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가두고 있던 ‘왕국’이라는 이름의 우리… <빛의 심장, 어둠의 피> 공모(감상)

대상작품: 빛의 심장, 어둠의 피 (작가: 마이너감성,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2일 전, 조회 38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뜻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전 왕녀 르네 티리엔이 아닌 마법사 르네 마라로 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1장-8.(P66)

 

 

 

 

목차

1.우리가 사랑하던 정통 판타지에 대한 단상.

2.정통 왕녀를 가둔 우리 티리엔왕국

3.환상 그녀가 찾고 있는 탈출구는 어떤 모습인가요?

4.아직은 마법의 빛깔이 희미한 듯해요.

5.작은 세상에 갇힌 거인들을 위하여.

 

 

 

<본 리뷰는 약 50회차(1장~3장 일부) 분량을 읽고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우리가 사랑하던 정통 판타지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환상문학’이라고 부르던 장르의 한 갈래로 ‘정통 판타지’라는 분야가 정립되었을 당시를 떠올려보면, 왜 그토록 독자들이 ‘정통 판타지’라는 장르에 빠져 있었는가를 궁리해보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을 벗어난 장황한 ‘환상(Fantasy)’이 아니라, 문명이 원시적으로나마 정립되어 있던 왕정의 시기를 그리며 매력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독특한 지점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기인한 의식이었습니다.

 

왜 중세시대, 정확히는 중세 ‘유럽’풍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를 사랑하는가에 물음을 달자면, 그 답은 독자들의 기호에 따라 다르게 나오기 마련입니다. 다만 환상에 가까운 배경을 제시한다는 것은 은유성을 함의하겠다는 선언이라 정의할 수는 있습니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조차, 그 환상으로 구축한 세상에서는 한 걸음 떨어져 보이기 마련이고, 주제의식과 사회문제를 비롯한 내적인 요소들조차 독자들의 상상력을 양분삼아 탐구력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현실의 요소로는 함부로 도식화하기 어려운 복잡한 개념들도,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로 함축되며 그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마련입니다. ‘정통 판타지’라고 부르는 장르는 이 위에 시대극에서 볼 법한 질서를 도입함으로 인해 인간들의 모습을 정제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지 않는 질서로 사회를 만드는 셈이죠. 흥미로운 것은 그런 공간 또한 작가가 담아내고 싶은 의식의 일부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빛의 심장, 어둠의 피> 또한 이런 ‘환상’과 같은 요소들이 주제의식을 정의하고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국’이라고 지칭되는 배경과 ‘왕녀’로 소개되는 주인공의 설정은 우리가 흔히 정의하는 ‘정통 판타지’의 익숙한 요소로 대표되며, ‘마법사’라는 특수한 직종을 포함한 환상적인 요소들은 작품이 가리키고 있는 고유의 주제의식을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이 글에서는 <빛의 심장, 어둠의 피>이 환상으로 정제한 주제의식과 더불어, 이 작품의 매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점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감평은 현재까지 연재된 50회차 분량을 감상한 후에 작성되었습니다. 뒤이어질 내용은 문해력이 부족한 독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하며, 앞으로 진행될 내용에 따라 미미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참고 부탁드립니다.

 


 

2.정통 왕녀를 가둔 우리 티리엔왕국

 

앞선 대목에서 ‘정통 판타지’라는 배경에서 확인되는 ‘왕국’이라는 개념에 대해, 환상적인 배경을 인간의 사회로 정제하는 ‘질서’로 정의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 작품 또한 그런 테두리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 ‘왕국’이라는 배경은 단순히 사회질서의 정의 이상으로, 주인공의 행동원리와 가치관을 정의하는 뿌리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티리엔 왕국’입니다. 왕이 집권하는 사회와 영주들이 각지 봉토를 나눠받고 세금을 걷어 관리한다는 묘사를 비롯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봉건 사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르네’는 이 나라의 왕녀로 소개됩니다. 혈통과 신분 면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그녀지만, 작중의 모습은 사뭇 왕녀와 거리를 두는 듯한 낌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르네’에게 이 ‘왕국’이 해석되는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Prologue-1.(P12) 르네의 존재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왕비가 그녀의 삶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중간생략)르네는 드넓은 궁 안에서 그녀를 두둔해 줄 사람도, 뒷배가 돼줄 세력도 없었기에 언제나 외롭고 위태로운 처지였다.

