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픽션은 퍽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마침 저는 최근 격리 픽션 장르의 대표적인 비디오 게임인 <컨트롤>을 클리어한 참입니다. PS4 시절에 한 번 깨고, 스팀판으로 다시 플레이했습니다.
이 게임을 하고 바로 다음에 <초자연현상처리반>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모종의 사건에서 살아남은 황예담과 사라진 한태준, 그리고 초자연현상을 일으키는 ‘쐐기’를 토대로 흥미진진하고 힘있게 진행되는 장편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단 장르에 관하여 말해볼까요. 앞서 ‘격리 픽션’이라고 말했었죠. <초자연현상처리반>은 ‘격리 픽션’ – ‘음모론 SF’ 등에 속하는 호러에 다소 한국적인 판타지를 섞은 작품입니다.
격리 픽션은 흔히들 <SCP>의 등장과 함께 인기몰이를 한 장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족보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X-Files>, <프린지>와 <웨어하우스 13>과 같은 미국 드라마, <케빈 인 더 우즈> 같은 메타-장르적 호러 영화나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 같은 ‘파운드 푸티지 기법’ 등, 폭 넓은 ‘호러 레퍼런스’에 기대어 등장한 <SCP>는 … … .
사실 4Chan에서 등장했습니다. ‘SCP-173 조각상’은 거의 원본이나 다름없는 <닥터 후>의 ‘우는 천사’ 에피소드가 방영된 지 일주일 후에 게시판에 업로드되었습니다. 그때는 SCP라는 게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이었고, 프로 내지는 작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보고서’의 형태로 ‘번호’와 ‘등급’ 그리고 ‘양식’이 있다는 게 뭇 게시판 유저들의 흥미를 끌었고, 여기저기서 그 형식을 따라하다가 결국 ‘정리’를 한 것이 <SCP>의 기원입니다. 즉, ‘격리 픽션’은 생각보다 족보가 뚜렷한 게 아닙니다. 그저 그것을 즐겁게 향유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우리의 머리가 착각을 일으켜 멋대로 계보화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보통 계보니 족보니 하는 건 꼬이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미국인은 상상력이 모자라기라도 한 건지, 기묘한 게 있으면 두들겨패려고 안달이 나 있습니다. 그 결과 SCP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확보, 격리된 다음 보호를 하는 게 아니라 총칼로 두들겨패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컨대 대다수 격리 픽션 장르의 작품들은 톰 클랜시스러운 테크노스릴러나 밀리터리와 결합하고 만 것입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니까, 어떻게든 확보해서 통제해야지요.
<초자연현상처리반> 또한 이런 장르적인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문장과 전개에 굉장히 힘이 있고, 역동감이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요.
모 친구는 작품에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더라도, 앵간하면 리뷰로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일단 리뷰를 읽는 사람의 기분도 사람이고, 글을 쓰면 기록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소위 ‘꼽주는 게 기록으로 남으면 흉진다’는 건데, 그래도 너무 아쉬웠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말하려는 아쉬웠던 점은 작가가 다른 작가에게 절대로 지적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그럼 너는 잘 쓰냐?’ 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장 내지는 문체의 템포입니다.
오탈자나 비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성입니다. 문장은 평이하여 읽기 좋고,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지만, 포인트가 없이 전방위를 비추는 카메라 같은 느낌입니다.
한때 저도 소설에 문체 그딴 게 왜 중요한지 이해를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문체를 따지게 되더군요. 문체는 영어로 Style입니다. 무협을 쓰려면 멋들어지고 힘있는 한자성어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하고, 하드보일드를 쓰려면 담담하고 건조한 문장이나, 혹은 정 반대의 우수에 찬 아저씨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판타지나 공포 장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현실을 배경으로 한 문학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어슐러 K. 르 귄 선생님조차 에세이에서 ‘환상을 묘사함에 있어 문체야말로 모든 것’이라고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독자들은 존재하는 물체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환상에 대해서는 작가의 묘사가 유일한 이해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도 특이한 서술전략을 활용했습니다. 처음에 ‘형언할 수 없다’를 써놓은 다음,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세히 묘사하고, ‘역겹다’ ‘불경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SCP의 보고서 양식도 대표적인 서술 전략입니다. 문학 수업 시간에는 ‘낯설게 하기’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SCP의 보고서 양식은 익숙한 물체를 낯선 대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 ‘상상’이라는 간극을 헤엄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그럼 너는 잘 쓰냐?’고 물으면요. 도망치겠습니다. 하지만 <초자연현상처리반>은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답니다. 재밌는 소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