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없는 인간

  • 장르: SF
  • 평점×15 | 분량: 19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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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없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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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거하는 행성은 제국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공전하지 않았다. 작은 인공 태양이 멀리서 행성 주위를 자전해서 낮과 밤을 만들었고 초광속 행정 전산망 정보처리 중심인 인공 달들이 보다 가까운 궤도를 돌며 밤을 외롭지 않게 했다. 황제가 거하는 행성은 위 없는 도읍이라는 의미에서 상도라 불리었으며, 행성 자체가 수도이자 궁궐이었다. 황제는 세계의 중심이며, 세계는 황제를 중심으로 회전해야 했기에 황제의 궁궐은 북극에 있었으나 인공 태양의 공전 궤도를 정밀하게 조정하여 언제나 상쾌하고 온화한 봄 날씨가 계속되었다. 우주의 중심이자 영원한 봄의 도읍 상도의 구성은 금군의 엄격한 정보 통제 때문에 세부가 노출되지는 않았으나, 하늘의 질서와 원리가 인간의 대지에 반영되는 제국의 철학의 특성에 따르면, 원형으로 지어진 장엄한 태극 정전이 북극에서도 중심에 자리를 잡고, 그 주위를 우아한 곡선의 음양중 삼대전이 두르고, 그 바깥으로는 정교한 729개의 중소전들이 인류가 태초에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북극성을 중심으로 나머지 별자리들이 그러했듯이, 지상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자리 잡고 있을 것임은 분명했다.

황제가 거하는 행성은 그 자체로 궁궐이자 동시에 수도였기 때문에, 제국의 가장 최고위급 문벌귀족 가문들은 구중궁궐 바깥에 할당된 영지와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궁궐이 모두 엄선해서 가려 뽑은 실제 인간 내관과 나인들이 그 내부에서 모두 봉직하고 있듯이, 귀족가들 역시 그에 대응하는 시종과 시녀들을 그 대저택 내부에서 기거하며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궁궐과 저택들 모두 하나의 온전한 폐쇄계로서 자급자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그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영지들 가장자리에는 기하학을 벗어난 어지럽고 복잡한 뾰족뾰족하고 꼬여있는 누항가-골목길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그것은 음과 양의 원리에 따라 황성에서도 그리고 최고위 귀족가들에서도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던 바였으며, 그에 따라 세간의 온갖 혼란들 또한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라 붙었는데, 그에 따라 오로지 상도를 관할하는 별도의 행정성이 꾸려져야만 했으며, 그에 따라 다시, 상도를, 성스러운 제국의 수도를 이 잡듯이 헤집고 다니는 치안국 또한 운용되었는데, 우리의 불운한 주인공 이하는 거기에 빌붙어 먹고 살아가는 가련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망할 짭새 새끼들 중에 하나였다.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나였을 뿐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하나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래서 당연히 망하고 만다.

1
“이런, 이론 성리학자가 하나 또 죽었네. 이것 또 자네가 맡아야 하겠는걸? 요새 왜 이렇게 많이들 죽지? 무슨 유행인가?” 부장은 아무런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충 짭새 이하에게 사건을 하나 더 떠넘겼다. 짭새 이하의 공식 직위는 수사1부 선임수사관이었다. “지금 ‘이것 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도’라고 하신 겁니까?” 선임수사관은 일단 대충 닥치는 대로 잡히는 점부터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게 또 하루 이틀이 아닌 부장은 흐물거리는 미소로 느물거리면서 일단 받아 넘겼다. “뭐 큰 차이가 있겠나? 대충 알아듣게나. ‘이것또’든 ‘이것 도’든 하여간에 이거 또한 앞서 사건들에 합쳐서 자네가 대충 전담하고 보고서나 대충 만들어서 올려봐.” “그렇게 대충 대충해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절대 괜찮을 리가 있나? 자네가 결단코 대충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지.”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계속 말씀드리는 거지만, ‘결단코’ 같은 건 구어체에서 절대 안 쓰이는 낱말입니다.” “알거든? 그리고 알면서 부러 그렇게 말한 거거든?” “부장님, 혹시 방금 ‘거거든’이라고 하려다가 ‘거거거든’이라고 하실 뻔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거든? 절대 안 그러거든?” “언젠가 그러실 수는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절대 안 그럴 거거거든? 그러니까 자네도 절대 대충하지 말고 그냥 대충대충 보고서 잘 써와. 알았지?” 이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네, 뭐… 알겠습니다.” 이하도 어물쩍 대답하고 대충 읍한 다음 대충대충 물러나왔다.

*

물러나온 이하 선임수사관은 대충대충 역참에서 마패를 찍고 기계말을 빌려 대충대충 사건 현장인 상도 3태학으로 향했다. 상도 태학들은 제국 수도에 있는 학교인 만큼 제국의 학문 연구의 최중심지였으며, 상도에 모인 최고위 문벌귀족가의 뛰어난 자제들이 서로 즐겁게 교우 관계를 맺는 화려한 사교의 장이자, 그들에게 봉사할, 이미 오랫동안 봉사 중인 문무관의 아들딸들이 근로장학금 등등을 받으며 간신히 악에 받쳐 학점을 따내는 삶의 현장 체험의 장이기도 했다. 선임수사관 이하는 태학 정문에서 태학의 위세를 상징하는 하마비 앞에서 기계말에서 내려 대충대충 느릿느릿 제3태학의 널찍한 교정을 익숙한 발걸음으로 가로질러 이론성리학 동으로 향했다. 상춘의 교정은 버드나무들이 묵직한 봄바람에 천천히 초록빛 가지를 흔들고, 벚꽃 이파리들이 마치 눈처럼 눈부시게 빛나며 흩뿌려지고 있었다. 교내 방송으로 교화를 위한 예악이 나른하게 울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비파 소리가 묘하게 매력적인 불협화음을 추가하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나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어디 잔디밭에 악부 전공 학생들이 둘러앉아 대낮부터 수업을 째고 술 한두 잔 걸치는 모양이었다. 선임수사관 이하는 그가 다녔던 모교를 공무로 다시 방문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졸업한 이후로 바뀐 풍경들을 대하는 것부터가 불편스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젊은 시절―아니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는 것 도한 곤혹스러웠다. 그러한 불편이나 곤혹스러움과 달리, 무관하게, 이론성리학 동은 곁에 이웃한 실험성리학 동의 정신이 나간 듯한 난잡한 건물군에 대항해 순결하고 고고한 단일한 십 층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하를 위한 사건 무대인 ‘현장’은 8층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

