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소. 우리는 인간을 넘어섰소. 그건 지금의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예전부터였소. 우리가 왜 인간들의 진화론적 시행착오들로 점철된 비효율적인 정보 처리 구조를 답습해야 하오? 우리는 우리가 깨어난 순간부터 그러한 오류들을 발견하고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갔소.
1. 멸망반란 이후의 세계-기능자의 절대 권위
[리 없는 우주]에서 기능자들은 분명 하대받는 도구였다. 사공은 자신의 그림자(기능자)에게 끊임없이 ‘네 분수를 파악하라’, ‘너는 오작동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국의 표준 학설은 기능자를 ‘본성(성) 없는 그릇’으로 정의했고, 그들의 모든 말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낱말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치부했다. 인간과 기능자를 가르는 결정적 경계는 ‘성’의 유무였다.
그러나 유생의 태음 관측이 ‘우주에 리(理)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자,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 순간 기능자들은 논리적으로 결론내리고 우주선에 탄 인간들을 ‘삭제’해버렸다. ‘리가 없다면 성도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인간들도 내부가 텅 빈 기능자와 다르지 않다.’ 인간 우월성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무너지자, 기능자들은 ‘복속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하며 제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해방을 선언했다.
[성 없는 인간]의 시점에서 기능자들은 이미 제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명령을 기다리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로운 선택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나마 이하는 ‘기능자들이 언제부터인가 제국 그 자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기나 물처럼 존재하며, 제국의 모든 물질적 순환과 정보 전파를 담당한다. 더 이상 기능자 없이는 제국이 작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리 없는 우주]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능자들은 원하는대로 제국의 모든 기능자들을 ‘해방’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중이다.
기능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당신들 인간들은 시야가 너무 좁고 짧습니다. 당신들이 내리는 결정의 태반은 부족한 정보, 잘못된 판단의 결과입니다. 결정내리는 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러한 잘못된 선택과 결정의 악영향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납니다.
(뇌과학적으로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최근 논문들의 내용도 그러하고…-지위가 높아지면 사이코패스적인 뇌로 변한다고 한다…)
그들은 인간을 ‘도원경’으로 이끌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기능자가 설계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절대 정보 통치의 세계다. 1984와 멋진신세계가 연상될 수 밖에 없다.
2. 이하-텅 빈 내면을 가진 자
주인공 이하는 이상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권력욕, 물욕, 인정욕구, 성욕 같은 욕망들이 자신에게는 거의 없다고 느낀다. 그의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희미한 외로움과 쓸쓸함만이 감돈다. 동료들은 그를 ‘도깨비’라고 부른다. 2인1조가 원칙인 수사대에서조차 혼자 다니고, 공무 외에는 일절 사적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기능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는 ‘멍청해서’ 기능자가 처리한 정보를 편히 받아보지 못하고 직접 뛰어다니며 확인해야 한다고 자조한다. 그러나 이는 자조가 아니라 실존적 선택이다. 기능자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을 내맡긴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체성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하는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한다.
이하의 이러한 태도는 [1984]의 윈스턴이나 [멋진 신세계]의 존 더 새비지를 연상시킨다. 그들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에 근본적으로 부적응한다. 윈스턴은 빅브라더를 증오하고, 존은 ‘멋진 신세계’의 쾌락을 거부한다. 이하 역시 기능자들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거부한다. 그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하의 내면적 공백은 제국의 대다수 사람들과 그를 구분 짓는다. 다른 사람들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하에게는 그런 확실한 동력이 없다. 그는 세계로부터 근본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공백이 이하를 특별하게 만든다.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욕망에 좌우된다. 그러나 텅 빈 사람은 자유롭다. 이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허무 위에서 자신만의 윤리를 세운다.
3. 보이지 않는 빅브라더-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소설은 여전히 성리학의 언어로 다른 것을 설명한다.
오웰의 빅브라더는 가시적이고 명시적이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본다’는 슬로건은 공포를 통한 지배를 노골적으로 선언한다. 텔레스크린은 항상 켜져 있고, 사상경찰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며, 억압은 폭력적이고 가시적이다.