 

도입부에서 소개되는 배경은 ‘르네’가 왕족이기에 겪을 수 있는 특수한 갈등을 가리킵니다. 직접적으로 작품은 그녀가 궁 안에서 기댈 곳이 없는 독립된 처지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이 외부적인 요인인지, 그녀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된 갈등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갈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작중에서 구체화하고 있는 봉건사회의 질서가 그녀에게는 거부감으로 대표된다는 사실입니다.

 

1-2.(P14) “돌아가서 또 눈치나 보며 사느니 차라리 사람 냄새나는 감옥이 아예 낫겠군요.” 르네의 말은 자신이 서녀라 왕비로부터 미움을 받던 처지를 대놓고 비꼰 것이었다.

1-2.(P25) “왕비님계서 승하하셨습니다. 지금 즉시 궁으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중간생략)… 그 소식은 르네를 딱히 슬프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공주 신분으로서 장례에 참여해야만 했기 때문에 여기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1-3.(P4)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 한 번 뵙지 못 한 제 불경함이 뼈에 사무치는군요.” 뻔한 거짓이라는 것은 듣는 모두가 알았지만, 누구도 공주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것은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족쇄로 작용합니다. 그녀는 아끼는 친구들과 먼 여정을 앞에 두고, 자신을 박대하던 왕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코앞에 두고 있던 목적을 접어 둬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적인 감정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녀는 왕가의 딸이고, 왕비의 장례는 왕족의 참여를 요구하는 행사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녀의 감정과 별개로 하고 싶지 않은 말도 하게 만드는 특유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사람을 가로막는 메커니즘을 영리하게 구현한 셈입니다.

 

1-3.(P11)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중간생략)왕군은 이미 공주님께서 하이스트에 입학했을 때부터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안전을 확보하고, 소식을 주기적으로 전하라는 폐하의 명 때문이었죠.”

 

그녀조차 인식하지 못 하는 사이 왕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처지는, 그녀가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공간은 왕궁을 넘어 왕국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1-5.(P46) 리아는 르네가 가족 중에선 유일하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한 사람이었다 (중간생략)하지만 그 부침 없던 꼬마는 지체 높은 왕가에서 귀여움만 잔뜩 받으며 살다 보니 그 정도가 지켜지지 않았다.

1-5.(P47) 그래서 르네는 이곳 궁에 있는 게 더더욱 싫었다. 지금은 죽었지만, 왕비의 눈치에 눌려서 사는 것도, 저렇게 철없는 동생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1-7.(P33) “누나가 이젠 떠나지 않고 다시 여기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어.” 루시드는 다정하게 건넨 말이었지만, 르네에겐 심장을 철렁이게 만드는 말이었다. (중간생략)내가 궁에 있어봤자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 우리끼리 왕좌를 놓고 경쟁이라도 할까 봐?”

1-8.(P37) “저는 정말로 이곳의 생활이 싫을 뿐입니다. 저는 궁 안에서 호사를 누리기보단 바깥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의외로 ‘르네’라는 인물은 말을 삼키고 행동을 삼가는 관습적인 왕족의 모습치고는 무척 날 것의 감정을 표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의 태생이 완벽히 왕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장치로도 이해되지만, 어쩌면 이런 지점이 인물을 단순하게 직조하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이 삭막한 공간에서 혼자 빛깔을 띠고 있는 듯한 인물로 비추게 만드는 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마음을 나눠줬던 동생은 왕가의 일원으로 커가며 거부감의 대상으로 변질되었고, 형제의 다정한 걱정도 후계자 다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 진의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왕가를 구성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만큼이나 불편한 일이 당연합니다.