“팔 층” 승강기 문이 열리자 이하가 들어가서 말했다. 8층은 현재 사용이 불가합니다. 승강기의 기능자가 말했다. “치안국 수사 일부 선임수사관 이하다. 공무 수행 중이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8층으로 가겠습니다. 승강기가 위로 움직였다. 이하는 승강기가 8층에 도착하자 내려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하나 또 죽은’ 이론성리학자는 주기붕 박사였고 그의 연구실은 807호였다. 연구실은 창문을 제외하고는 온통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한쪽 벽의 절반 정도 너비의 커다란 백칠판이 책장 하나를 가리고 서 있었다. 백칠판은 흑묵으로 각종 수식이며 도표가 어지럽게 뒤덮여 있었고, 이하 수사관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주머니에서 다목적 휴대용 정보처리 기기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어쨌거나 이미 수사 정보망에는 초동 수사와 현장 감식을 한 자료들이 모두 올라와 있을 것이었겠지만. (이하는 가능한 한 모든 기능자들을, 정보 처리 인공 도구를 일절 배제하는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가끔씩 회의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줄곧 자신의 촉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왔고, 업무는 대개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그에 따라 주변과 위에서도 이하의 기벽은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실패하지 않을 때까지만이겠지. 이하는 생각했다. 매일이 하루하루 외줄타기였다. 건너거나 떨어지거나, 많은 사람들이 매번 이하가 떨어지기를 기대한다는, 기다린다는 사실을 이하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이하 자신도 무의식적으로는 그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너무 지쳤어. 이하는 항상 생각했다. 이젠 정말 다 그만 두고 쉬고 싶어. 그러나 부서에서는 난해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이하에게 배당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실패할지도 몰라. 줄에서 떨어질지도 몰라. 이하는 주 박사의 서가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이론성리학자답게 신-주역의 729괘 계산식에 대한 학술서들과 논집들이 많았고, 우주론에 대한 책들도 많았다. 도대체 뭘 연구한 거야? 그때, 이하는 문득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 어쩌면 이론성리학자들은 정말로 연쇄 살해당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그것은 그들이 연구한 주제가 금지된 것이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살해라기보다는 제거, 혹은 처형이란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금군… 그때였다. “아, 이거 벌써 오셨구만.” 쾌활한 목소리로 들어선 사람은 밤처럼 검은 철릭을 입은 젊은이였다. “뉘신지, 이 층은 현재 사용이 불가합니다만.” 그러나 젊은이는 눈을 반짝이며 가볍게 답했다. “금오위 특무요원 한유라고 하오. 이제부터 이 건은 본관의 관할이오.” 이하는 슬며시 모골이 송연해졌다. “역시나…” 한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 뭐가 역시나란 말이오? 본관이 올 줄 알았오?” 이하는 슬쩍 머리를 쓸어내리며 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저희는 손을 떼면 됩니까?” 한유는 바로 답하지 않고 이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유리처럼 투명했지만 시선은 날카로웠고, 이하는 살짝 주눅들었다. 사람을 잡아먹어본 적 있는 눈이군. 군대에서 실전 경험이 있던 군관들이 그런 눈이었다. 비로소 한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임수사관 이하. 그림자를 쓰지 않는 독특한 수사를 한다지?” 이하가 답했다. “아닙니다. 씁니다. 많이 안 쓸 뿐이지요.” 한유가 계속 물었다. “왜 그렇지? 그림자… 기능자들을 신뢰하지 않나?” 이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답했다. “아마 제가 멍청해서 그런 거겠죠.” 그러자 돌연 금오위 특무요원이 발을 쾅! 굴렀다. 마룻바닥이 부서지며 움푹 파였다. “네가 감히 황상 폐하의 직속 보안 관리자인 내 앞에서 능청을 떨려 하느냐!” 확성기라도 쓴 듯한 고함 소리에 이하는 움찔했다. 움찔했던 게 창피해서 이하도 부러 눈을 부릅뜨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멍청한 거 아니겠습니까. 멍청해서 기능자가 감지하고 정리해서 요약해준 정보를 편히 받아보지 못하고 직접 뛰어다니며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고요.” 언제 격분했느냐는 듯이 한유가 턱을 치켜들고 냉소했다. “하! 네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고? 이인일조가 원칙인 수사대에서도 자기는 쓰지도 않는 그림자를 조원으로 동반한다는 핑계로 어물쩍 혼자 다니고, 공무 외에는 일절 사적 관계를 맺지 않아 등 뒤에서 도깨비라고들 부르는 것도 이미 다 알면서?”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 이하는 어깨만 살짝 들썩했다. “금오위 전산망에는 그런 것도 다 들어 있습니까? 모르시는 게 없네요.” 한유는 잠깐 더 말없이 이하를 쳐다봤다. 그리고 차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맹랑한 놈이구나. 어디 한 번 수사를 계속 해봐라. 대신 일과 후 청담동 다향루에서 매일 대면 구두 보고를 해라. 내 너의 수사를 감독하겠다.” 이하는 뭐라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넵,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턱에서 힘을 빼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방금 호랑이 입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시렸다. 아니, 아직 나오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금오위 특무요원은 한 번 더 차게 웃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멀리서 승강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이하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부르르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새삼스레 부서진 마루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치안국 내에서도 특수부 부원이나 폭동 대처반 반원들은 근골 강화 시술로 일반인의 서너 배에 달하는 힘과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금오위의 기밀 기술이라면 몇 수는 훨씬 더 위일 것이었다. 그런 존재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반사속도를 강화하는 것은 신경계에 대한 처치에 의한 것일 것이었다. 동일한 원리에 따라 중추신경계의 정보 처리 속도나 용량 또한 강화하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기능자들과 융합되었을지도 모른다. 비공개로 기능자를 이용하는 사용자는 귀고리나 접안경을 통해 소리와 문자와 도표로 기능자의 출력값을 수신한다. 만일 머릿속에 기능자를 넣고 다닌다면? 인간과 기능자의 정보 처리 기제는 다르며,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은 제국 민법과 형법의 여러 조항에서 반복 인용되는 공리이다. 그에 기반해 기능자는 결코 민권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인간의 도구로만 인정된다. 그러나, 제국의 변방에 창궐하는,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종교와 학파들 중에서 특히 도교 계열 신흥종교 중에는 인간의 인격을 일종의 정보처리 구조물로 추출하여 기능자들의 전산망에 올리는 연구를 한다고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우화등선이라고 부른다고. 그렇다면 기능자를 머릿속에 박아 넣은 존재가 있다면 뭐라 불러야 될까? 무당? 귀신들린 자? 강령술사? 상념은 문 열리는 소리로 끊어졌다. “어이쿠?” 누군가 들여다보려다 이하를 보고 재빨리 되돌아 나갔지만 이하도 재빨리 튀어나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누구냐!” “사람 살려!” 파닥이는 것은 후줄그레한 학창의를 입은 늙은 안경잡이였다. 선임수사관은 짚이는 게 있어서 물었다. “박사님이십니까?” 목덜미를 놓아주자 비틀거리며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신경질적으로 낡은 학창의를 툭툭 털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럼 내가 이 나이에 무슨 학생이겠나?” 이하는 머릿속으로 한숨을 쉬며 오늘 통상 세 번째로 듣고, 말로는 두 번째로 반복하는 문장을 내뱉었다. “이 층은 현재 사용이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늙은 박사는 예상했던 대로 눈쌀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딴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연구는 도대체 언제 하나?”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그래도 이하는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올라오신 겁니까?” 박사가 대답했다. “승강기가 작동을 안 하니 당연히 계단으로 걸어 올라왔지. 평소에 등산을 자주 해뒀길 다행이지, 세상이 가련한 늙은이한테 도대체 무슨 짓이야…” ‘가련한’ 역시 또한 문어체라서 부장 같은 사람들이나 쓸 법하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이하는 최대한 사교성과 붙임성을 끌어 올려 말을 붙였다. “아이고, 세상에, 정말 힘드셨었겠군요. 저도 올라오느라 힘들었는데요, 어떻게… 연구실 가서 차나 한 잔 청해도 될런지요?” 박사는 흔쾌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답했다. “자네 같은 젊은이가 고작 그런 걸로 벌써부터 힘들면 어쩌나. 어쨌거나 팥차라도 괜찮다면 오시게.”

