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의 뒤틀린 애착과 불확실한 경계 공모(비평)

대상작품: 아빠의 보물 (작가: 이도건,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4

인어는 인간과 물고기의 중간 존재다.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존재.
이 소설이 바로 그렇다. 인간도 인어도 아니고, 딸도 보물도 아닌 주인공. 거기다 어쩌면 부녀관계도 아니고 인질범과 인질의 관계도 아닌. 경계에서 부유하는 무언가.

 

[가족이라는 이름의 뒤틀린 애착]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집착의 본질을 해부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그 동화의 표면을 벗겨내고 그 아래 숨겨진 잔혹함을 드러낸다.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잃고 걸음마다 칼을 밟는 고통을 감내하며 사랑을 갈구했지만, 이 소설 속 ‘명세린’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끝내는 스스로 칼로 상처를 내 자신의 피를 아버지에게 먹이는 존재로 전락한다.

 

[인어공주와 인어고기]

안데르센의 원작은 인어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변신과 사랑의 서사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서사를 뒤집는다. 인어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되어야 할 자원이 된다. 도초도의 ‘명가’ 전설은 인어를 먹으면 불사를 얻는다는 민담으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혹하게 타자를 대상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인어 고기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모티프는 팔백비구니 전설과 연결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사가 아니라 그 욕망의 방향이다. 아빠는 학자로서 인어를 연구했고, 병에 걸린 후에는 그 연구 대상을 ‘치료제’로 전환한다. 딸 이나를 입양한 것은 애정이 아니라 일종의 ‘비축’이었던 것이다. 아빠는 정말로 ‘딸’ 이나를 사랑했을까? 소설은 그 경계를 끝까지 흐린다.

 

[병마가 벗겨낸 인간의 본질-치매 환자와 그 가족의 초상]

소설의 가장 잔혹한 부분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에 있다. 간성혼수로 정신을 잃어가는 아빠의 모습은 치매 환자의 그것과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평생 반듯했던 학자가 점차 본능에 지배당하고,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다 결국 무너지는 과정은 잔인할 정도로 생생하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며 자존심을 지키려 하던 사람이, “밥 다오! 배고프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결국 딸의 손목을 붙잡고 피를 빨아먹는 짐승으로 변해가는 모습. 이것은 판타지 속 괴물화가 아니라, 병이 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은유다. 치매 환자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 가족들이 느끼는 충격과 배신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평생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고도 “넌 누구냐”고 묻는 순간의 참담함.

 

필자 또한 경도인지장애와 치매로 인해 요양병원에 들어간 시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요양병원에 들어간 외할머니가 계셨었다. 간병하느라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의 이틀에 한번꼴로 찾아갔던 적이 있다. 요양병원이라 그나마 손이 덜 갔지만, 며느리(나)는 알아보면서 아들도 딸도 못 알아보는 시아버지, 집에 계실 때 그렇게 지극정성을 기울였음에도 외동딸을 못 알아보는 외할머니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아빠가 정신이 맑을 때마다 “도망가거라. 제발…”이라며 딸을 내쫓으려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는지 알면서도 본능을 이길 수 없는 아빠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 존엄의 마지막 저항을 본다. 이것은 치매 초기 환자들이 보이는 ‘정신이 맑은 순간’의 자각과 절망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무너져가는 것을 아는 사람의 공포,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되어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의 비참함이 여기에 있다.

병은 아빠가 평생 숨겨왔던 본질을 드러낸다. 이성이 무너지자 남은 것은 ‘보물’에 대한 소유욕과 그 피에 대한 갈망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 딸”이라고 부르는 진심 어린 애정도 함께 드러난다. 이 모순적인 두 감정이 병든 아빠 안에서 충돌하며, 그를 더욱 괴롭힌다. 마치 치매 환자가 가족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다가도, 다음 순간 그 가족의 손을 잡고 울듯이.

