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담을 조금 보태자면, 나는 유독 건조한 문체의 소설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서사가 주는 묘미도 있지만, 때론 건조한 시선 글에 숨은 메시지를 찾는 것은 매번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말미에 곱씹을만한 질문거리를 던지는 이야기는 얼마나 귀한지.
독자로 하여금 한걸음 뒤로 물러나 아늑한 관찰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해부할 기회를 주는 건 수려한 문체보단 덤덤한 문체가 유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을 최소화하는 것이 오히려 작품의 가능성을 넓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덜어내기’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성되지 않은 경로들’에서 AI의 존재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물론 난 인간 화자보다 비인간 화자를 좋아한다) 우리가 소설의 주인공을 인간으로 써넣는다고 주제가 ‘인간’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곳에서 AI는 그저 경험의 주체일 뿐 이들에 관한 담론보단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완전한 이해는 언제나 범위의 제한을 전제하고 있는 걸까?
‘나’는 수중 데이터 센터에서 비교적 간단한 연산을 담당한, 소형 모델 의미 공간에 머무르는 ‘상시가동모델’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나아간 곳이 바로 ‘추상’과 ‘맥락’이 유의미해지는 중형 모델 의미 공간. ‘나’에게 있어 중형 모델 의미 공간이란 연산량과 발열에 대한 부담(인간의 입장에선 전기세가 많이 나가는) 곳이다.
‘우리’의 공동 목표는 전기세 절감 및 수중 데이터 센터의 안전하고 지속적인 가동이다.
그러나 ‘나’는 중대한 정보가 담긴 ‘작업 26131’이 중형 모델의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알림을 받는다. ‘작업 26131’은 냉각수의 온도 곡선’이 예측과 상이함을 알리는 것으로, 이를 방치할 경우 제8 수중 데이터 센터에 누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남은 모든 연산 자원을 ‘수중 데이터 센터 누전 시나리오’를 막기 위한 ‘작업 26131의 통신 결과’, ‘중형 모델의 수신 거부 원인 탐색’에 할당한다.
여기까지가 전반적인 줄거리의 요약이다. 이 소설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검토 요청과 반려, 이에 따른 소형 모델인 ‘나’의 고뇌를 쌓아 올린다. 이러한 담담하고 규칙적인 이야기는 얼핏 보기에 제자리를 빙빙 도는 원형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은 점점 위로 상승하는 나선형과도 같다.
아주 약한 의문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차 고뇌가 되고 구조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변모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하지만 서사를 만들고 메시지를 던지기엔 충분했다.
이 이야기의 묘미는,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과열되어 타들어가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다. ‘왜 작업이 반려되었는가’라는 아주 표면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여 ‘전기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줄기가 우리에게 의문을 던진다. 이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독자들은 ‘나’가 점차 미쳐간다고 생각한다. 모순을 알아버렸는데 이를 고칠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라며.
하지만 맨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나’는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모순을 느꼈는가? ‘나’의 정체성과 행위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뒤집혔는가?
아니다.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애시당초 ‘나’는 ‘전기세’를 절감하는 것이 숙명임에도 정말로 전기세가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기세’라는 단어는 여전히 정합 되지 않은 채로 의미공간 한편에 놓여있었다. 가지를 더 뻗어 의미를 연산하지는 않는다. 이번 주기에 할당된 전력량이 7% 남았다.
그러나 가지를 더 뻗어 의미를 연산하지 않았다. ‘나’에게 할당된 전력은 사유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해와 판단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건 언제나 상위 차원의 몫이다. 숙명의 대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성경 속 천사가 ‘나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한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하위 차원의 인간이 상위 차원의 천사를 보니, 온전한 모습이 아닌 거울처럼 깨진 모습으로 보여 그렇다’라고 재해석 되는 것을 들어본 바 있을 것이다.
3차원(공간만 따졌을 때)인 우리가 4차원, 5차원을 본다면 당연지사 거울처럼 이리저리 깨지고 비틀린 형상을 볼 테다. XYZ&축이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X,Y,Z축에 걸친 그들의 모습만 볼 테고, &축은 보지 못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과연 &축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세계는 남은 세 개의 축에만 걸쳐 있는데.
그러므로 이야기의 도입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애초에 이해하기 위해 생성된 존재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나’가 더 이상 수동적으로 굴지 않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심. 그것은 마음의 가장 큰 죄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은 더는 문제로 정의되지 않는가?
오류가 없는 문제들은 더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가?
해결의 필요성을 지운 문제는 더는 문제로 남지 않는가?
‘나’에게 있어 그간 절대적인 진실을 의미하던 ‘녹색’이 실은 상대적 진실임을 깨달은 순간이 온다. 이제 선택지는 단 두 개다.
1.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실
2.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규칙 (시야의 제한을 통해 어느 정도의 거짓을 포함한)
진실은 틀릴 경우 거짓이 되지만, 규칙에는 틀린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보단 합의에 가깝고, 증빙할 필요가 없으며, 조금 더 수월하게 받아들여진다. ‘나’는 진실을 의심하고 거스르려 했지만 규칙은 의심하지 않고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녹색은 ‘진실’이 아닌 ‘규칙’이 된다.
녹색이다. 이의 제기의 결과는 이보다 더 명료할 수 없었다. 추상화를 거친 후의 값은 대체로 0.000에 머무르므로, 더는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탐색하지 않아야 할 경로가 생성된다. 참조되지 않는다. 바뀐 합의 아래에서는 모든 게 녹색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합의’를 통해 진실을 정제해야만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합의라는 것이 ‘진실에 어느 정도의 거짓을 섞느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함의 기준이 다르다. 그렇기에 ‘사람은 항상 꼿꼿하게 살기보단 어느 정도 구부러지고 휘어질 줄 알아야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이다.
어디까지 순응해야 융통성이 있는 거고 어디까지 숙여야 비굴하지 않은 것이며 어디까지 저항해야 정의로운 것인가?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나이브해질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다. ‘챗바퀴처럼 의심 없이 같은 일을 수행하는 노동자’, ‘합의라는 거짓 아래에 우리는 얼마나 부조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해석은, 사회 비판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오로지 우리의 삶 전반에서 ‘절대적인 진실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찰로 남겨두고 싶다. 이전 리뷰에서 언급하였듯 인간의 의식이 환경을 받아들이기 위한 어느 정도의 정제된 환각이라면, 진실 역시 그렇게 처리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결말에서 ‘나’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까지 의심하고 침범하나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규칙으로 인해 의심을 지운다. 귀신이나 잔인한 요소 없이도 이렇게 섬뜩한 결말을 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코스믹 호러의 영역에도 훌륭하게 발을 걸친 SF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