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써봅니다. 원래 글쓰는 사람이 아닌지라, 가독성이나 그런 부분에서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꾸준히는 아니어도 작가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었습니다. 용기내서 제가 읽으며 느낀 부분을 적어보았습니다.
각 부분에 대한 리뷰라 글을 안 읽으신 분께는 스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딸 심청이는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을 약속하고, 쌀 삼백 속을 내 받아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렸다.”
– 첫 문장이 글의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글을 다 읽기 전엔 그저 심청전의 한 부분일 뿐이었죠.
“부처,님?부, 처님!”
– 선우라는 아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란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청년입니다. 선우는 그저 자신을 윽박지르고 위협하는 이에게 웃어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102매가 되는 글 속, 오가는 수많은 대화중에 선우가 말한 대사는 오직, 부처님, 스님, 보살님 뿐입니다. 마치 오직 그것만을 알고, 중요하다고 하는 듯이요.
“아니, 요양원 일은 진행되고 있는 거요?”
– 일호는 절의 제일 어른 스님이지만, 노화탓인지 인지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양원 일을 돌아볼 정도로 정신을 놓은 건 아닙니다. 원주보살과의 관계를 보면 문란하기도 합니다.
허나 황거사의 회상을 보면 이전 일호는 불심이 깊은 승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지지 말라니까!”
– 반야행은 공양주 보살입니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여자입니다.
재주들이 지낸 과일을 제 것인양 빼돌려 양로원에 보시합니다. 이기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공덕을 쌓으려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보살님, 김치에 젓갈 놓으셨어요?”
-법광은 스스로를 고고한 승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내심 남들을 깔보고 하찮게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틀려먹었습니다.
일주문은 문이라 불리지만 문이 달려 있지 않단다. 문이 없으니 어때? (중략)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일주문은 아주 중요한 경계를 나누고 있는 것이란다. 이문을 기준으로 바깥세상과 부처님의 세상을 나누고 있지.
– 일주문은 바깥세상과 부처님의 새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문이 없지만, 경계를 가르는 문.
저는 이 부분이 참 신선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로막은 경계가 있지 않지만, 분명한 세상을 나누고 있는.
마치 우리가 삶을 살때 겪는 수많은 경계를 나타내는 듯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을 죽이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들었을때마다 쉽게 죽일 수 없습니다. 법이고 뭐고를 떠나, 우리 마음엔 살인을 하면 안된다는 경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경계 안에서의 우리는 죽이고 싶은 마음만 갖고, 욕만 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선 순간, 이전 과의 세상과는 결별합니다. 살인자라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법광은 두려움과 혼란이 가득한 눈을 광목천왕처럼 치켜뜨고 선우를 노려보았다.
– 불교에는 사천왕이 있습니다. 지국,증장,광목,다문. 그중에 작가님은 광목천왕으로 법광을 묘사했습니다.
사천왕의 역할을 살펴보면 왜 광목천왕으로 묘사가 되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지국천왕은 나라를 수호하고, 증장천왕은 덕을 키우고, 다문천왕은 불법을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합니다. 광목천왕은 험상궂은 눈으로 악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죠.
법광이 광목천왕의 눈으로 선우를 본 것은 이미 자신의 치부를 보게된 선우를 “악”으로 선정한 것입니다.
선우는 법광이 아수라 같은 표정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자,
– 그러한 법광을 선우는 광목천왕의 얼굴이 아닌 아수라로 봅니다.
“그 음식 갖고 지랄지랄한다던 스님?”
공덕을 쌓겠다는 반야행은 모셔야할 스님의 뒷담화를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죽어도 다른 데 안가겠지. 큰 스님 돌아가시면 이 절이 자기 것이 되는데..(중략)”
.. 그럼에도 다른 모든 조건들 때문에 반야행은 이곳에서 절대 나갈 수 없었다.
– 법광과 반야행이 절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곧 스스로를 이곳에 매여있게 만드는, 폐쇄 공간으로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합니다.
법광스님 요서차에 벽면 갈라진거 보수하려고 석고 가루 좀 사왔어요
– 다르게 쓰일 석고 분말 포대가 등장합니다. 순수하게 벽 보수를 위해 황거사가 준비한 것입니다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하나의 문장이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작은 우연들이 모여 큰 사건을 만드는 듯합니다.