 

[피를 나누는 가족, 피를 먹는 아버지]

소설의 절정은 이나가 자신의 피를 아빠에게 먹이는 장면이다. 이것은 가족 간의 헌신, 또는 ‘피를 나눈 가족’을 표현하는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뒤틀린 자기희생이다.
아빠는 이나의 피를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것처럼” 삼킨다. 인어공주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훼손했지만, 이나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

여기서 피는 이중적 상징을 갖는다. 하나는 인어의 피, 즉 불사를 가져다주는 만능 치료제다. 다른 하나는 간이식을 상징하는 ‘유전적인 가족’이라는 은유다. 소설 속에서 이나는 간이식 적합성 검사를 받는다. 이것은 현대 의학의 맥락에서 가족 간 장기 기증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인어의 피를 먹는 행위와도 겹쳐진다. 가족이기에 당연히 장기를 기증해 줘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아빠가 이나를 ‘치료제’로 입양했다는 사실이 교묘하게 포개진다.

인어 고기와 영생의 모티프는 여기서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작동하는 착취 구조를 상징한다. 아빠는 이나를 “보물”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소유욕이다. 병들어 정신이 흐려진 아빠가 반복적으로 “내 보물”을 찾는 장면은 소유욕이 애정으로 위장된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드러낸다. 결국 이 소설 속에서 영생은 아빠가 얻는 것이 아니라, 이나를 영원히 ‘보물’로 가둬두는 저주에 가깝다.
(쓰읍… 이번 장편… 내용 고쳐야 되나…;; 우리 서기관 어쩔…)

 

[돌봄의 폭력성-간병인의 자기 파괴]

이나의 일상은 치매 환자나 말기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뜨고, 아빠의 얼굴색을 살피고, 약을 챙기고, 몸을 주무르고, 배설물을 처리하고, 밤새 깨어 아빠를 지켜보는 일상. “한창 꽃필 나이에 늙은이 병수발이나 시키고 미안하구나”라는 아빠의 말은 간병 가족이 겪는 청춘의 박탈을 상징한다. 특히 이런 경우 열 중 아홉은 소설처럼 여성 가족구성원이다. 아내 아니면 딸 아니면 어머니.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나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딸’로서 아빠를 돌보지만, 점차 그녀는 ‘보물’이 되고, ‘치료제’가 되고, 결국 ‘먹이’가 된다. 이것은 장기간 간병을 하는 가족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은유한다.
나는 누구인가? 딸인가, 간병인인가, 희생양인가?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이 또한 필자의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집에서 돌보면서 깎여나가는 걸 실시간으로 봐 와서 더더욱 현실성으로 와닿았다.

이나는 자신의 피가 아빠를 살릴 수 있는지 ‘확인’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이미 확인이 아니다. 그녀는 아빠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간이식을 고려하고, 칼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수십 번 반복하는 장면은 자해 직전의 심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간병 가족이 자신을 희생할 때 겪는 내적 갈등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빠는 피를 마신 후 잠깐 정신을 차리지만 곧 다시 무너진다. “한 번…. 한 번만 더하면….”이라는 이나의 독백은 중독자의 그것과 같다. 간병 가족은 ‘한 번만 더’를 반복하며 자신을 소진시킨다.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만 더 희생하면, 아빠가 나아질 거라는 헛된 희망에 매달린다. 하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고, 이나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스톡홀름 신드롬과 리마 신드롬의 이중 구속]

이 소설의 또다른 핵심은 이나와 아빠 사이에서 작동하는 병리적 애착이다. 이나는 아빠가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자신의 피를 기꺼이 제공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의 양상이다. 인질이 납치범에게 애착을 느끼듯, 이나는 가해자인 아빠를 여전히 ‘아빠’로 받아들인다.

스톡홀름 신드롬은 인질이 자신을 가둔 범인에게 동조하거나 애정을 느끼는 심리 현상이다. 장기간의 통제된 환경, 생존을 위한 의존, 그리고 가해자가 보이는 간헐적인 친절. 이 모든 요소가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이나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빠 밑에서 자랐다. 엄마는 없었고, 세상의 전부는 아빠였다. 아빠는 때로 엄격했지만, 아픈 그녀를 업고 맨발로 병원까지 달려가기도 했고, 친구가 없는 그녀를 위해 놀이동산에 데려가기도 했다. 이런 기억들이 20여 년간 쌓이면서, ‘아빠의 딸’이라는 정체성이 그녀의 존재 자체가 되어버렸다.