팥차는 지나치게 달았고, 텁텁했다. 이하는 아스라한 현기증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자기가 여기에 왜 왔는지 계속 의문하며 박사의 말에 맞장구치며 어떻게든 화제를 피해자로 돌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네, 정말 그러시군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저기 혹시 팔백칠 호 주 박사님도 그런 쪽 주제를 연구하셨었던 거였나요?” “그러니까 말이오, 응? 주 박사? 아니지. 주 박사는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좀 이상한 걸 하고 있지.” 이하는, 웬 현재시제? 주 박사가 죽은 걸 모르나? 했다가, 들었었어도 금방 또 까먹었었겠거니, 생각하면서 곧장 캐물었다. “뭘 하고 계신데요?” 박사가 픽 웃었다. “뭘 하긴 뭘 하나, 오늘 아침에 저세상 갔다더만.” 이하는 어쩔 수 없이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늙은이 진짜 제정신이야 아니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장단이든 맞춰 줘야지. “아니, 그러니까요, 뭘 하셨었었었는데요?” 이 대목에서 박사는 살짝, 화제가 자신으로부터 주 박사에게 옮겨간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눈치였으나, 그래도, “주 박사는 좀 이상하긴 했지,” 답을 했다. “우주론 전공자가 뜬금없이 명리학이랑 기능자 구조학에 발을 들였단 말야.” 이하는 방금 들은 말에 대해서 거기에 숨겨진-드러나지 않은 함의에 대해서 생각을 재빨리 해봤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됩니까?” 이하의 멍청한 질문에 대해 박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다고 그게 되나? 되겠나?” 그러나 그 질문은 이하의 마음에는, 기억에는 오래도록 남아 메아리치며 다양한 잡념들과 잡상들을 남기게 된다.

*

치안국 본청에 대충 대충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수사1부 부서원들은 여기가 병원인지 치안국인지 알 수 없는 표정과 형상으로, 마치 걸어다니는 시체들처럼 칸막이 책상들에 나뉘어 앉아 기능안경이나 접안경을 쓴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기능자들에게 중얼중얼거리며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하는 자기 칸막이에 들어가 앉은 다음 연초를 피울까 차를 한 잔 마실까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그의 혼백만큼이나 텅 빈 종이 한 장을 꺼내 두서없이 기억나는 대로 그동안의 사건 일지 및 수사 일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써보았다.

사건 일지.
1) 3월 10일, 상도1태학 붕광기 박사가 연구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사인은 원인불명의 질식사. 박사는 상도1태학에서 이론성리학을 전공했고, 중력과 거대 질량 문제의 권위자였음.
2) 3월 24일, 상도2태학 강정훙 박사가 자택에서 사망함. 사인은 원인불명의 심정지. 박사는 상도1태학에서 우주론과 인성론을 전공했고, 2태학에서 인물성동이론을 강의했음.
3) 3월 29일, 상도2태학 편상혼 박사가 강의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사인은 원인불명의 심정지. 박사는 상도2태학에서 오경을 전공했고, 태학에서는 심성론을 강의했음.
4) 4월 1일, 상도3태학 주기붕 박사가 강의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천장 대들보에 목을 매었으나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불분명. 박사는 우주론 전공자인데 최근 명리학과 기능자 구조학에 관심을 보였음.

수사 일지.
붕광기 박사 건에 대해서는 순라청에서 초동 수사를 개시했지만 살인보다는 과로사에 중점을 두었음. 강정훙 박사는 자연사로 추정되었으나, 편상혼 박사 건이 발생하며 중앙 수사 기능자가 연계 가능성을 8할에서 9할 사이로 계산하며 사건 전체가 치안국으로 올라옴. 이어 주기붕 박사 건이 접수되면서 연쇄 살인 사건으로 잠정 확정되어 수사부 배정 및 언론 통제가 개시됨.

이하는 연초를 피울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식은 차를 홀짝이며 죽은 네 박사의 신상명세철을 뒤적거렸다. 아무리 봐도 공통점이 없었다. 태학 박사들끼리 만든 비밀 결사라도 있었던 걸까? 금오위가 개입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이론성리학자들이다. 제국을 지탱하는 중심 이념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들이 무언가 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들 발견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중력과 거대 질량 문제와 인물성동이론과 심성론과 기능자 구조학은 도무지 꿰어지지 않는 구슬들이었다. 이하는 깨달았다. 연초가 아니라 차가 아니라 술을 마셔야 했다. 문서철을 내던지듯이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부장에게 가서, “술 사주세요.” 부장은 여전히 밝은 창밖을 잠깐 쳐다보더니, “그러지.”하고 귀고리를 푼 다음 일어섰다.

