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때때로 우리를 아주 힘들게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일어난 수많은 범죄는 우리가 욕망에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경고하는 듯합니다. 이런 범죄적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수많은 종교에서는 그것을 죄악시하며 억제하도록 해왔습니다. 우리에게는 특히 불교가 친숙하겠죠. 이 소설도 같은 절에서 생활하는 비구니에게 부정한 음욕을 품고 있는 어느 사미승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제는 종교가 아니라, 욕망 그 자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필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필수적인 욕구는 그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것, 이를테면 식욕과 수면욕입니다. 반대로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그것을 해소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것, 즉 성욕이나 명예욕 등입니다. 일각에서는 식욕과 수면욕조차도 품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사과학 내지는 종교적 광신을 추종하는 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상식인은 일단 의식주에 대한 욕구마저 거세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연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구인 명예욕, 권력욕 등은 실제로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중점은 자연적이기에 누구나 느낄 수 있으면서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은 욕구일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대표적으로 성욕을 꼽습니다. 주인공 사미승이 겪는 번뇌이기도 하죠. 이때 번뇌는 괴로움이라는 의미인데요, 기독교에서는 성욕을 색욕이라는 이름으로 죄악시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성욕을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욕망에 대한 두 관점인 죄악과 괴로움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는데, 당사자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죄악은 외부에 의해 규정된 것입니다. 스스로 어떠한 개념을 죄악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유를 통해 어떠한 개념을 죄악이라고 규정지을 때, 우리는 무엇이 죄악이고 무엇이 죄악이 아닌지에 관한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괴로움은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괴롭지 않은지에 관한 기준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괴로우면 괴로운 것이고 괴롭지 않으면 괴롭지 않은 것이죠. 그렇다면 괴로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불교에 몸담고 있는 주인공이 자신의 욕망을 죄악으로 여기고 자신이 죄인인지 끝없이 되묻는 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멀어진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도 번뇌와는 별개로 계율이 있습니다. 사미승인 주인공도 사미십계를 받았고, 그중에는 불사음계, 즉 음행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결말에 다다랐을 때 주인공은 비구니를 떠올리며 자위행위를 합니다. 이는 종교적 계율까지 가지 않고 일반 윤리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명백하게 비윤리적이죠.
이 부분에서 성욕이라는 개인적인 문제는 죄악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로 변모합니다. 그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죄는 선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한마디를 하지 못해 일을 더 크게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술했듯 괴로움은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지를 물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지닌 죄책감의 표명이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죄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그 점에 있어서는 그가 여느 철면피보다는 나은 인간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어쩌면 괴로움 끝에 내릴 그의 결단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죄악과 괴로움은 오직 개인의 선구적인 결단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엽편이었지만 욕망과 죄악, 그로 인한 내적인 괴로움에 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