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속에서 묵직하게 살아내는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여자들의 왕 (작가: 정도경, 작품정보)
리뷰어: 피오레이, 17년 12월, 조회 47

여자들의 왕. 여성들이 남성중심적 세상에서 벗어나 이룬 여자들만의 이상향이나, 아니면 다른 형태로 남성과 여성이 이분되어 대립하는 세상을 상상케 하는 제목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상황은 이와 사뭇 다릅니다.

여자들의 첫 번째 왕이 군림하는 남자들의 세상에서 검을 쓰는 평민인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탐욕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여자들의 왕을 노리는 남자와 싸워 그를 죽입니다. 그런 ‘나’를 제거하기 위해 여자들의 왕은 ‘나’를 아들의 약혼녀로 택하고, ‘나’는 왕의 가족 간에 벌어지고 있는 권력 싸움에 자연히 말려듭니다.

‘나’의 약혼자, 즉 여자들의 왕의 아들은 어머니가 왕이 되도록 도왔고, 여자들의 왕의 딸은……어머니와 통하는 일면도 있으나 어머니가 이룬 것을 부정한다고 형언할 법한 행보를 보여 줍니다(하기야 여자들의 왕이 이룬 것이 남자들의 세상을 과연 얼마나 바꿔 놓았기에 ‘나’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싶지요).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상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무거운 현실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남성중심적 세상에서 여성 개개인이 획득한 힘이 언제나 여성들의 연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복잡하다는 현실. 세상과 사람을 움직이는 역학은 젠더 권력만이 아니라는 현실. 그 역학들이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곳이 세상이라는 현실이요.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에, ‘나’는 궁의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의 사랑과 존중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녀’의 매혹에 심취할 수도 없습니다(설명이 많지 않은 이야기라고 적었습니다만, ‘나’의 성적 지향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보여 주기만 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궁을 벗어나기를 꾀하는 ‘나’는 아무리 기회를 노린들 음모와 배신, 파국으로 치닫는 소용돌이의 흐름을 멈추거나 바꾸거나 빠져나올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치정소설은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나’는 모든 것이 늦어 버린 뒤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칼을 지니고 홀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또 다른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가지요.

 

이 소설은 치정소설입니다. 읽고 나서 묵직하게 기억에 남는 치정소설입니다. 그 묵직함은 ‘신분을 뛰어넘은 남녀 간 사랑의 해피엔딩’이라든가 ‘여성의 연대’ 같은 꿈도 이상도 끼어들 틈 없이 권력의 역학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세계관, 그리고 그 세계관 속을 묵직하게 살아내는 여성 ‘나’의 행보와 내면의 묵직한 묘사, 이들이 어우러져 우러나 감도는 긴장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에는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이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인물과 세상이 개성을 지니고 그 각각의 개성이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야기는 고유의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힘을 저는 이 소설에서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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