어옵니다. 영상 매체였다면, 초가집이 즐비한 마을에서 자동차가 지나는 도로의 모습으로 장면을 바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수현은 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애인 은주와 동거 중이며 동료인 윤 선생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요. 이후 몇 명의 인물이 등장하나, 저는 세 명을 의심하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누가 여우녀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서 말이죠.
여기서 저는 제목의 힘을 한 번 더 느꼈습니다. 처음, 주인공은 시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미스테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나, 그는 피해를 입은 일이 없었고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경찰도 아니었죠. 그런 일을 골라 쫓는 애호가 역시 아니었고요. 그럼에도 그가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나 연관이 있으리란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 리뷰를 읽는 분이라면, 줄거리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계실 테니 이어지는 줄거리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끝내 여우녀는 주인공인 수현이었습니다. 이는 영상 매체에서는 낼 수 없는 효과와 함께 다가오죠. 분명 성별을 명시하지 않았으나, 체육 교사이면서 ‘은주’와 사귀는 수현은 당연히 남자인 것처럼 분위기를 냅니다. 그의 의심은 ‘은주’를 향해 있고요. 이는 소설이 그저 만화, 영화, 게임 등의 원천 줄거리가 아닌 오롯이 별개의 콘텐츠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이어서 수현의 태도에 대해서 얘기를 할까 합니다.
가벼운 오해부터 기괴한 미스테리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있으면 해결사가 등장하곤 합니다. 많은 이야기에서 경찰과 탐정을 사용합니다.
여우녀의 주인공, 수현은 조금 다릅니다. 애초에 사건에 개입할 여지가 없는 일반인이었죠. 따라서 크게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애인 ‘은주’에 대한 의심을 품고 행동을 시작합니다. 미연에 여우녀를 막기 위해 그는 신문 배급소에까지 찾아가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다룬 5. 단락과 6. 단락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건우를 구하고자 했으나, 신통한 능력 하나 없기에 그를 설득할 수 없었죠. 여기서 사용된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렇게 죽음을 경고하는 사람들은 신통한 능력으로 상대가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재주를 보여주곤 했다. 나에게는 그런 솜씨가 없었다.
라는 문장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그래요, 여우녀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닙니다. 소설이지요.
이어지는 내용 속에 수현이 수제비를 먹으며 뻑뻑한 식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수현의 미각이 둔해진 탓이지만 그는 오히려 은주를 의심하죠. 영상 매체가 가진 나레이션과 달리, 소설이 가진 시점과 화자의 힘은 생각보다 큽니다. 저는 수제비에 대한 부분을 리뷰를 쓰면서야 다시금 생각하게 됐어요. 작가님은 이야기 곳곳에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제멋대로 확신을 품게 하는 장치들을 마련했습니다.
7. 단락에서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지난 일을 떠올리고, 8. 단락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을 내립니다. 즐거운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처음 읽었던 작가님의 작품은 Oo의 이름으로 쓰신 「황금의 유전자」라는 작품이었어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긴 호흡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어낸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단락을 나누지 않고, 연재 작품으로 8편을 올리는 것이 어떨까요? 하는 말을 쓸까 고민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굳이 영상 매체에서 페이드 아웃과 페이드 인을 쓰듯이 글을 풀어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만나면, 저도 모르게 나라면 어떻게 썼을까 상상하며 여운을 즐기기도 합니다. 저는 7. 단락에서 주인공이 알게 된 비밀을 이전에 편지로 봤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했어요. 수현은 언제나 전생의 기억을 잊고, 새로이 태어났다가 후에 기억을 되찾는 운명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후대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것이지요.
앞선 부분에서 그 편지를 읽은 수현이 본격적으로 ‘은주’를 의심하고, 은주는 수현을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픽션의 줄거리라고 둘러대는 부분은 어떨까 상상하기도 해요. 마지막엔 은주에게 떠나며, 언젠가 미래의 자신이 될 누군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쓸 수도 있겠네요.
또는 굉장히 오랜 세월을 보낸 한지에 쓰인 한자들을 보며, 해독하지 못하던 수현이 기억을 되찾은 뒤에 자연스레 그 뜻을 이해하는 장면은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래저래 말이 많았습니다.
제게 참 좋은 이야기여서 배운 것이 많았고, 읽는 동안 즐거웠어요. 글이 가진 힘을 다시금 보여주셨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