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눈, 작가의 탄생 의뢰(비평)

대상작품: 녹색눈물 (작가: 아침은삼겹살, 작품정보)
리뷰어: K Rimmer, 3시간 전, 조회 19

* 이 리뷰는 아침은삼겹살님으로부터 의뢰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의 차이

몇해 전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을 읽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때 필자는 소설을 쓰기 전이다. , 순수한 독자로서인간실격을 읽었던 것이다. 책 앞표지 안쪽에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읽고서 소설로 들어갔다. 절반쯤 읽고 든 생각은 작가 본인 이야기네.’였다. 바이오그래피와 동일한 타임라인과 사건 흐름으로 볼 때, 작가 자신의 이야기였다. 다만, 소설의 형식이 화자인가 요조라는 작중 인물의 수기를 발견하며 시작되어, 수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액자 형식의 소설이었다. 이 액자 형식은 이 작품이 다자이 오사무 개인의 자서전이 아니라, 엄연한 픽션이며 문학적 완성도를 갖고서 작가와 자연인다자이 오사무사이의 간극을 벌려주는 장치이다. 그때 필자는 감탄했다.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토록 자기파괴적이고 비참한 자신의 일생을, 한 치의 자기 연민 없이, 액자식 구성의 소설로 만들어 만천하에 드러낼 정도의 뚝심이 있어야 작가라 할 수 있는 걸까?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내용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성 높은 고전의 반열에 당당히 자리잡고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힌다. 자신을 소재로, 이야기를 빚어내고 완성도를 끌어올린 덕분에 문학에서 영원성을 획득한 셈이다

 

작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모든 작가가 어떻게 오늘날 그 자리에 섰는지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서사, 이야기를 글로 쓰고 발표하면 모두 작가일까? 일단 그렇다 치자. 그래도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글 쓰고 발표하는 사람 중? 나는 아직 아닌데.’ 라고 겸손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난 이미 작가야!’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테니. 다만 필자가 여기서 묻는 것은 작가라는 피상적 타이틀이 아니라 일반인과 작가를 가르는 기준, 그 알맹이가 과연 무엇인가 묻는 것이다. 언제 일반인이 작가로 변신하는 것일까? 그 분기점은 과연 무엇일까?

나름의 작가론을 그려본다면 처음에 뭔가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강력하게 일어난다.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한 채로 막연히 욕구만 있다. 마치 주량을 넘어 술 마신 후 일어나는 구토와도 같다. 토해내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비로소 토하듯 쓰게 된다. 아직 이 사람은 작가가 아니다. 처음 글 쓰고 퇴고하고 타인이 읽을 수 있게 공개하고,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교재 삼아 인풋하면서 이 사람은 spiral한 상승곡선을 따라 차츰 작가의 경로로 부상한다. 고치 안 웅크린 애벌레가 날개를 조용히 준비하는 것처럼. 처음 쓴 이야기는 소설의 외관을 갖췄을지 몰라도 어딘가 미흡할 것이다. 글을 쓴 경험은 이 사람을 조금 나아진 나선상의 위치로 이동시킨다. 날개가 자라나고 다리가 생겨난다. 시놉시스가 뭔지, 인물 조형과 화법, 시점은 어떻게 쓰는지, 퇴고는 어떻게 하는건지, 제목을 어떻게 지어야할지 하나씩 터득하고 깨달아간다. 거기서 다시 다음 작품을 쓴다. 강렬한 욕구가 첫 작품을 쓰게 하고, 그 첫 작품의 경험은 다시 작가를 위로 올리며 연기적으로 상승한다. , 모든 작가는 처음부터 훨훨 나는 나비가 아니다. 그 작가가 써온 모든 습작과 작품들이 고치와 영양분이 되어서 지금 하늘과 꽃 사이를 날고 있는 것이다. 고로, 작가의 초기 습작과 최근작은 문체나 완성도에서 차이가 클 것이다. 초기 습작을 쓸 때의 그 사람은 지금의 이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나긴 인고의 과정에서, 작가는 제3의 눈을 획득한다. 작가 자신의 ego로써 작품을 집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ego조차 대상으로 바라보고 소재로 삼아 글로 바꿀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 성찰의 눈이 뜨여졌을 때 비로소 나비가 되는 것이다. 작가라는 종족은 삶 속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는 육안과, 타인의 고통까지 포괄해서 낱낱이 관찰하고 기록하는 제3의 눈이 함께 구비된 자들인 것이다

아침은삼겹살 작가는 지금까지 브릿G에 총 44편의 작품을 게재했다. 녹색눈물은 서른 번째 공개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처음 구상되고 집필된 것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소설의 형태로 완성되어 게재된 것이 서른 번째다. 장편이 아닌 단편을 빠르게 연속해서 쓰는 작가에게는, 한 편 한 편이 오랜 퇴고의 결정체라기보다 그때그때 떠오른 욕구를 빠르게 토해내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 작가가 어머니의 이야기만큼은 서른 번째 자리까지 미뤄두었다는 것이건 못 써서가 아니라, 토해낼 수조차 없을 만큼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컬러로 시작하여 컬러로 마무리되는 소설적 배치