황거사는 막내아들을 병으로 떠나보낸 아픔이 있었다.
– 황거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돈 때문에 치료하지 못한 죽은 막내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황거사는 “돈” 때문에 아이를 포기했다기 보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먼저 아이를 포기했다고 보입니다. 황거사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고 있고, 그 죄책감으로 더욱 선우를 돌보려합니다.
일호는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로 똑똑히 광명 속의 그 얼굴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분명 선우의 얼굴이였다.
-꿈속에 나타난 부처의 얼굴이 선우입니다.
그 까닭은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처의 얼굴이 선우라는 것이 아니라 일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손에 나투신 부처의 얼굴이 선우였다’ 입니다.
일호는 그 까닭은 타락한 승려에 대한 마지막 기회일지도,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선우는 헤헤 웃더니, 사냥꾼에 쫒기는 노루처럼 풀쩍풀쩍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여기서부터 황거사, 일호,법광,반야행이 선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묘사됩니다.
황거사는 선우가 사냥꾼에 쫒기는 노루로 보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선우를 내 쫒으려는 무리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일호는 선우가 녹야원의 사슴으로 보입니다.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장소의 그 사슴입니다. 자신의 꿈에 부처로 나타난 선우인만큼 이제 일호의 눈엔 선우가 존엄한 대상으로 인식됩니다.
법광은 선우를 영약한 여우로 묘사합니다. 자신의 낯뜨거운 모습을 목격한 선우입니다.
반야행은 선우를 어린 산토끼로 봅니다. 사냥감에게 타깃이 되는 아주 연약한 존재죠.
선우를 구할 방법, 악의 구렁텅이에서 빼내어 안전하게 지킬 방법, 돈, 돈이다.
– 황거사는 선우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선우를 지킬 방도는 역시 돈뿐이다라고 판단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해서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미끄러져나가는 트럭 위로 굵은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눈발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 눈은 절을 누구도 나올 수 없고 들어갈 수 없게 하는 폐쇄공간으로 만들게 됩니다.
“엄마, 놀라지 말고 들어.”
– 반야행의 둘째 아들이 사고를 당합니다. 이제껏 반야행이 했던 공덕은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태에서 반야행에 먼저 떠올리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무당입니다. 또한 무당은 그런 반야행을 등쳐먹을 생각만합니다.
“…그래, 공양이다. 공양을 올려야지.”
-아들에 대한 걱정에 정신줄을 놓게 되는 반야행입니다.
일호 또한 자신의 면죄부를 위해 선우를 즉신불로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일호는 면죄부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부처님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제일 정상적이어야 하는 법광 또한 일호의 계획에 동조하게됩니다. 이 부분이 좀 의아했었는데요. 법광이 자신의 고귀함에 얼마나 미쳐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이미 자신은 완성형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찮은 것 뿐입니다. 그러니 하찮은 존재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고, 그 기회에 싹 정리해버리자고 판단하지 않았을까합니다.
그러니 사실 법광도 이미 제정신은 아닌겁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미쳐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가운데 자리한 석가모니 불상의 내리깐 눈꺼풀 속 검은자위는 법당 안 세 사람을 향해 있었다.
– 이 장면에서는 시점이 달라집니다. 바로 법당 가운데 앉아 있는 석가모니의 시선입니다.
내리깐 눈꺼풀 속 검은자위는 법당 안의 세사람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세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 받는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취하는 행동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이 하나씩, 하나씩 꺼집니다. 결국 하나 남은 촛불이 꺼짐으로써 세 사람이 모두 한 뜻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더불어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법당이 암울한 미래를 암시해줍니다.
일호는 잠들어 있던 선우를 깨웠다.
-비극적인 거사가 치뤄집니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황거사는 돌아옵니다. 돈이면 선우를 지킬 수 있다고 믿은 황거사는 결국 선우 곁을 잠시 떠남으로써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마치며-
횡설 수설 적은 것 같고, 뭔가 많이 빠진 것 같지만, 이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며 재밌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목, 진노의 날을 떠올려봅니다. 사실 이 글은 처음부터 D-8로 시작해서, 점점 디데이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과연 진노하는 것은 누구였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황거사 일까요? 아니면 다른 등장인물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그저 조용히 지켜본 법당의 부처님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