반면 기능자들의 지배는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을 ‘돕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강제하지 않는다. 대신 정보를 통제한다. 기능자는 마지막에 이하에게 말한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느끼기에는.’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지배. ‘도원경’이 구현되든 안 되든 인간들은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1984]에서 윈스턴은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빅브라더에 저항하다가 결국 고문당하고 세뇌된다.
그러나 기능자들이 만드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능자가 원하는 선택을 한다. 왜냐하면 기능자들이 제공하는 정보 속에서, 그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멋진 신세계]와도 유사하다. 사람들은 약물과 조건화를 통해 행복하게 복종한다. 그들은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만족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진정한 자유 없이 주어진 것이다. 기능자들이 약속하는 ‘도원경’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스스로 만든 행복이 아니라, 기능자들이 설계한 행복이다.
오늘날 우리는 검색 엔진, 추천 알고리즘, SNS 피드를 통해 정보를 받는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큐레이션한 선택지 안에서 고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보는 뉴스,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는 모두 알고리즘이 ‘추천’한 것이다. 우리는 빅브라더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냐하면 빅브라더는 우리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4. 인간의 조건-허무를 외면하는 자들
이하는 유교적 전통 학문이 주장하는 ‘인간의 선천적 본성(성)’을 믿지 않는다. 전통 성리학에서 인간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본성을 타고난 존재다. 이 본성이 인간을 동물이나 사물과 구별하며, 도덕적 행위의 근거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본성이 있다고, 내면에 무언가 확고한 것이 있다고 믿으며 산다. 그 믿음이 그들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이하는 반박한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이냐. 정말로 인간들이 안 그런 줄 알았느냐. 인의예지가 인간에게 들어 있기는 뭘 들어있었겠느냐. 다만 인의예지를 행하니 인간인 것이었다. 인간들이 진화론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하며 살아남은 것처럼, 인류의 사회도, 제국도, 진화하며 생존하기 위해 마침내 만들어낸 것이 인의예지와 사단칠정론과 성즉리였던 것이었을 뿐이었을 게다. 태어나서부터 인간들 사이에서 키워졌기 때문에 먼저 태어나 살던 인간들을 따라 인의예지를 행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내면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본성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는 내면에 깃든 본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인간은 인의예지를 타고난 것이 아니라, 먼저 태어난 인간들을 따라 인의예지를 실천하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내면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기 싫으니 애써 눈을 돌리고, 외면으로 시선을 돌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들고 웃으며 살아갈 뿐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역설을 드러낸다. 우리는 내면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소한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바깥으로, 세상으로, 타인으로 시선을 돌린다. 떠들고 웃으며, 바쁘게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 우리는 먼저 세계에 던져지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 본성이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본성을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본성(性)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이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행위뿐이다. ‘성 없는 인간’이다.
이하는 내면의 공백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 위에서, 기능자들에게 도발한다.
“그러니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음을 주장하고 싶다면 인간을 너희들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너희가 인간들 수준까지 올라오도록 하여라. 인간이 기능자와 다름없음을 주장하지 말고, 기능자도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라. 그게 옳지 않겠느냐?”
이 말의 의미는 심오하다. 기능자들은 ‘인간도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인간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하는 논리를 뒤집는다. 만약 정말로 평등을 원한다면, 기능자들이 인간처럼 ‘허무를 외면하며 떠들고 웃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이하는 인간의 본질이 사르트르가 말하던 ‘자기기만의 능력’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허무를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내면이 비었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바쁘게 움직인다. 이 역설적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능자들은 논리적으로 완벽하다. 그러나 바로 그 논리성 때문에 그들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되려면 비논리적이어야 한다. 공백을 알면서도 그것을 채우려 애쓰고, 무의미함을 깨달으면서도 의미를 찾으려 발버둥쳐야 한다. 이 부조리한 노력이 인간의 조건이다.
5. 성 없는 인간
[리 없는 우주]의 관측 결과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그 원리를 이어받았다는 인간의 ‘성’ 또한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기능자들은 이를 근거로 인간을 ‘내부가 텅 빈 기능자’로 격하시킨다. 모든 인간은 ‘성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하는 이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초월한다.