이 소설이 단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풀어냈더라면 자서전과 경계가 모호한 평범한 소설이 되었을지 모른다.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문학적 가치는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처음에 신생아의 자연황달이 핵황달로 가는 확률을 말하면서 차가운 온도로 시작한다. 핵황달로 가면 빌리루빈 수치가 증가하고 피부와 흰자위가 노랗게 변한다고 기술한다. 독자는 소설의 도입부에서, 의학적인 기술을 읽으며 화자의 담담한 태도를 느끼게 된다. 소아과 의사는 화자가 생후 1년이 지났을 때, 무릎을 고무망치로 두들겨보더니 말한다. 이 아이는 평생 걷지 못할 것 같다고. 의사의 청천벽력같은 선고였으나 어머니는 그날로 유보행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화자의 어렸을 때 가정형편과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화자의 유년과 청년기는 가난, 학교 폭력, 자퇴와 가출, 운동권 활동을 거쳐 공무원이라는 안정으로 수렴한다. 2018년에 어머니는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를 시작한다. 2번의 큰 수술과 5년 넘게 이어진 항암 치료 때문에 몸무게가 훌쩍 가벼워진 어머니를 뒤로 하고 연년생 동생이 사망한다. 사인이 무엇인지는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동생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장애의 구체적 진단명조차 본문에 적지 않았다. 이 소설이 다루는 것은 질병의 목록이 아니라, 그 질병들 사이에서 오간 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길을 자주 놓치고 식사도 잘 하지 않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시 외곽의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고 어느날 주인공은 임종실로 오라는 통보 전화를 받는다. 투약 중지, 통증 조절, 섬망. 쇠약해진 병원 침대 위의 어머니의 얼굴은 간부전으로 노랗게 변해 있었다. 마흔 네 해 전, 화자가 태어났을 때 황달로 노랗게 변했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로 이어진다. 임종실에 들어온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어머니의 흰자위는 노란색을 넘어 녹색으로 변해간다. 알 수 없는 외침만 반복되고, 어머니의 노랗게 변한 눈 끝에서 녹색 눈물이 떨어진다. 이 소설에서 노란색, 녹색의 컬러는 비유가 아니라 병리다. 간부전이 진행되며 빌리루빈이 분해되어 만드는 빌리버딘이라는 색소는 실제로 녹색이다. 작가는 은유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작동한 화학을 제목으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내 눈물은 투명해졌는데, 눈 앞의 엄마는 더 짙어졌다

나는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자전적 소설이나, 화자의 노란색에서 출발하여 어머니의 노란색, 그리고 녹색의 눈물까지 컬러로 배치하여 일단 소설적 형식을 갖췄다. 이 소설의 백미는 지금부터다. 화자의 어머니는 사망 직전에알 수 없는 외침만 반복했는데, 어머니는 화자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화자가 중학생 때 일진들과 담배피우며 돌아다니다가 걸려 철재 먼지털이개로 맞던 순간, 대학을 그만두고 다시 문과에 진학했던 기억, 주인공이 공무원이 되자 주위에 자랑했던 것과 80만원짜리 건강검진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못이기는 척 받을 걸 하는 후회와  주인공의 동생이 죽고, 예민해진 것은 아들을 미워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는 고백을 한다

그래도 그때 너는 내 앞에서 아직 손가락이 굳던 아이였어.

그러니까 울지 마.

네 손은 나를 살리지는 못했어.

그래도 나는 그 손이 어디 있었는지 알아.

암 말기에, 죽음을 앞두고 알 수 없는 외침을 하던 어머니가, 이 길고 정연한 고백을 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어머니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울지 말라고 그래도 너의 손이 이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안다고 위로를 전한다. 작가는 제3의 눈을 사용하여, 어머니의 입에 살아있는 숨을 불어넣고 고백을 되살렸다. 다자이 오사무가 제3의 눈으로 자기를 객관화시켜 소설을 완성했다면 작가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 위로의 말들을 창조해낸다.

독자는 이 소설을 읽고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짓거나, 오랜만에 시골에 계신 노모에게 안부전화를 할 것이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독자의 정신을 정화하고 고양시키고 움직이는 힘이 있다. 작가에게 주어진 제3의 눈이라는, 획득된 이 재능은 작가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공용재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기초로, 이야기로 지어내고 다듬어 세상에 내놓는다. 독자는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을 읽고 정화되고, 감동받고 움직인다

 

세상의 모든 아들, 딸들에게

녹색눈물은 아침은삼겹살 작가의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이자 작가 개인의 사모곡(思母曲)이다. 태어났을 때 작가 자신이 앓았던 핵황달의 노란색이라는 컬러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간부전으로 노랗게 변하고, 녹색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회수된다. 작가는 제3의 눈으로 임종 순간 알 수 없는 외침만을 반복하던 어머니의 입에 생명의 목소리를 불어넣어 어머니를 잃었거나 혹은 언젠가는 잃게될 세상의 수많은 자녀들을 위로한다.

후반부 어머니의 독백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이고 따뜻한 사랑의 당부다. 울지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비록 날 살리진 못했지만 나는 너의 따뜻한 손을 기억할 거라고. 그렇게 어머니는 소설 속에서 활자로, 영원성을 획득하며 부활하여 앞으로 이 소설을 읽을 모든 아들, 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여줄 것이다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작가로 완성됐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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