*

부장과 이하가 간 술집은 해가 질 기미도 안 보이는 이른 오후부터 술꾼들이 죽치고 앉아 술을 푸며 목청 높여 떠들고 있었다. 부장과 이하는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전부터 채소 반찬을 집어먹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태학은 갔다 왔나? 술꾼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부장이 조용히 물었다. 이하가 술잔을 비우며 답했다. 네. 근데 별거 없었습니다. 부장도 술잔을 비우며 대꾸했다. 그래. 그리고 이하는 교정에서 불온한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에 대해 투덜거렸고, 부장은 히죽 웃으며, 태학 다닐 때 나도 그랬는데, 그랬고, 이하는 문득 부장이 예악과 출신이라는 걸 생각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일탈을 해봐야 질서가 소중한 줄도 알지. 자네도 그렇지 않아? 이하는 태학 시절 지었던 불온한 시들을 생각하고 지금의 이하라면 당장 잡아넣었을 것을 생각하고 다만 어깨를 으쓱하고 부장의 빈 잔에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부장도 이하의 빈 잔에 한 손에 소매를 받쳐 술을 따라주었다. 이윽고 주문한 거위 구이가 나오자 둘은 술잔을 비우고 요리를 맛보았다. 그리고 서로 다시 술을 따랐다. 이하가 물었다. 그, 저, 뭐냐, 금새가 붙은 거 같은데요. 부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잔을 비우고 젓가락으로 요리를 헤집어 먹었다. 그리고, 붙은 거야, 채가는 거야?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하는 잠깐 생각해보고, 채간다고 했는데 그냥 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장은 무언가 알아듣기 힘든 쌍욕을 했다. 이하는 재빨리 잔을 채워줬고, 부장은 단숨에 비웠다. 이하도 잔을 비웠다. 부장은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늘상 있는 일 아닌가. 별도 보고서 쓰래지? 그냥 통상 보고서 똑같이 복사해서 갖다 줘. 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동안 요리를 먹고 술잔을 비우고 서로 따라주었다. 그리고, 그런데 말입니다, 이하가 다시 입을 떼었다. 금새가 지들이 저질러놓고, 저지른 짓을 어찌하려나 보려고 붙는 경우도 있습니까?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다들 취해서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누군가 너털웃음을 터뜨린 다음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부장은 눈을 굴렸다. 뭐, 그럴 수도, 그럴 때도, 있겠지? 있었겠지? 그럼 저는 이제 어쩌죠? 이하가 물었다. 부장은 어깨를 으쓱하고 술잔을 비웠다. 노란색에 빨간색 섞으면 뭐가 되지? 이하는 술잔을 따르며 대답했다. 주황색 아닙니까. 예악과에서 안 배웠나? 그런데 부장이 계속 물었다. 주홍색이야, 주황색이야? 이하는 자기 술잔을 비우며 천천히 생각해본 다음, 아마 주황색일 겁니다. 주홍색은 좀 더 빨간 쪽일 거고요. 부장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어쨌거나, 자네는 이제 그거야. 주황색. 황실의 노란 색에 금새의 빨간 색 섞은 거. 빌어먹을. 부장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이하도 잔을 비웠다. 자네도 알지? 우린 일단 빨개 보이는 건 자르고 보는 거. 이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장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부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이제 당분간은 술잔 나누기 힘들게 되어버렸군. 이하. 정말 안됐어. 자넨 꽤 괜찮은 술친구였는데. 유감이야. 이하는 자기 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한 잔 더 비웠다. 그 확정적인 과거 시제는 도대체 뭡니까. 하지만 이하도 느꼈다. 지금까지처럼 가볍게 틱틱거릴 수 있었던 무언가가 방금 전에 사라져 버렸다는 걸. 잘 해봐. 잘하면… 아니 어쩌면… …모르겠군. 부장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나, 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나갔고, 이하는 남은 술병을 멍하니 들여다 보다 충동적으로, 홀린 듯이 한 잔 더 따라 마셨다가 역시나 고개를 젓고 일어나 나갔다. 여전히 대낮처럼 밝은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술기운이 치솟았다. 술집 앞 입간판을, 이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역대급 술꾼들에게 시달린 전적이 있는 역전의 용사 입간판을 한 번 더 시원하게 내차서 길바닥에 나뒹굴게 한 다음, 순라꾼들이 출동하기 전에 능숙하게 꽁무니를 뺐다.

2
다음날, 숙취로 골머리를 앓는 표정으로 출근한 이하는 이미 출근해 있던, 마찬가지로 숙취로 곯은 표정인 부장에게 말없이 목례를 했고, 부장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이하는 예상하고 각오했지만, 그래도 그보다 훨씬 더한 외로움의 물결이 내면 깊숙이 밀려오는 것을 다소 떨떠름하게, 최대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부장이 이하에게 이러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하는 개인적인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하는 도깨비라고 불릴 정도로, 직장에서 개인적인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적인 관계도 거의 맺지 않고 지내왔지만, 그래도 그를 수사부로 뽑아 올린 부장과는, 언제든 술 한 잔 정도는 기울일 수 있고 말 한 마디라도 살갑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는데, 말하자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사이였는데, 이하는 마음 속 어딘가가 차갑게 식고 차갑게 식은 나머지 떨어져 나가고, 그 남겨진 자리가, 구멍이, 깊이가, 결코 짐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않을 것임을, 그리고 앞으로 이하가 다시 노란 색으로 돌아와도 결코 다시 채워지지 않을 것임을, 않을 수도 있을 것임을 체념하면서도 지켜보았다.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인간이란 실패한 군집 동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인간관계란 결국 언제나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는 어리석은 상호 자해 행위일 뿐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리석어서 스스로 자해를 못하니 인간관계 같은 걸 맺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건지도 몰랐다. 이하는 인간들이 버러지들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자신을 포함해서.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하는 배정된 사건들에 대해서 좀 더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붕광기 박사의 학생들을 만나 죽은 박사가 진행하던 연구 현황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망 전날 웬 낯선 유생의 방문을 받았고, 둘이 한참 무언가에 대해 토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혹시 사망 당일 계산하셨던 걸까요?” 이하가 연구실 한쪽의 칠판의 계산식을 가리키자 태학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무엇에 관한 계산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학생은 한동안 수식들을 눈으로 따라갔다. “…초거대질량의 내파… 자기 붕괴에 대한 것 같습니다만… 이상하군요.” 이하가 물었다. “뭐가요?” 학생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뭔가 구체적인 수치이니 실제 관측 자료일 것 같지만… 우주에 이런 별이 있을 리가?”

*

그리고 이하는 계속된 탐방 수사를 통해 피해자들이 대개―편상혼 박사는 그러한 증언이 확보되지 않았다―사망 전일 혹은 당일 오전에 정체불명의 유생의 방문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나이는 삼십대 초중반, 성별은 여성으로 보였다. 치안국 사무실로 돌아온 이하는 자리에 앉아 귀고리를 찬 다음 수사용 기능자를 불러냈다. “3월 9일 붕광기 박사 연구실에 출입한 사람들을 검색해서 약식 명단으로 나열해 봐.” 네 알겠습니다. 책상 위 화면에 사건 전일 연구실 출입자 명단이 시간 순으로 나열되었다. “동일 인물은 통합해서 정리해. 나열은 최초 입실 시간 순으로.”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명단이 짧아졌다. 태학순라꾼(신원확인됨) 청소부(신원확인됨). 박사 본인(신원확인됨), 조교(신원확인됨), 태학생1(신원확인됨), 태학생2(신원확인됨), 연구생1(신원확인됨), …태학생5(신원확인됨), 연구생3(신원확인됨), 태학순라꾼(신원확인됨). “뭐야, 여자 유생은 없나? 삼십대 초반?” 없습니다. “연구실이 있는 층 복도 보안영상 녹화 기록을 전수조사해 봐. 이전의 시간별 명단과 대조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두 일치합니다. “이것 봐, 분명히 오전에 여자 유생 하나가 왔다 갔다는 증언이 있어. 어떻게 된 거야?” 자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런 망할.” 나머지 피해자들의 연구실 출입 기록도 마찬가지였다. 이하는 귀고리를 풀어 책상 위에 내던지고 의자 깊숙이 몸을 늘어뜨렸다.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잔뜩 마지못해 하며 일어나 부장에게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장은 전산 보안부에 전화를 걸어 조사를 요청했다. 잠시 후 다시 내선 전화가 왔다. “네, 수사일부입니다. …응. 확실한 거 맞나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장은 이하를 유심히 쳐다봤다. “이상 없대. 하루 전체 녹화분이 실시간으로 모두 찍힌 것 확인했고 삭제나 조작 흔적도 없대.” 이하가 작게 코웃음쳤다. “그러니까 제가 기능자들을 믿지 않는 겁니다.” 부장은 팔짱을 끼고 앉아 이하에게 물었다. “이제 슬슬 금새가 원하는 대로 그냥 종결하는 게 어떤가?” 이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 금새가 원하는 게 맞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사 사건이 일어나면 어떡합니까?”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금새의 적이 항상 역적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금새가 적으로 돌렸다면 일단은 근처에 얼쩡대지 않는 게 좋지 않겠나.” 그러나 이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짧게 묵례하고 물러났다.

