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나를 부르는 것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불청객 (작가: 이시우, 작품정보)
리뷰어: 보네토, 17년 6월, 조회 125

깊은 밤, 밖에서 나를 부르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서브컬쳐에서 닳고 닳도록 굴려지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관측 이전의 불확정성을 가리킨다. 내가 관측하기 전까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죽은 상태와 산 상태가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 이 이론에 대해 듣고 난 나는, ‘무슨 개소리야 죽은 건 죽은 거고 산 건 산 거지 깔끔하게 결론내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스리-!’ 하고 분노했던 듯도 하다만, 나중에 밤새도록 방문 잠그고 컴퓨터 켜서 게임하며 어렴풋이 슈뢰딩거 선생의 깊은 뜻을 반쯤은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문을 열기 전까지 방 밖엔 분노한 모친이 계실 수도 있고 계시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문을 열어야만 확정된다. 나의 우주에서는, 안방에서 주무시는 모친은 모친의 개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친의 우주의 상일 뿐인 거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야기 아닌가? 맞다. 결론적으로 나는 방 밖에 모친이 계실 수도 있고 계시지 않을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던전을 돌았고, 거의 대부분의 시도에선 보스전 쯤에서 모친에게 등짝을 맞고 성질내며 마저 보스를 잡거나(1) 성질내며 컴퓨터 꺼 버리고 자러가거나(2) 했던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불확정성 원리가 아닌가 싶다. 모친이 관측하기 전의 나는 자거나 게임하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

…그리고 이따위 것들을 떠올리다 머리가 아파진 나는, 이과였음에도 물리 ㅈ…아니 꽃까!를 외치며 다른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더 머리 좋고 이해력 좋은 자들에게 맡겨두기 적합한 사유의 세계 아닌가?)

 

지금도 종종 새벽 세 시, 방 밖에서 “정OO 컴퓨터 꺼라…?” 하고 모친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온다. 나는 이 목소리가 현실이 아님을 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밤에 던전을 돌지 못하니까. 과거의 억울함이 내게 환청을 그리움으로 보내온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내 어머니가 맞는가?

 

 

곳곳에서 부르는 것들이

 

슈베르트의 마왕을 듣는다. 열이 오른 아들을 향해 끊임없이 마왕이 구애의 목소리를 낸다. “아이야, 나와 함께 가자.” “아이야, 나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단다.” “아이야, 내 딸들이 너와 놀아줄 거란다.” “아이야, 네 예쁜 얼굴이 마음에 드는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새끼 미성년자 성범죄자의 자질이 충만하다?! 법의 심판을 받기 마땅한 괴이 같으니라고!)

아이야, 아이야, 아이야. 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 아들은 이미 죽어있었다.(1)

외삼촌이 돌아가시기 전, 울 모친께선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외삼촌을 데려가려 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외할머니는 엄마의 항의나 절규나 애원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오직 외삼촌에게만 말하고, 외삼촌만을 불렀다. 외삼촌이 대답하지 않았음에도.(2)

“XX년 X월 X일 X시, X아무개 명호(命呼). XXX, XXX, XXX.”

3인 1조로 찾아오는 차사님이 이름 세 번 부르면 꼼짝없이 육신에서 혼이 일어나 이승에서의 삶이 끝나고 저승으로 끌려간다는 이야기, 한국인이라면 다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3)

 

박복한 세상이다. 반응하지 않아도 끌고 가는 걸 보면. 하지만 작중 괴이는 생각보다 허약한 존재인가 보다. (하기야 강대한 존재였다면 어른을 대상으로 했을 터다. 어린아이에게 이 무슨 짓이냐,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름을 불러야만 반응하는 종류도 있긴 하다.

 

“어두운 겨울 밤, 방 밖에서 아는 사람의 목소리로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세 번 부른 이후에야 대답하라.” 각종 창귀 설화에서 말하는 축귀법이다.(1)

“초대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 각종 (정통) 흡혈귀 설화에서 말하는 흡혈귀의 특징이다.(2)

 

그렇다면 8층 밖에서 어른거리며, 문 열라고 이름 대신 학생을 연호하는 저 괴이는 어느 종에 가까울 것인가? 나는 동생을 지키려 했고, 치매 할머니를 지키려 했다. 보지 않고, 눈 맞추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그저 악만 쓰며. 초대를 요구하는 걸 보면 신사적이고,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걸 보면 어리숙하다. 하지만 초등학생에겐 한 없이 무서울 거다.

작중 나의 공포와는 별개로, 현실의 나에게서, 그리고 이 작품에서 제일 공포를 자극하는 건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치매 노인이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그게 그렇게 섬뜩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기에. 하지만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정말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셨을까?

 

쫄깃함이 탁 풀리는 결말은, 연령대를 생각하면 아쉽기도, 납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는가? 한 번 괴이를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 영안이 트이면 절대로 자연스럽게 닫히지 않기에. 귀가 트였다면 앞으로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는 건 부지기수일 터.

이계의 왕을 물리쳤다고 안심해선 안된다.

네겐 분명 다른 이계의 왕이 찾아올 거라 믿는다. (속편 말이다, 속편) 괴이는 한 번 관심을 가진 이에게서 수이 관심을 돌리지 않기에. …앞으로 찾아올 소년의 고난에게, 치얼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