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끝난 집, 서윤은 죽은 친구 해인의 방에 들어선다. 해인의 언니가 건넨 종이 한 장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서윤이 오면, 옷장은 서윤이 열게 해.
옷장을 열자 낯선 향이 난다. 해인의 짙은 머스크가 아닌, 더 가볍고 마른 냄새. 거기서부터 서윤은, 그리고 독자는, 해인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옷장 안에는 마치 두 사람의 옷장을 잘못 섞어 놓은 느낌이 났고, 가죽가방 안에는 해인의 이름이 아닌 멤버십 카드가 있었으며, 봉투 안에는 서윤 자신의 사진들이 있었다. 횡단보도 앞 옆얼굴, 카페 창문에 비친 정면,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 모두 서윤이 모르는 순간들.
그리고 수첩에 적힌 것들.
소매는 한 번만 접음. 기다릴 때 핸드폰을 잘 안 봄.
수첩에 적힌 문장들은 단순한 관찰이나 스토킹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해인이 오랫동안 수행해온 일종의 자기 갱신 프로젝트의 흔적이다. 더 부유해 보이는 여자들, 더 단정해 보이는 여자들, 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여자들의 말투와 태도와 기색을 조금씩 떼어내 자기 위에 덧입히는 일. 해인이 스타일링 어시스턴트와 행사 스태프 사이 어디쯤 되는 일을 하며 몸으로 익힌 것—옷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태도가 먼저라는 말—은 결국 스스로에게도 적용된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단순한 모방 서사에 대한 분노나 씁쓸함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 때문이다.
서윤은 원본이 아니라 질감.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세상을 지나가는 모양.
해인은 서윤 자체가 되길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서윤이 아무 생각 없이 몸에 두르고 다니던 어떤 태도—낯선 자리에서도 원래 거기 있던 사람처럼 앉는 법, 아무 일 없는 얼굴을 하는 법,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는 법—를 원했다. 그것은 사랑도 질투도 아닌, 사회적 생존에 대한 절박하고 고독한 갈망이었다.
여기서 소설은 훨씬 깊은 질문을 건드린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화하고,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옷을 빌려 입으면서 상대를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소통과 이해는 언제나 불통과 오해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내가 전달하려는 것과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말이든 문자든 언어란 정확하지 않고, 표정은 사람마다 읽는 방식이 제각각이며, 침묵은 더더욱 여러 방향으로 해석된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라는 말은, ‘내 말에는 오해할 여지가 많아’ 라는 의미이다.
서윤이 해인에게 보인 것들(아무렇지 않은 얼굴, 깊숙이 앉는 자세, 접힌 소매)은 서윤에게는 그냥 자기자신이었다. 그러나 해인에게는 수집해야 할 데이터였고, 닿고 싶은 어떤 세계였다.
둘은 몇 년을 함께했지만, 결국 같은 것을 보지 않았다. 서윤은 모방을 우정으로 읽었고, 해인은 우정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라고 묻는 것은 이미 잘못된 질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관계를 살고 있었다.
이해라고 생각했지만 오해였다.
소일장의 제시 문장이지만, 이것은 인간 관계의 본질적 조건에 대한 선언이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윤은 해인을 안다고 믿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소매를 언제 접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해인은 서윤을 수첩 가득 기록했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마지막 페이지에서야 겨우 닿았다. 우리는 서로에게도, 자신에게도, 언제나 조금씩 불투명하다.
이 지점에서 해인의 비극이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는 모두 타인을 보며 자신을 만든다. 부모님을 따라하고, 친구를 따라하고, 선생님을 따라한다. 비의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것은 인간이라는 집단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다 지우면 진정한 ‘나’가 남을까? 불교에서는 그딴거 없다고 말한다. 그냥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고, ‘진정한 나’ 같은 건 없다고. 그런 의미에서 해인이 한 일은 인간이 본래 하는 일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인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했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류하고, 조금씩 덧입었다. 자신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
그 차이가 왜 이렇게 생경하게 느껴지는가. 어쩌면 우리가 모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것이 무의식의 영역에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적인 언어로 기록된 순간, 그것은 친밀함이 아니라 관찰이 되고, 교류가 아니라 채집이 된다. 그리고 그 채집의 대상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서윤(과 독자)이 느끼는 것—생경함과 미묘한 배신감, 그리고 동시에 밀려드는 안타까움—은 그래서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소통은 언제나 불통’임을 뒤늦게 대면하는 사람의 느낌이다.
마지막은 아직 안 맞는다. 너무 태연해서 어렵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세상을 지나가는 모양.
해인을 단죄하기도 어렵다. 수첩의 마지막 문장에는 어떤 슬픔이 배어 있다. 해인은 끝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다. 덕지덕지 기워진 태도들 사이에서, 정작 ‘해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언니가 말한다. “걔는 아무도 안 믿은 게 아니라… 자기 자리를 끝내 못 찾은 것 같았어.”
그것이 해인의 비극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해인이 죽은 이유이기도 하다.
서윤은 해인의 향수를 손목에 뿌린다. 그리고 거울에서 자신의 소매가 한 번만 접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언제 접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첩에 적혀 있던 바로 그 디테일이 서윤의 몸 위에서 재현된다. 이 순간 소설은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인가, 아니면 당신이 아는 누군가인가.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정말 선이 있기는 한가.
누군가를 잘 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오해 안에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