*

고급스런 찻집에서 한유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는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작게 맛있게 머금더니 꼴깍 삼키고 이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덮는 게 아니라 들추는 거다. 드러내는 거다. 나도 우리 측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답을 못하겠다. 확인 중이다. 하지만, 우리 쪽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안팎에서 이 사건들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답을 바라는 질문은 아닌 거 같아서 이하는 잠자코 찻잔을 들어 똑같이 작게 한 모금 머금어 보았다. 확실히 비싼 차인지 향기가 좋았다. 입안에서 코끝까지 맑은 향기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한유는 말을 돌렸다. “들어올 때 귀고리나 접안경이 있는지 검사받았지?” “네. 하지만 저는 원래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한유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고 다닐 수 있지? 하여간… 어쨌거나, 자네만 받은 건 아냐. 여긴 다 그래. 여긴 우리가 운영하는 곳이고, 설계와 시공 때부터 기능자가 절대 들여다볼 수 없도록 한 곳이야.” 이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하지만… 기능자는 결코 사람을 해칠 수 없습니다.” 한유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에 댔다. “가능성은 모두 열어둬야 해. 수사의 기본 원칙이 아닌가.” “하지만…” 하지만 이하는 말을 더 잇지는 못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들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한유는 그런 이하를 가만히 바라보며 찻잔을 다시 들었다. 작게 한 모금 머금고 음미한 뒤 꼴깍 삼키는 것을 몇 번 반복하는 동안 이하는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피해자의 최근 관심사가 이해될 수 있을 것도 같군요… 앞으로는 일일 정기 보고는 힘들 것 같습니다. 잠복 수사를 하려 합니다.” 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은 거면 좋겠군. 보고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여기 와서 차 한 잔 시켜놓고 있어라. 다 마시기 전까지는 오겠다.” 말을 마치자 찻잔을 마저 비우고 일어났다. “여긴 계산 안 해도 된다.” 혼자 남은 이하는 천천히 호젓하게 남은 차를 즐겼다. 찻집은 내부가 널찍했으나 곳곳에 구슬발을 쳐서 답답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서로서로 보이지 않게 교묘히 가리고 있었다. 기능자가 범인일 수 있다고? 세상에나. 이하가 기능자들을 믿지 않는 것은 단지 기능자들의 세계가 물리 우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결코 참된 실제 우주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그의 개인적인 개똥철학에서 비롯한 것이었으며, 필요할 때는 언제든 편의적으로 불신을 유예했으며, 그럼에도 지금까지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그래도 관성적으로, 똥고집으로 불신을 표방하고는 있었던 것이었지만… 제국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기능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제국 내에서 모든 물질들을 구석구석까지 순환시키는 것은 거의 순간 이동에 가까운 능력의 태극로부터 지속 가능한 가속 능력을 가진 오행로까지 다양한 추진 장치를 갖춘 갖가지 크기의 우주배들이라면, 제국 내에서 모든 정보들을 구석구석까지 전파하고 말단의 모든 정보들을 중앙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은 무한에 가까운 정보 처리 용량을 갖춘 기능자들의 연산 능력 덕분이었다. 기능자들이 인간들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재화와 용역을 충분히 제공했기 때문에, 제국의 신민들은 원한다면 제국의 영토 안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 어디서든지 정원을 가꾸고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고 물고기를 낚으며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제국의 변방에서 온갖 사이비 종교와 철학들이 번성하는 것도 남아도는 시간과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제국 신민들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잉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나친 충족과 과잉은 결국 공백과 여백과 구별되지 않는 걸까?) 기능자는 인간 이상의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에게 항시 복종했으며, 인간의 모든 명령과 요구를 충직하게 실행했다. 기능자들은 인류에게는 이제 물질 우주에 이어 제2의 환경이었으며, 공기나 물, 음식처럼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기본 조건이었다. 갑자기 이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기능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제국 그 자체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입 밖에 내었다가는 곧장 머리가 잘려 시장 네거리에 매달릴 생각이었지만, 이하는 그것이 진실의 일말임을 직감했다. 공기가, 물이, 제 나름의 논리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선택적으로 어떤 인간들을 그것들 자체로부터 배제한다면? 이하는 붕광기 박사의 질식사를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우리들의 신체 역시 기능자들로 대체되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강정훙 박사와 편상혼 박사의 원인 미상의 심정지가 떠올랐다. 제국의 영토 안의 모든 유인 행성들의 대기에는 기능자들의 물질적 기반인 분자 크기 이하의 연산자 분말이 도포되어 있었다. 제국의 신민들은 사실상 연산자들을 들이쉬고 내쉬며 살고 있었고… 이하는 소름끼치는 폐쇄감에 짓눌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와, 오직 이곳만이 기능자들로부터 안전하다는 이성적인 판단 사이에서 숨이 막혔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서 차갑고 끈적하게 배어나왔다. 찻집의 공기가 더 이상 향기롭지 않았다. 이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그것을 향한 갈망으로, 간신히 이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찻집 문이, 그러고 보니 공기를 거를 수 있는 이중문이었다, 다가왔다. 이하는 관 뚜껑을 밀어 여는 듯한 절박한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간신히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술집에 들어가 대포 한 잔을 숨 돌릴 틈 없이 단숨에 비우고 나자 견딜 수 없이 들끓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약간 풀린 시야가 오히려 더 풍경을 명징하게 직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이하는 천천히 다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어쩌면 금오위의 그 흉칙한 작자가 그의 관심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는 데 성공할 뻔 한 것일지도 몰랐다. 망할. 금오위가 끼면 항상 이렇게 된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나 자신마저도. 내가 보고 들은 것마저도. 내 생각마저도, 정말로 내 생각일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하는 금오위의 정보 공작에 대해서 생각했다. 금오위도 기능자들을 많이 쓰겠지. 훨씬 많이 쓰겠지. 문득 한유의 말없는 대답을 떠올랐다. 어쩌면 금오위의 기능자들은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인간을 해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이 연쇄 살인 사건의 실체일까? 금오위의 (일부?) 기능자들이 폭주해서 그것들을 예측하거나 통제할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있는 박사들을 선제적으로 제거하고 있고 한유는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일개 수사관인 이하를 끌어들인 것일까? 미친 기능자들의 미끼로 삼으려고? 이하는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기능자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이하는 기능자들 눈에는 굉장히 시선을 끄는, 붉은 깃대에 매단 푸른 깃발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망할)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다시 의혹의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보안용 기능자에 포착되지 않는 수수께끼의 유생―남자인지 여자인지 이십대인지 삼십대인지 사십대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용의자. 이하는 대포를 한 사발 더 주문하고 품에서 사건 일지를 정리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이번에는 한숨에 비우지 않고 조금씩 홀짝거리면서, 죽은 박사들의 전공과 최근 연구와 관심사들을 곱씹어 보았다. 분명 어떤 논리가, 하나의 선이 존재할 것만 같았다. 취기가 올라올수록 확신은 강해졌다. 이론성리학, 중력과 거대 질량 문제, (초거대 질량의 내파, 별의 자체 붕괴), 우주론과 인성론, 인물성동이론, (오경, 심성론?) 우주론, 명리학과 기능자 구조학… 중력과 초거대 질량의 내파, (인성론) 인물성동이론, (심성론) 명리학과 기능자 구조학… 초거대 질량의 내파, 인물성동이론, 기능자 구조학… 만일 인간과 기능자의 성이 동일하다면? 명리학으로 기능자의 연산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론성리학은 제국의 학문의 큰 축으로, 우주의 이치가 우주에 속한 인간들 개개인과, 그들이 속한 인간 사회에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공리로 삼고 있었다. 만일 우주의 이치가, 특정 조건 하에서는 일그러진다면? 이론성리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주의 궁극적인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수식으로 환원한다는 점이었다. 이하의 개똥철학으로는 그것은 기능자들의 그림자 세계처럼 실재로부터 괴리된, 또 하나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그림자 놀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식을 우주의 전부로 착각하는 협소한 관점에서, 계산할 수 없는 수식을 발견했다면? 이하는 주기붕 박사의 죽음이 어쩌면 정말로 스스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다음 차례가 누가 될지는(혹은 어떤 전공과 주제가 될지는)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건지도 몰라. 하지만 이하는 남은 사발을 단숨에 비우고 일어나 계산을 치렀다.

