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 리뷰 시리즈?
연금술적 관점에서 soul(개별자)이 spirit(보편자)에게 의미를 부여하면, 보편자는 그 개별자를 통해 비로소 특별해진다. 이름 없는 거대함은 누군가의 시선을 받아야 비로소 형상을 갖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방향을 뒤집어 묻는다. 보편자가 먼저 개별자에게 손을 내밀면 어떻게 되는가.
산 전체에 뿌리내린 거대한 의식이 한 인간을 굳이 기억하기로 결심할 때, 보편자는 비로소 개별자의 논리를 빌려 입게 된다.
[시점의 전복-우상이 화자다]
이 소설은 독자가 우상, 즉 보편자의 안쪽에서 인간을 보게한다. 산을 뒤덮은 거대한 균사체적 군집의식, 인간의 형상으로 자라난 자작나무, “뿌리”로 연결된 “우리”가 화자가 된다. 화자는 처음부터 신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을 신으로 호명하며 기도를 바쳤고, 그것은 그 기도들의 결을 가만히 더듬으며 “인간이라는 족속”을 학습한다.
이 시점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비극을 바깥에서 본다. 남쪽 마을의 제사 무리가 흐느끼며 부르는 노래도, 북쪽 채굴꾼들이 휘두르는 도끼도, 화자에게는 그저 똑같은 소음이다. 그래서 후반부 양측이 서로를 향해 던지는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응수는 화자에게는 그저 확인일 뿐이다. 이미 전부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조차 접어버린다. 그들이 바친다는 전부가 인간성이었던가.
[목수, 가장 ‘인간’적인 인물]
가장 ‘인간’적인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60년 전 목수다. 그는 어린 시절 본 얼어붙은 바다 이야기를 들고 와 화자 옆에 주저앉아 위스키를 마시던 사람이고, 60년이 지나서도 화자가 “유일하게 진저리 나도록 기억하는 첫 번째 인간”이다. 그가 화자에게 “감정”이라는 감각을 발현시켰다는 후반부의 언급은 그래서 더더욱 그를 ‘인간’의 표본으로 보게 만든다.
목수는 처음에는 뮤즈를 노래하는 자였고, 끝내는 어린아이의 목을 베어 들고 와 자랑하는 자가 되었다. 그렇다, 가장 인간적인 모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화자는 그 변화의 어느 지점에서 책임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를 죽인다. 정확히는,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올라올 때 그의 다리를 묶어놓는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처음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자세를 깬다. 그러나 그 첫 살해는 분노 때문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이었다.
“필요하다면 나를 이용해.”
내게 입이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더라도, 너 따윈 필요없을 거라고.
이 거절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soul이 spirit에게 의미를 부여하려 했으나, 그 의미가 너무 추하여 spirit이 거꾸로 “그 의미 부여 자체를 토해낸” 사건이다.
[채굴꾼과 아이, 가장 순수한 인간들]
40년 전, 죽은 동료를 등에 업고 화자를 찾아왔던 채굴꾼은, 이 소설에서 단 하나뿐인 “선량한” 인간이다. 그는 화자에게 소원도 욕망도 찬양도 바치지 않는다. 다만 “네가 외로울까 봐” 토끼 인형과 잡지를 두고 간다. 화자는 그 순간 처음으로 ‘방관자’에서 ‘목격자’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마을로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의 씨앗을 그의 죽어가는 몸에 심는다. 산 아래에서 그는 가족 앞에서 마지막으로 웃은 뒤 굳어 죽었다.
그리고 몰래 오밤중에 혼자 올라와 화자 앞에서 울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하던 어린아이. 빈 그릇에 헛구역질을 하던 그 아이는 자신이 그릇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화자는 그 아이의 발자국을 지웠다. 이번엔 살린 것이 아니라, 그저 흔적을 지우기만 한다.
이 두 인물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에 남쪽인간들과 북쪽인간들의 싸움을 통해 화자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마지막 평결을 내린다.
진짜 피해자는 따로 있지 않은가. 늘 어린 개체들과 약한 개체들이 타겟이 되는 건 북쪽과 남쪽의 유일한 교집합일까. 정말이지 인간들은 늘 다른 의미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떤 눈송이에는 책임이 있는가, 아니면 모든 눈송이에게 책임이 있는가]
‘눈사태 속 단 하나의 눈송이도 자신의 책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는 것처럼. 모두가 공범이다.
작품 제목이자 화자가 결정적 순간에 떠올리는 이 격언은, 사실 두 방향으로 작동한다.
한쪽 방향은, 남쪽도 북쪽도 자기들이 무너뜨린 눈사태 안에서 “나는 눈 한 송이일 뿐”이라며 책임을 흩뿌리는 것이다. 20년 전의 가해와 오늘의 가해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굴러간다. 모두가 공범이며, 그래서 어느 한 송이를 골라낼 수 없다. 화자가 “이제 아무 짓도 하지 않을 이유가 더 이상은 없잖아?”라고 자문하는 순간은, 개별자 집단에 대한 보편자의 판결이다.
나는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러나 화자 자신은 눈송이가 아니다. 그는 “눈사태 그 자체”다. 산 전체에 뿌리내린 보편자가 인간이라는 개별자를 향해 손을 내민 순간 — 목수에게, 얼어죽은 동료를 업고 가던 채굴꾼에게,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몸을 빌려준 또 다른 채굴꾼에게 — 보편자는 개별자의 논리와 감정을 학습하기 시작한다. 호기심, 편애, 수치심, 그리움.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soul의 어휘이지 spirit의 어휘가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비극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결국 인간이기에 어느 곳에 묶여있든 상관없이 비극을 만든 것일까. 어쩌면 인간이 자연을 비극으로 만들고, 그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그들이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찾았다.
그래서 다른 쪽 방향은, 어쩌면 눈사태가 눈송이에게 손을 내민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화자가 마지막에 한 채굴꾼의 몸을 빌려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하는 순간, 보편자는 더 이상 산에 머무는 거대한 관찰자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는 개별자의 형상과 가동성을 빌려, 인간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려 한다. 왜? 호기심 때문에.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를 스쳐지나갔고, 이제 정말로 그들이 궁금해졌기 때문에. spirit이 soul에게 진심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가 가져가는 것은 인간의 도덕률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이다. “필요하다면 나를 이용하라”던 목수의 마지막 말이, 너 따윈 필요 없을거라고 거절했던 말이, 이제는 화자의 행동 원리가 된다.
나는 그가 날 삽으로 때린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품진 않았다. 이해할만한 사정이었으니 말이다.
보편자는 개별자의 논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도덕률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떠한 인간들보다도 가장 인간의 도덕을 ‘이해’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괴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화자는 잔인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들이 더 잔인하다. 다만 인간을 오래 지켜본 끝에 인간의 가장 무서운 습성 하나를 학습했을 뿐이다. 자신의 변덕을 궁금증, 욕망, 더 나아가 진화라고 부르는 습성을.
보편자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 것인가, 우상이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신이라 부를 것인가. 그도 아니면 재앙이나 괴물이라 부를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를 ‘닮고 싶어 했던’것 뿐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