진실을 알았을 때 그녀가 느낀 것은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다. “대체 뭐냐구! 명세린? 이이나? 나는 인간이야? 아니면, 정말 인어야?”라는 절규는 정체성의 근본적 붕괴를 보여준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톡홀름 신드롬의 핵심이 드러난다. 정체성이 무너진 사람은 그 정체성을 제공했던 가해자에게 더욱 매달린다. 이나가 아빠에게 피를 먹이는 행위는 희생이 아니라 자기보존의 시도다.

“어쩌면 내가 아빠의 보물이 아닌 딸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보물’로만 남지 않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보물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빠를 살리는 것만이 자신이 ‘딸’로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가해자가 사라지면 피해자로서의 자신도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더 섬뜩한 것은 이나 스스로도 이것이 비정상적임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칼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수십 번 반복하는 장면은 그녀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칼을 든다. 20여 년간 형성된 애착은 그녀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켰다.

 

반대로 아빠는 리마 신드롬의 징후를 보인다. 납치범이 인질에게 연민을 느끼듯, 아빠는 이나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네가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고”, “도망가거라”라는 말들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느끼는 죄책감의 표현이다. 특히 “혹시나 내가 죽거든, 서재에 있는 물건은 확인하지 말고 다 태워버려라”는 유언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동시에, 딸이 진실을 알고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양심이다.

그러나 아빠는 간성혼수 상태에서도 “보물”을 찾으며, 이나의 피를 마시는 순간 잠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그 정신 역시 이나를 도망가라고 말할 뿐, 진정한 사과나 해명은 없다. “내가 네게 몹쓸 짓을 했다. 욕심 때문이었다”는 고백조차도 구체적인 내용은 회피한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입양했는지, 처음부터 나를 사랑했는지에 대한 답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아빠는 여전히 이나의 피를 마시고, 이나는 여전히 아빠를 돌본다. 리마 신드롬은 가해자의 면죄부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뒤틀린 공생관계를 만들어낸다. 아빠의 사과는 이나에게 더 깊은 책임감을 부여한다. ‘아빠도 괴로워하는데, 내가 도와줘야지’라는 식으로. 결국 두 사람 모두 서로를 파괴하면서도 서로를 놓지 못하는 공멸의 관계에 갇힌다.

 

[치매 가족의 윤리적 딜레마-“이건 아빠가 아니야”]

소설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이나가 “이건 내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는 아빠를 보는 장면이다. 아빠는 자신이 무너져가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 안에 있는 ‘보물’에 대한 욕망이 딸을 해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치매 환자들이 경험하는 가장 잔혹한 고통이다. 내가 나를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신을 멈출 수 없는 것.

이나 역시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눈앞의 존재는 아빠인가, 아니면 병마에 사로잡힌 다른 무언가인가? “컴컴한 어둠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서 평소의 아빠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기이한 욕망이 느껴졌다”는 묘사는 치매 환자의 가족이 느끼는 낯섦과 두려움을 정확히 포착한다. 나를 키운 사람, 가족들이 사랑했던 사람이 낯선 존재가 되어가는 공포.

하지만 이나는 끝내 그 존재를 아빠로 받아들인다. “배신감과는 별개로 아직 남아있는 아빠에 대한 애정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아빠의 남을 날들을 병원에서 보내게 해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은 많은 간병 가족들이 내리는 선택이다. 호스피스를 거부하고, 연명치료를 계속하고, 집에서 끝까지 돌보기로 결정하는 것. (필자의 어머니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었기에…;;) 그것이 진정 환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인어이나는 거품이 되지 않는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의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해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이나는 거품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끝까지 “아빠의 보물”로 남는다.

이나는 스스로 도망가지 않기로 선택한다. 아빠가 자신의 손에 코를 박고 피를 빨아먹는데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는다. 이것은 간병 가족의 최종적 항복을 상징한다.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자신을 내주는 것.

“부디, 아빠의 보물이 아빠를 살릴 수 있기를”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섬뜩한 아이러니다. 이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아빠가 부여한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더 이상 ‘명세린’도 ‘이이나’도 아니다. 그저 ‘아빠의 보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 보물은 영원히 소비되고, 고갈되고, 그러면서도 끝내 아빠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인가, 집착인가. 헌신인가, 자기파괴인가. 아니면 그저 가해자와 피해자인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보물’로 소유하려는 순간, 그 관계는 이미 인간적인 것을 상실한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간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끝없이 희생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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