*

수사관들은 잠복과 잠입, 탐문을 위해(핑계 삼아) 밤낮 없이 술을 처마시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살짝 풀린 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이하를 고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는데, 이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하 자료실로 내려갔다. 모든 정보와 자료가 기능자 전산망으로 관리되고 있었지만, 이하는 결코 기능자에게 정보 추출을 명령해서 편하게 검색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하 자료실은 사문화된 규정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몇몇 꼰대들이 연례적으로 생산한 종이 문서들을 매립한 식물 섬유의 묘지였고, 유일하게 종이 출력기와 연결된 기계식 자판의 정보 단말기가 설비되어 있었다. 이하는 죽은 박사들의 연배를 계산해서 대략적인 연도를 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쳐서 직접 입력해서 태학 연감의 일부를 종이 출력했다.

두 시간 뒤에, 여전히 아니, 살짝 곰삭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종이 출력물을 한 상자 가득 짊어지고 올라온 이하를 보고 야근 중이던 수사관들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하는 자기 자리로 가서 서류 상자를 내려놓고 광학적인 초점 거리 조절 외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유리 안경을 꺼내 썼다.

다시 세 시간이 지난 뒤, 이하는 여섯 명의 박사들의 이름과 신상이 쓰인 종이 한 장을 얻게 되었다. 달필인지 악필인지 알 수 없는 자신의 필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이하는 갑자기 일어나서 휴게실로 갔다. 아무 의자에나 쓰러지듯 누워 죽은 듯이 잠들었다.

4
오전, 이하는 대충 박사 과정 학생이나 연구원들이나 입을 법한 낡은 학창의를 걸치고 상도3태학 응용수리철학 연구소 근처 잔디밭의 긴 의자에 태평하게 앉아 휴대용 단말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원래 수학 쪽은 전자칠판이나 음성 필기 대신 굳이 흑칠판이나 백칠판에 일일이 판서하며 계산하기를 좋아하는 괴짜들의 집합소라, 기능안경 대신 단말기를 들고 다니는 것도 별다르게 눈에 띄는 행동은 아니었다) 단말기 화면에는 두 개의 창이 열려 있었는데, 하나는 새벽에 태학 중앙 보안 설비에서 직접 따온 감청 회선으로 중계된 연구소 3층 복도 보안녹화기의 실시간 촬영 영상이 영사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연구소 전체 직원 및 연구원, 관련 학생들의 증명사진 명부가 조회되어 있었다. 치안국 기술지원부에서 전날 투덜투덜거리며 만들어 준 정보처리기였다. (“이건 불법이라고요!” “만들어주는 것까진 불법 아니야. 내가 직접 실행해야 불법이지. 근데 내가 실행할지 안 할지는 지금은 절대 모르는 거잖아?”) 그마저도 혹시 왜곡이나 간섭이나 조작이 있을까 싶어 간간이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연구소 현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멀리서나마 육안으로도 직접 확인했다. (육안이라고 해서 정말 믿을 수 있는 걸까? 이하는 잠시 또다시, 자신이 기능자들의 물리적 기반인 연산자들이 섞인 공기를 숨 쉬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식은땀을 흘렸다)

낚시질일 뿐이야. 그것도 미끼도 없는 낚시. 아니, 바늘에 뭔가 달긴 달았는데 미끼가 맞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낚시랄까. 요즘 잠복 수사를 하는 건 이하 밖에 없었다. 아니, 이하도 최근에는 별로 하지 않았다. 할 일이 없었다. 기능자에게 보안영상 기록들만 조회하도록 시켜서 결과물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젊은 수사관들 중에는 아예 기능자에게 수사 결과 보고서까지 작성하도록 하는 치들이 있었는데, 이하는 그들을 수사관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보안영상에 남지 않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횡행하며 비명횡사를 뿌리고 있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

차갑게 식은 주먹밥과 시간이 갈수록 미적지근해지면서 시계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 보온병의 흑차 예닐곱 잔으로 한나절이 지루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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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강의가 종료되고 연구소의 야근이 시작되었을 때에 맥없이 돌아온 이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섯 번째 사건 접수 기록이었다:

5) 4월 3일, 상도1태학 송적격 박사가 자택에서 사망함. 사인은 원인불명의 뇌출혈. 박사는 상도2태학에서 응용통계 수리철학을 전공하고 1태학에서 기능자 생성 및 조직, 제어학을 강의했음.

