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웅담은 매력적입니다. 잘 쓰인 영웅담이라면 특히 그렇죠.
‘시뮬레이션인 세계’라는 설정도 매력적입니다. 잘 쓰였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영웅 이야기’와 ‘시뮬레이션인 세계’라는 요소를 깔끔하고 맛깔나게 버무려냈습니다. 적어도 헐리우드 스타일의 블록버스터들에 익숙한 제 입맛에는 찰떡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리뷰하기에 앞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부터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왜 영웅 이야기를 보고 열광할까요. 자신에게는 없는 지략이나 초능력 같은 요소들을 보며 대리만족하기 위해서? 영웅 이야기 특유의 장엄한 스케일이 좋아서? 초능력의 설정 놀이 자체가 재미있어서?
물론 그런 독자 분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느끼는 영웅 이야기의 핵심 포인트는 ‘자기 희생’입니다.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작품의 스케일이 작아도, 자기 희생을 통해 신념을 실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영웅담의 핵심을 제대로 찔렀다고, 개인적으로 평해봅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분량에 맞게 간결하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필요한 정보들만 전달합니다. 중간중간 들어간 묘사도 작품을 감칠맛나게 해 줘서 저는 이 작품이 밸런스가 잘 맞는 안정적인 글이라고 인식했습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고, 그래서 초간지폭풍 주인공 마쿠스의 강렬한 낭만에 심취할 기회를 얻었지요. 모두 작품이 잘 쓰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세계의 진실도, 다소 클리셰적이라는 감은 있습니다만, SF 팬으로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칭찬만으로는 리뷰의 분량을 충분히 채울 수 없으니, 이번에는 읽으면서 살짝 걸렸던 부분도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합니다.
우선 ‘적’의 정체가 모호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적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서야 그 신비감이 떨어질 테니까요. 다만, 적어도 이 적을 반드시 무찔러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설득력있게 제공될 정도의 정보는 주어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중에서 묘사된 적은 한 곳에 그대로 가만히 있고, 적의를 품고 다가오는 적에게만 반응합니다. 그렇다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자연히 몇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 한 곳에만 가만히 있는 인물(?)이 어떻게 수배범이 된 것인가?
- 한 곳에만 가만히 있는 인물이 수배범이 되었는데 마쿠스는 어째서 그 인물을 찾기 위해서 3년동안 추적을 해야 했는가?
- 한 곳에만 가만히 있는 인물이 왜 왕국에 위협이 될 것인가?
3에 대해서는 작중에서도 ‘언제 칼을 겨눌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언급되고 지나가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영웅 서사에서 중요한 부분은,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모험의 길로 밀어넣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주인공이 미련해 보일 수 있으니까요. 위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좋은 설정이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다듬어진다면 좀 더 멋진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인공의 설정에 대해서도 한 가지 말을 얹고 싶어요. 작품 후반에 마쿠스는 리셋 능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 설정이 굳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그 능력이 묘사되기 전에도, 후에도 마쿠스는 이미 훌륭한 영웅이었으니까요.
‘몇 번이나 죽었다’는 설정이 마쿠스의 희생을 더욱 크게 느끼게 만들어줄까요? 제 생각에는 오히려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마쿠스의 죽음이 지니는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쿠스가 단 하나뿐인 목숨을 붙들고 전투에 임했다면, 2000명의 고통을 짊어진 그의 희생이 더욱 빛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가님의 고뇌 내지는 우려도 이해합니다. 그런 설정이 아니라면 마쿠스가 어떻게 불패의 명장이자 왕국 최강의 기사가 되었는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일까봐 우려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리셋 능력의 도움 없이 영웅이 된 사례들을 현실에서도 이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우려는 어느 정도 접어두셔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마쿠스는 작품 초반에 ‘지금 얘기해주면 전술로써 성립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구체적인 전술을 공유해주지 않았는데, 좀 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부관 카이트가 마쿠스를 오해하다가 뒤늦게 진실을 깨닫도록 설정하신 점은 감동을 배가시킨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왜 굳이 얘기해주지 않았을까? 싶었던 부분입니다. 기사들이 진실을 알든 모르든, 결과적으로 마쿠스의 전략을 실현하는 데는 큰 상관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좋은 작품을 읽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드리며 리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