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카나엘 디아즈의 하루 (작가: BornWriter, 작품정보)
리뷰어: 장아미, 17년 10월, 조회 137

*스포일러 주의. 작품을 먼저 읽으시고, 일독해주시기를 권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제가 쓴 글이 여러분의 감상을 해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자청해 써내려가는 리뷰가 아닙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작가님이 제게 먼저 리뷰 신청을 해주셨고, 이 작품에 대해 짧게나마 보탤 말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한동안 망설인 끝에, 저는 그것을 수락했습니다.

<카나엘 디아즈의 하루>는 저로서는 이미 읽은 적이 있는 단편소설이었습니다. 리뷰 신청을 받은 후에, 저는 그 작품을 여러 번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한 세 편의 리뷰와, 브릿G에 게재된 작가님의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정독했습니다.

김설단님은 이 글에 대해 “개인적으로, 디테일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쓰셨습니다. “식자재 업자가 내려준 박스가 몇 개인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펍에서 가장 빨리 떨어지는 술은 무엇인지, 안주 없이 마시는 단골들이 즐비한 술집에서 그나마 팔리는 요리가 뭔지”, 주인공이 “무슨 요일에 빨래를 하는 걸”지 궁금하다고도 하셨어요. 저 역시 “설거지를 할 때, 진짜 설거지만 해야” 한다는 김설단님의 논지에는 일부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디테일”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의견을 내놓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은 한 세계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의 짧은 에필로그 같습니다. 혹은 그 세계가 기지개를 켜기 이전의 프롤로그이거나.

제가 궁금한 것은 도리어 이런 것들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왜 카나엘 디아즈인가. 성별을 추측할 수 없는 그 이름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저는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미카엘이나 라파엘처럼, 뭔가 종교적인 느낌을 얻긴 했지만요. 카나엘이 파도에 띄워 보내는 꽃은 왜 하필 튤립인가. 제게 있어, 튤립은 누군가를 애도하기 위한 꽃으로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숨겨진 사연이 있는 걸까요? 판월도는 어떤 곳인가. 설마 판타지월드섬의 줄임말인 것은 아니겠지요?

제 눈에 작가님은 글 여기저기에 조금 다른 차원의 디테일들을 세심하게 숨겨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들을 다 찾은 다음에야 수평선 저편에서 그림자로 어른거리는 그 세계의 문을 열 열쇠를 완성할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그 세계는 작가님의 스케치북 위에만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훔쳐볼 수 없습니다. 이 단편은 제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 있는 독립적인 글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어요. 그것이 이 소설이 “진짜 설거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덧붙여, 작가님은 한 문장을, 글의 머리에 밝혀놓았지요.

[He works to forget his painful life.]

저는 뭐랄까, 이 문장이 무척 거슬렸습니다. 작가님은 다른 작품들의 첫머리에도 수수께끼인 듯 경구인 듯 아리송한 문장들을 낙인처럼 찍어놓으셨어요. 제게 있어 그건 어떤 식의 선언처럼 들렸습니다. 독자 여러분, 제가 쓰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라는. 혹은 대결이거나요. 자, 제가 이 문장을 어떤 형상으로 빚어놓았는지 알아맞춰보시겠습니까? 다른 분들의 경우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제게 있어 소설이란 한 마디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길고 구불구불한 길 같아요. 어느 정도는 비밀스러워야 하지요.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는, 저 너머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야 해요.

몇 작품을 읽으면서까지는 매우 신선한 시도라고 느껴지던 그 수수께끼/경구들은 어느 순간부터 제게 피로감을 안겨주었어요. 저는 작가와 대결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카나엘 디아즈의 하루>는 여전히 제 마음을 흔드는 단편입니다. 슬픔은 섬처럼 저 멀리에 떠 있고, 카나엘 디아즈는 “대충 잠옷을 걸쳐 입고 침대에 눕”습니다. “그제야 여동생의 생각이 돌아온다.” “그 모든 것이 떠오름과 동시에 매몰되어간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건 한 남자의 하루, 자정부터 다음 자정까지가 아니라 그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그 하루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괴로운 삶을 잊기 위해 일한다.”(He works to forget his painful life.)

카나엘 디아즈에게 삶은 고통이며, 일은 그것의 망각을 위함입니다. 제게 그는, 유리조각이 흩뿌려진 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사내처럼 보였습니다. 발바닥은 피로 젖어 있지만, 그는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 그러나 결코 익숙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것도 망각되지 않습니다. 파도처럼 그것은 계속 밀려옵니다.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든 몸을 움직일 뿐이지요. 수면만이 그것을 잠시, 대신 끌어안아줄 뿐이지요.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다시 “카나엘 디아즈의 하루는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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