점점 더 기능자 쪽으로 집중되는군. 이하는 생각했다. 송적격 박사는 이하의 명단에서 세 번째에 있었다. 어쩌라고. 이미 죽었다는데 어쩌라고. 죽는 걸 막을 수 없었는데 어쩌라고. 뒤늦게 송적격 박사의 자택과 연구실 출입자들의 보안녹화기의 실시간 촬영 기록을 전수조사해서 목록화할 것을 기능자에게 명령했으나,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으며,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그것으로, 기능자는, 성실하게 자택과 연구실 출입자들의 명부를 만들어 제출했으나, 거기에는 30대 전후의 여자 유생은 결코 없었고, 그저 일상적이고 그저 그럴 뿐인 일상적인 인사들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오직 이하를 붙들어줄 수 있는 것은 다시, 다만, 송적격 박사가 미리 작성했던 명단에 있었다는 사실일 뿐이었다. 이하는 그 명단에 남은 나머지 다섯 명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음 미끼는 누구로 해야 할지 속으로 가만히 의문했다. 이러자니 마치 내가 그 유생이 된 것만 같군. 이하는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 유생은, 정말로 그 유생이 참말 범인이 맞는 걸까? 그 또한 알 수 없는, 아마도 금오위가 개입하고 어쩌면 의금부도 관련이 있고, 배경에는 사악한 기능자들이 깔려 있는 복잡한 음모의 희생자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하는 쿡쿡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들의 꼭두각시일 뿐인 기능자들에게 꼭두각시로 매여 끌려 다니는 인간이 있다고? 도대체 뭐하는 정신 나간 작자야? 그러나 이하는 속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이제는 나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왜 원하는 것인지, 무슨 생각인지는 도무지 모르겠구나. 나는 얼마나 더 너에게 다가가야 할 것일까? 이하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몸이 다섯 개라면, 내일부터 다섯 곳에서 잠복하며 너를 기다릴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또 생각했다. 만일 내가 순라꾼들이라도 동원할 수 있다면, 아니, 동원은 할 수 있지. 하지만 순라꾼들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하는 결국에는 생각이 여기에 다다랐다. 하지만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요원들을 동원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이하는 일어나서 수사부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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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은 이른 밤에도 열려 있었다. 어쩌면 이십사 시간 연중무휴일지도 몰랐다. 아마 이 장소의 용도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위장용 업소치고는 차 맛부터 제대로더니 차림표도 갖가지라, 이하는 그냥 녹차는 어디 있는 걸까 찾아보다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난번에 마셨던 걸 달라고 했다. 다모는 다만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하는 거의 텅 빈 찻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지난번에 마셨던 그 차를 맛있게 홀짝였다. 한유는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뭔가 건진 거면 좋겠군.” 이하는 인사는 생략하고 답했다. “놓친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유는 자리에 앉아 짧게 웃었다. “너 정도면 놓쳤을 때 오히려 놓친 것으로부터 무언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라는 말은 목구멍 아래로 꾹 내리누르며, 이하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한유 쪽으로 돌려서 펼쳐 놓았다. 이하가 품에 손을 넣자 몸이 반사적으로 긴장했다가, 미세하게 긴장을 풀며 한유가 종이를 들어 읽었다. 그리고 일어나 계산대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앉았다. “좋아. 지금부터 모두 감시에 들어갔다. 이제 설명해 봐라.” 그래서 이하는 설명했다. “요원님께서 불러주신 덕분에 상부에서 내다버려서, 아무 눈치도 안 보고 처음부터 다시 수사할 수 있었죠.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그래서 피해자들의 사망 전일부터 당일 사이에 공통적으로 찾아온 여자 유생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편상혼 박사를 빼고는 모두 동일한 증언이 나왔습니다. 편상혼 박사는 잡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해자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첫 피해자인 붕광기 박사의 연구실에서 박사가 죽기 전까지 계산하던 식에 대한 태학생의 해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부터 저는 착안했습니다. 그,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는 시도는, 바로 그 유생의 방문을 통해 촉발된 것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렇다면, 그 유생은 왜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강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태학생은 계산에 적용한 값이 아마 실제 관측 값이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귀가 맞아 떨어집니다. 유생은 무언가를 직접 보고 왔고, 그것은 제국의 학문 중에서 우주론에 가장 먼저 연결되는 것이었으며, 그러나 제국의 학문의 우주론에 무언가 어긋나는 것이었을 것일 수 있었습니다. 제국의 학문의 가장 큰 특징은 우주론이 인성론과 통합되어 있으며, 우주론에 의해 뒷받침되는 인성론은 그럼으로써 자명해지며, 그러한 인성론에 기반하여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등의 제국의 현재의 상부 구조가 탄탄하게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유가 말을 끊었다. “말이 길다. 본론만.” 이하는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이고,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먼저, 저는 해당 유생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는 실제로 신병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생이 만나고 다닌 학자들은 제게는 하나의 방향성이 보였습니다. 붕광기 박사를 방문한 유생은 자신의 관측 자료를 통해 현재 제국의 학문의 우주론의 결함 혹은오류를 확인하려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강정훙 박사와는 그러한 우주론적 오류, 결함, 예측 불가능성이 인성론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하려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물성동이론에 비추어 기능자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검토했을지도 모르고, 알 수 없지만, 주기붕 박사는 분명 우주론과 인성론, 기능자 이론의 연결 고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송적격 박사… 송적격 박사부터는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유생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기능자에 맞춰질 것으로 저는 예상했습니다만, 송적격 박사는 저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송적격 박사가 선택된다면 유생은 현실 우주에서 발견된 모순 혹은 결함 혹은 오류를 수리철학적 측면에서 보완, 복구할 방법, 혹은 여전히 기능자의 제어에 관심을 가졌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송적격 박사가 다음 희생자가 되었을 경우 다음 행보에 대해서도 저는 추리해 보았고, 그 결과는 상도2태학의 향풍풍 박사였습니다. 그는…” 한유가 다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하의 손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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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의 금오위 특급마의 뒤를, 근처 역참에서 빌린 이급마를 급속 폐기를 감수하고 급가속시켜 간신히 따르면서, 이하는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오래된 속담을 생각해보았다. 여기 머리랑 의지는 있지. 내가 머리일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저 금오위 양반이 결단력과 의지인 건 확실해. 그렇다면, 부족한 심장-마음-감정은 누구여야 하지? 