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살아남을 이야기를 위하여 공모(감상)

대상작품: 식상한 이야기 (작가: 노르바, 작품정보)
리뷰어: 이외, 3시간 전, 조회 4

글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을 먼저 읽어주세요.

작은따옴표로 표기된 내용은 작품의 내용을 직접 ‘인용’한 표현입니다.

 

 

 

들어가며

독자이자 한 사람의 작가로서, 이 글이 주는 깊은 울림을 잊을 수 없어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본 리뷰는 작가님께 드리는 독자로서의 응원이며, 독자이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개인적인 사유를 담아 읽은 기록임을 사전에 안내드립니다.

안내사항을 전달드렸으니 우선 오늘도 질문 하나로 시작해봅시다.

작가는 무엇을 위해 쓰며, 독자는 무엇을 위해 읽는가?

 

 

‘한없이 뻔한 이야기’, ‘틀리지 않은 이야기’

‘한없이 뻔한 이야기’, ‘예상 가능한 구성’, ‘너무나 식상했기에’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 이야기. 우재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파일을 첨부하고, 메일을 보냅니다. 작품은 이렇게 익숙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뭔가를 쓴다는건 이런 일일지 모릅니다. 나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라는 사람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 그렇다면 어쩌면 평범하고 식상하게 살아온 사람이 쓸 수 있는건 그런 이야기 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생겨납니다. 작품에선 현수로 대표되는 사람들입니다. 현수는 다릅니다. 아마도 우재의 편집자가 현수의 글을 본다면 틀린 글이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틀렸기에 특별할 것입니다. 그게 팔릴까요? 아무도 모르지만 누군가의 마음엔 꽂힐겁니다. 특별하니까요.

 

 

메아리에 대하여

작품은 식상한 글과 독창적이고 특별한 글을 대비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글에 대해 먼저 살펴봅시다. 특별한 글은 무엇일까요. 현수가 왜 특별한 글을 쓸 수 있었나요. 작품은 그가 이야기를 사랑했기 때문이라 답합니다. 그는 질 좋은 글과 나쁜 글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읽을 정도로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그의 투박한 글에 묻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식상한 글’은 무엇일까요. 식상한 글을 알기 위해선, 우재의 반대편에 있는 현수나 희준의 글을 봐야 할 것입니다. 희준과 현수의 글은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동형이죠. 희준의 글에 대한 부분은 다소 개념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있으니 현수의 글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현수의 글에 대한 묘사는 있지만 제 시선이 머무른건 현수의 마지막 순간 남은 완성되지 않은 다섯 편의 글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를 쓴다는 건, 결국 누군가한테 하는 말이야.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라도.’

저는 이 문장이 상당히 외롭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한 글을 쓴다는건 자기 자신에게 평범하지 않은 말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고, 그런 평범하지 않은 말은 평범한 사람들이 해줄 수 없는 말이라는 거니까요. 세상과 유리된 존재는 홀로 떠돌기 마련이고 홀로 떠도는 글은 어디에도 부딪히지 못하기에 끝나지 못합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느낀 ‘특별한 글’의 운명이란 이러했습니다. 꽤 자의적인 오독이지만요.

이러할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현수의 외로움이며, 그에게 이야기를 쓰는 일이 갖는 의미입니다. 누구도 해줄 수 없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기 위해. 같은 세상에서 다른 이들과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라도 설득시키는 일이지 않았을까요. 실제와 지각의 틈을 메우기 위한 과정 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는 현수가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현수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마지막을 앞둔 상황에서 글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상황이요. 그는 전달하기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 아직 해야 할 말도, 하고싶은 말도 많을겁니다. 그런 인물이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섯 편의 미완 글은 자신을 마무리 짓지 못한 인물의 흔적이 아닐까요. 자신이 끝나버려도, 이야기는 끝내지 않겠다는 것이요. 이것 역시 자의적인 오독이지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현수는 우재에게 말하죠. 식상한 글을 써달라고. 저는 그 말에서 자신이 평생 이루지 못한 것을 친구에게라도 부탁하는 간절함이 느껴졌습니다.

수첩에 이렇게 적혀있지 않습니까.

‘식상한 이야기란, 모두가 한 번쯤 살아봤거나, 살고 싶었거나, 살지 못해 아팠던 이야기야. 그러니까 네가 가장 잘 쓸 수 있어.’

식상한 이야기는, 현수가 쓰지 못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끝내 살아남을 이야기

평범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요. 평범한 이야기는 모두가 이해하고 알고 있기 때문에 식상합니다. 그렇기에 닿을 수 있을 것이며, 이해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우재는 ‘식상한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오랜만에,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기분’으로요. 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식상한 이야기를요. 그리고 삶의 평범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후에 그가 어떤 글을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특별한 글에 집착하지 않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아름답고, 따뜻한 내용이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식상한 이야기는 읽히지 않을겁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식상한 이야기는 팔리지 않을 것이며, 공모전에서 상을 타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식상한 이야기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개인적인 사견을 추가하여 식상한 이야기를 재정의하고 싶습니다. 식상한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닌 것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완전한 사람들처럼요. 식상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이야기, 꺼내보지 않아도 아는 이야기. 하지만 그런 평범함이 삶을 지탱하죠.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는 세가지입니다. 식상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아닌 이야기(우재가 원래 써오던 이야기), 식상하지만 내가 담긴 이야기(작품의 말미에 나오는 이야기), 그리고 특별한 이야기. 이 중 우리의 이야기는 식상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아는 이야기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잃고 특별한 이야기, 독창적인 이야기, 잘 다듬어져 매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남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서두의 질문을 불러와봅시다.

작가는 무엇을 위해 쓰며, 독자는 무엇을 위해 읽는가?

저는 지금까지의 리뷰를 글을 쓰는 사람이자 독자의 입장에서 작성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 작품을 읽을 때 제가 내린 결론은 단순합니다. 하나는,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식상할만큼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작가가 삶을 걸고 쓴 이야기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건 독자의 몫이라는 점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만드는건 그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야기를 고유한 이야기로 만드는건 그걸 읽는 독자이지 않겠습니까.

이 작품은 작가의 입장에서 쓰였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완성되는건 독자가 응답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제목처럼, 식상한 이야기를 살아남게 만드는건 독자이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아무도 새롭다고 말하지 않’는 익숙한 이야기를 각자의 삶에 붙잡아 고정시킨다면 식상한 이야기는 독자에게 만큼은 고유한 특별한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럴 때에 비로소 식상한 이야기는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며

이번 리뷰는 다소 오독을 감수하고 작성하였으므로, 작가님의 의도와 어긋나는 지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식상한 이야기에서 저를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요.

식상한 이야기가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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