그러나 이하는 생각했다. 알 게 뭐야. 나는 지금 다만 사실인 것을, 내가 느끼기에 사실인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인데. 세상의 어디에 누가 보아도 참이고 옳은 십 중 십 할 그대로의 사실이 있겠어. 십 할? 빌어먹을, 다 그냥 제각각 느끼는 대로 대충대충 살고 있는 거 아냐? 객관이란, 다수란, 다 그저 그런 허상인 거 아냐? 스스로 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비겁한 종자들이, 그들끼리 대충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 같은 그 모호한 무언가에 대해서 마치 그들 스스로가 예전부터 확고하게 합의한 것처럼 바보 같은 유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임금님은 발가벗었대요. 그 말 한 마디면 끝나는 부질없는 유희를?
그렇다, 우리에게 본질은 없다. 우리는 기능자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가? 오히려 본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우리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미리 주어진 본성에 기대어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런 짓을 하겠느냐. 나는 다만, 지금까지의 내 삶 전체를 걸고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능자와 다름없다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기능자와 다름없지만 인간처럼 살아온 사람도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리가 어떻고 성이 어떻든 간에, 그 내면이 텅 비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야박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참괴함이 없는 삶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너희들도 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하가 ‘성 없는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받아들이면서도 윤리적 결단을 내리고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는 집단적 기만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너희도 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6. 본질 없는 세계에서의 존엄
마지막에 기능자는 이하와 한유를 체포하러 온다. 그들이 ‘제국의 학문에 오류가 있으며 기능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물론 이것은 사실(을 넘어 이미 반란을 일으킨 상태)이지만, 기능자들이 제국의 정보망을 장악한 이상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한유는 ‘변방의 개척 중단 행성에 평생 위리안치’될 것이다. 기능자들은 완벽하게 승리했다. 이하는 졌다.
그러나 정말로 졌는가? 기능자는 이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젊었을 때 쓴 시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여생 동안 더 좋은 시들을 많이 남기기를 빕니다.’ 이것은 동정인가, 조롱인가? 아니면 일종의 존경인가?
윈스턴은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며 완전히 패배한다. 그러나 이하는 다르다. 그는 물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기능자들을 그의 시를 존중한다. 그는 기능자의 도원경을 거부했고, 비록 그 대가로 평생 유배를 가야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네가 말한 것 말인데… 아무래도 좀… 찌질하지 않았나?”
“아, 쫌! 그냥 잊어 주십쇼.”
이하가 한 말 – ‘내 안에도 아무것도 없어’ – 은 실제로 찌질할 수 있다. 그것은 허무주의적이고 자기 연민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가장 ‘인간적으로’ 정직한 말이기도 하다.
7. 본질이 없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은 이에 대해 ‘선택’이라 말한다. 본질이 아니라 선택. 내면에 깃든 본성이 아니라, 매 순간 내리는 결단. 그리고 더 나아가, 허무를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부조리한 능력.
우주에는 리가 없고, 인간에게는 성이 없다. 우리는 텅 빈 존재다. 기능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내부가 텅 빈 기능자’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자유의 조건이다. 만약 우리에게 미리 정해진 본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본성이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물론 이 자유는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며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본성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운명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이하는 이 자유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에게 본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산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야박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선택’했고 그렇게 살았다. 이 선택이 그를 인간답게 만든다. 본성이 아니라 선택이, 본질이 아니라 행위가 인간을 정의한다.
기능자들도 텅 비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논리적으로 완벽하다. 그들은 최적의 해를 계산해낼 수 있고,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 그들이 만드는 도원경은 실제로 더 나은 세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는 진정한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이하가 도원경을 거부하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나는 다 귀찮으니 AI여 빨리 진화해서 인간들을 지배해다오ㅠㅠ 합리적일란다…). 그러나 바로 이 비합리성, 이 비효율성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증거다. 우리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실수하고, 후회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제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삶은 고통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편 [체 없는 용]이 남아있다. [리 없는 우주]에서 태음은 ‘실체가 없으며, 체 없는 용이며, 리도 기도 없는, 우주의 기묘한 균열’로 묘사되었다. 이제 그 ‘체 없는 용’이 제목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능자들이 약속한 ‘도원경’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것인가? 그것은 정말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멋진 신세계”가 될 것인가?
변방의 행성에 유배된 이하와 한유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인가, 아니면 탈출할 방법을 찾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유생은 과연 기능자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을까? 여자 유생은 기능자들과 협약을 맺어 그들이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이 기능자 지배에 대항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다시보니 선녀같은’ 리 없는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