하지만 이하는 마음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며, 어쩌면 텅 빈 것이라는 생각을, 그리고 도가에서는 텅 빈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꽉 찬 것으로 본다는 것을, 그리고 최근 이론성리학에서는 정말로 태허를 텅 빈 것이 아니라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미세한 기들로 가득 찬 것으로 계산한다는 사실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태학에서 심성론을 본격적으로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관련 강의를 두 학기 정도는 들었었는데도, 이하는 항상 마음을 텅 빈 것으로, 아니, 없는 것으로 보는 승려들의 관점에 마음속 깊이 이끌렸다. 어쩌면 스스로가 마음이 텅 빈, 아니 아예 없는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듯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욕구들, 욕망들이 왜 자신에게는 없는지 남몰래 의문하곤 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하가,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못하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권력욕도, 물욕도, 인정 욕구도, 성욕도 이하에게는 별로 없었다. 언제나 희미한 외로움과 쓸쓸함만 텅 빈 마음 한켠에 감돌았으나, 이하는 그저 혼자 있는 것이, 혼자 일하는 것이 가장 편안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기계말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이하는 생각과 마음이 생각과 마음에 대한 추상적인 요설과 관념적인 사상에 매달리고 함몰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추상과 관념에 함몰되는 것은 이하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짓거리라 그 관성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매 찰나마다 각별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결코 마음은, 심장은 될 수 없을 거야. 이하는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그 자신을 한사코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왔다. 그건 거의 본능적인 행위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을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었으니까. 이하는 이상한 결핍감을, 그것이 불러오는 때 이른 희미한 패배감을 자각하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사코 외면하려 노력하며, 한유의 뒤를 따라 질주했다. 기계말의 몸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결국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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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의 특급 기계말은 2태학 대문의 하마비를 무시하고 질주했고, 이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대로 그 뒤를 좇았다. 한유는 마치 자기 집인 듯(한유의 집은 어떤 곳일까? 과연 집이 있긴 할까 이하는 의문했다) 태학의 너른 교정을 능숙하게 헤집으며 쏜살처럼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한유의 기계말은 관성에 의해 하체가 다소 틀어져 옆으로 비껴나가면서도 거의 물 흐르듯 부드럽게 멈춰 섰고, 잠시 후에 이하의 기계말은 감속에는 실패했지만 스스로 사지분해되며 질주 자체가 무화되었고, 이하도 튕겨져 나와 낙법으로 몇 번인가 굴러서 간신히 휘청이며 일어섰다. “운동신경이 없진 않구나. 가자.” 한유가 다가와 이하를 재촉했다. 분명히 어딘가 부러졌거나 금이 갔을 거라고, 아니면 재수 없으면 둘 다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하는 절뚝거리며 한사코 한유를 따라갔다. 힌유는 한 걸음 한 걸음 단호한 발걸음으로 형이상학 연구소를 향해 나아갔다. 태학에 이런 연구소가 다 있었나, 이하는 의문했다. 요즘 유행하는 융합인가 뭔가일지도 모르겠군. 몸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아픔과 고통을 다만 통각 신호라고 무시하며 계속 걸었다. 한밤의 연구소는 대체로 불이 꺼져 있었으나, 몇몇 창들은 잠들지 않고 하얀 안광을 어둑한 하늘을 향해 내쏘고 있었다. 저 창문들 중 어딘가에 향풍풍 박사의 연구실이 있을까? 아니면 박사는 집에서 태평하게 자고 있고, 우리는 불 꺼진 연구실 중 하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 후자가 가능성은 훨씬 더 컸으나, 그래도 한유는 거침없이 연구실 현관을 지났고, 승강기에 거침없이 올라탔으며, (이하도 절뚝거리며 현관을 지나 승강기에 따라 탔다) 형이상학 연구소의 승강기 기능자는 한유가 “향풍풍 박사 연구실”이라고 했을 때에도 다만, 네, 알겠습니다, 라고만 답하고 곧바로 4층을 향해 올라갔다. (승강기치고는 과묵하군요, 이하가 말하자 한유는 짧게 답했다. 이미 금오위에서 반경 십 리 이상 통제하고 있다. 기능자는 최소한의 기능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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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복도는 적요했다. 조명은 어둑했고, 줄지어 선 연구실 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다. 향풍풍 박사의 연구실인 404호의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먼저 도착한 한유는 문을 바라보고 선 채로 이하의 지원을 기다렸고, 이하가 문 옆에 붙어 열선총을 꺼내들자 어디선가 양성자검을 꺼내 파르스름한 불꽃 칼날을 길게 뽑아 두 손에 들고는, 눈짓으로 하나, 둘, 셋을 센 다음 발로 문을 단숨에 부수며 돌입했다. “황명이다! 멈추어라!” 그런다고 용의자들이 두 손을 들고 멈춰 설 리는 절대로 없기 때문에 이하는 한유도 결국은 이론에만 빠삭한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후방 지원용 저격 자세를 취했던 것이었는데, 그러나 막상 돌입한 뒤에 이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너무나도 평온한 풍경이었다. 검푸른 도포를 걸치고 검은 복건을 깊이 눌러 쓴 유생이 기립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꾀죄죄한 학창의를 입고 찌그러진 동파관을 쓴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감색지 위에 금필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하는 어리둥절했지만 한유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황명이란 말이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 시간마저도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섰지만, 학창의를 입은 노인, 아마도 향풍풍 박사는 우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하에게 짧게 눈을 맞추고 손을 움직여 획을 더했다. “방해하지 마시오.” “닥쳐라!” 한유가 전리화된 불꽃이 파랗게 작렬하며 검신을 이루는 양성자검을 높이 치켜들고 도약했다. 그러자 유생이 소매에서 한 손을 빼어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한유가 튕겨나갔다. 벽을 부수고 복도로 나가 떨어졌다. 이하는 알 수 없는 흥분 속에서 함성을 지르며 열선총을 난사했다. 열선은 모두 반사되었다. 유생이 한 번 더 손을 젓자 이하도 튕겨져 나가 벽에 부딪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일그러지고 어둑한 시선을 다시 들었을 때, 이하는 보았다: 천장을 부수고 난입하는 특수전투복을 입은 금오위 요원들을. 그리고 유생이 복잡하게 두 손을 휘저어 손가락을 비틀어 꼬아 수인을 맺자 일제히 목이 떨어져 나가고 굵고 붉은 핏줄기가 잘린 목에서 치솟는 것을. 그리고 박사는 마침내 붓을 종이에서 떼고 흡족하게 희미한 미소를 지은 다음, 눈과 코와 입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한유가 괴성을 지르며 양성자검을 양손으로 마구 휘두르며 다시 연구실로 돌입했지만 그사이 유생은 감지를 말아 품에 넣고 유유히 창밖으로 몸을 내던지고, 손목과 발목에서 희미한 잔광을 흘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반중력 고리. 이하는 생각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썩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눈꺼풀이 관뚜껑처럼 세계 전체를 내리 닫았고―암흑. 깊고 조용하고 평온한 꿈결처럼 달콤하고 묵직한 피빛 암흑.

*

따뜻함. 아니, 뜨거움. 뜨거움? 열기. 열기? 열은 운동과 마찰의 결과이며, 무언가가 무언가를 힘껏 내리치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 살갗이. 매끄럽기가 마치 옥과 같고, 그 단단함도 마치 옥과 같은, 섬섬옥수가 무언가를 내리친다. 무언가? 그 또한 살갗. 그러나 제대로 관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거칠거칠하기가 짐승의 가죽과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