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마이크로소프트·메타·인텔 같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해고를 단행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술 기업들이 개발자들을 우수수 내보내는 장면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서늘한 공포를 먼저 떠올리게 했다. 그 공포의 기저에는 이런 불안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였던 인공지능이 어느새 주인인 내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위기감, 그리고 그 도구에 불과한 인공지능과 인간인 내가 무엇이 다른지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불안함. 점점 줄어드는 채용 공고 앞에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읽어온 SF 소설의 도입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자율 주행 알고리즘 최적화를 위한 비공식 합의팀」은 자율주행차에 운전대를 맡겨버린 사회를 통해 인간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떠맡긴 운전대는 비단 자동차의 것만이 아니다. 능숙하게 협상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공지능이 제시한 매뉴얼을 수행할 뿐인 기현을 보라. 보행자를 쳐 놓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태호는 또 어떤가. 인공지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그들에겐 모든 것이 명쾌해 보인다. 선택에 따라붙는 딜레마의 쓴맛은 뱉어버리고, 책임 없는 자유만 달콤하게 집어삼키는 모습은 영락없이 욕심 많은 어린아이 같다. 기현은 이를 ‘윈윈’이라며 그럴듯하게 표현하지만, 과연 그럴까?
작품은 보행자를 친 뒤 태호의 감정 묘사를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썩어가는 이빨처럼 불안한 악취를 풍긴다.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하는 태호의 무심함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조건을 상기시키는 구석이 있다. 판단과 책임을 포함한 행위가 인간의 조건이라면, 그 운전대를 인공지능에 떠넘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 것일까. 이 막막한 질문을 안고 질주하던 자율주행차를 멈춰 세우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의 육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보잘것없는 보험금 액수로 환산되던 전수철의 육체는 합리성의 신화를 깨뜨리며 다시 셈할 수 없는 인간성을 되찾는다. 하지만 기현의 말마따나 그것은 자해공갈이나 다름없다. 비단 자율주행차 앞에 심청이처럼 몸을 던졌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곧 인공지능에게 떠넘겼던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다시 제 몫으로 끌어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책임의 쓴맛을 달게 삼키기로 한 ‘자해공갈단’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결코 아름다운 꽃길이 아니다.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조용한 작품 속 세상을 보라. 문제의 암페어 사는 여전히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고, 사건은 몇 번의 꼬리 자르기와 벌금으로 정리되어 버리지 않던가. 시원한 전복과 승자의 영광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작품의 말미에서 김빠진 탄산수를 마신 듯 아쉬운 입맛을 다시게 될지도 모른다. 많지는 않아도 따박따박 나오던 월급, 짭짤한 인센티브,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자해공갈단 팀원들이 쥐게 된 것은 불안정한 미래와 답이 나오지 않는 윤리적 고민거리,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손이다. 하지만 그들이 망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이전보다 한결 인간적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인공지능이 끝내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움’이란 지능이 아니라 자해에 가까운 번뇌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옳은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능력. 때로 길을 잃고 후회로 밤을 지새우더라도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악착같음. 투덜대면서도 낙오한 이웃들을 차에 태우고 덜그럭덜그럭 삶을 운전해 나가는 성실함. 그 어설프고 엉덩이 아픈 운전자의 자리야말로 미래의 우리에게 남은 자리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