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퀄리아
불쑥 들이밀고 싶은 명제가 있다. 모든 트라우마는 사적 경험이다. 트라우마의 표현에만 한정하지 않고, 주관성이 그 인식에도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트라우마의 퀄리아1이다. 감각의 질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퀄리아는 객관으로 환원을 거부한다. 우리는 사과는 붉다는 표현을 공유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붉다’라는 감각이 서로 간에 동일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인의 트라우마가 발현되는 겉모습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 내부의 구조에는 직접 닿을 수 없어 간접적으로 추론해야 한다.
‘주황색’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 가해자의 트라우마가 세계에 대한 인지를 어떻게 변형하는지 드러내는 소설이다. 도입부에서 주선민은 주황색이 으뜸을 차지하는 색채의 위계에 이상함을 느낀다. 물리환원주의2에 따르면, 망막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L-원추세포가 560 나노미터에서 580 나노미터의 파장대에 속한 빛, 즉 주황색 자극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는 주황색이 일상생활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주선민의 주관적 경험을 설명하지 못한다. 나에게, 이러한 위계가 존재하는 까닭은 주선민의 마음 내부에서 색에 대한 감각 간에 낙차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설이 어머니와 누나의 폭로로 주선민의 자기기만을 벗겨내자 그 낙차는 트라우마가 남긴 잔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음성잔상과 양성잔상
태양을 직시하지 마라. 잔상이 보일 뿐더러, 시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될 수 있다. 주선민에게도 회피하고픈 대상이 있다. 자신이 연기를 통해 간신히 유지하는 동생 주선우가 갇히고 타오른 푸른 컨테이너이다. 강렬하게 빛나는 실상은 시야에 허상을 새기곤 한다. 태양을 보면 몇 초간 하얀 원이 둥둥 떠다니는 양성잔상3이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몇 분간 어두운 얼룩 같은 음성잔상4이 나타난다. 이 유비를 주선민의 사례에 도입해보면, 주선민은 남동생의 죽음과 활기를 상징하는 푸름과 주황이라는 색 사이에서 파란색의 보색인 주황색을 외부 세계의 속성으로 오인하는 현상을 겪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누나가 주선민에게 기일을 기리자는 말로 남동생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고 나자 트라우마의 퀄리아가 변화한다. 작중 초반 주선민이 어머니의 정신병 편력이 자신에게 유전되었을까 걱정했던 예견이 이루어지는데, 자신이 발명한 허상이 실상을 대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억제되던 음성잔상에서 만연한 양성잔상으로의 전이다. 누나의 폭로 이전에 주선민이 주황색을 과잉이라고 느꼈다면, 동일 인물이 폭로 이후에는 물체의 주황색이 탈색되고 주황색이 시야에 넘쳐나는 환각을 본다. 주황색 물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촉발되던 감각이 주황색 환각을 통해 지속적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순간의 양성잔상이 다음 양성잔상을 촉발하는 악순환에서, 주선민은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노을과 단풍이 회색인 세상에서 주선민이 뛰어든 자기 정화의 주황색 불길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떨어지고 있는데 떨어지는 것을 모르는 상태. 이는 ‘주황색’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허상이 실상을 대체하는 두려움이다.
추락과 상승
주선민의 아버지는 주선우의 죽음 1년 후, 회사 옥상에 올라가 스스로 떨어져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였다. 주선민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뛰어내렸다고 안다. 그 앎의 정당성을 뒤로 하고서, 나는 추락과 상승의 이항대립을 발견하였다.
추락하기 위해서는 상승을 감행해야 한다. 혹은 올라갔다고 착각해야 한다. 주선민은 불길을 뚫고 2층 연습실에 있는 남동생을 구하러 가고, 주황색 불길을 공유하는 환각을 통해 심리적 상승을 누린다. 그러나 이는 주선민의 왜곡된 인지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무너지며 추락을 겪고 있다.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상승 이후 추락을 겪은 존재다. 이는 가장의 몰락이라는 전통적인 주제의 변주이다. 추락으로 인한 경제적 무능력이 결과로 배치되거나 암시되고, 트라우마가 몰락의 이유가 된다. 또 의심이 의심을 낳는 트라우마도, 믿음이 믿음을 낳는 트라우마도 추락을 부른다. 다만 아버지는 자신의 추락을 알았지만, 주선민은 자신의 추락을 모른다는 것이 다르다.
이와 반대로 어머니와 누나는 추락하고 나서 상승을 겪은 이들에 속한다. 주선우의 죽음 이후 병세가 심해진 어머니는 소설 작중 현재에선 상태가 개선되어 좋은 시설에 들어간 것으로 묘사된다. 우등생이던 누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교대에 불가피하게 진학했다가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교육 종사자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상승인지는 유보해둘 필요가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추락의 깊이에 대한 섣부른 추정은 자제해야 한다. 트라우마의 퀄리아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데, 오직 주선민의 감각질만 독자가 더듬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환원불가능성
트라우마의 퀄리아는 환원을 거부한다.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주선민의 퀄리아를 상상해볼 수 있지만 일차적 경험에는 도달할 수 없다. 왜 하필이면 주황색이 평소보다 눈에 띄는 주황색 같았는지, 왜 하필이면 주선우가 수첩에서 기타리스트로 조형되었는지, 작중에서 명쾌한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주선민에게는 그저 주황색이 이상했고, 그저 주선우가 배우가 아닌 기타리스트로 성장했을 뿐이다. 문제는 주선민의 세계가 현실 세계만큼이나 진실됨에 있다. 주황색보다 더 주황색인 색을 느끼는 인물에게, 그가 느끼는 주황색은 주황색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용하다. 그래서 주선민은 자신의 세계에서는 잔상과 추락을 경험한 적이 없고, 이분법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분법을 사용하는 연유는 주선민의 퀄리아를 재구성해보기 위함이다. 가해자의 트라우마를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이해해보려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가해자란 타자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다. 법칙이 아니라 사례로, 추상적 논증이 아니라 구체적 실증으로 독자가 자신만의 퀄리아를 겪게 됨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나의 주황색은 당신의 주황색이 아닐지도 모른다. 잠시 두려워하자. 그러나 그것이 색채의 속성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마침 주선민과 주황색은 모두 복잡하고 거짓되고 진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