 

1-8.(P29) “왕가의 일원으로서 왕실의 번영을 위해 종사하는 것이 직분 아니겠느냐?” “그 말씀은 저더러 좋은 집안과 결혼해 왕실의 힘을 실어줄 가문과 연을 맺으란 뜻입니까?”

1-12.(P47) “왕실 자제들이 어디 사사로운 만남으로 결혼하는 것 봤습니까? 그만큼 왕가의 인연은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녀의 신분과 배경은 단순히 공간의 제약이 아닌, 관계의 제약으로 나타납니다. 작품의 시작부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여정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 현실이 만들어주는 관계는 입맛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억지로 입에 물고 있는 듯한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2-11.(P6) “의무도 못 행하면서 무슨 세금을 받겠다는 겁니까? 무슨 영주가 그래요?” (중간생략)여러분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2-14.(P2) “서두르면 겨우 나흘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이놈의 영주는 남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여태 손 놓고 있었단 말이야?” 르네는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집안이 자기 집안과 사돈의 연까지 맺는다고 하니 더 기가 찰 노릇이었다.

2-16.(P17) “농부면 뭐합니까. 뼈 빠지게 일해 봐야 겨우겨우 수확한 건 영주가 세금이란 명목으로 다 뺏어가는 뎁쇼.”

 

그녀의 시선에서 관측되는 ‘왕국’의 실체 또한 봉건사회의 어두운 면을 강조합니다. 부패한 영주에게 수탈당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르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피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녀가 직접 서민들의 삶에 분노하는 지점은, 단순히 그녀의 선하고 올바른 인품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왜 그녀가 이 ‘왕국’이라는 질서를 벗어나야하는가에 대한 타당성을 논의합니다.

 

1-8.(P66)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뜻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전 왕녀 르네 티리엔이 아닌 마법사 르네 마라로 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앞선 요소들로 인해, 1장 초반에 등장했던 이 대사가 울림이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 작품의 배경이 삭막하다는 것을 넘어, 이런 배경에 담긴 질서가 그녀를 규정하지 못 하는 족쇄라는 것에 독자들이 공감할 지점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독자들이 느끼는 르네는 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물입니다. 막연하게 그녀에게 어울리는 인생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현재 ‘티리엔 왕국’이라는 우리는 너무 좁고 차가운 무언가로 비춰집니다.

 

1-1.(P22) “르네. 넌 돌아가야 할 곳이 있잖아.”(중간생략)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거야!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중간생략)예전 이름인 르네 머시기 따윈 역사에서 지워진 지 오래라고!”

3-10.(P39) “우리 힘없는 평민들은 늘 그렇게 살아. 가진 거 없고, 지위도 낮은 양민으로 살다 보면 억울한 터무니없는 일을 수도 없이 겪게 되지.(중간생략)나 또한 처음엔 그런 일을 못 참아서 마법사가 되려고 했던 거야. 넌 아마 공주라 그런 삶은 전혀 모르겠지.”

 

그들의 사회에서는 ‘신분’이 자리를 만들고, 그들을 ‘신분’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 하는 테두리를 규정합니다. 심지어 결혼을 약속했던 친구마저 ‘신분’이라는 테두리가 오해를 낳고 편견을 만들며 마찰을 일으킵니다. 그녀에게 왕궁에서 지낸 5년의 세월은, 몸에 심어진 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통 판타지’라는 배경 하에 등장하는 봉건사회는 어떤 인물에게는 기회가 되고, 애정이 되며, 어쩌면 적대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심장, 어둠의 >에서 정의하는 ‘정통’이라는 질서는 어떤 형태인가요? 그 요소를 짐작해본다면, 결국 사방이 둘러싸인 우리에 갇혀 소리만 지르고 있는 르네의 모습을 그려볼 수밖에 없습니다.

 


 

3.환상 그녀가 찾고 있는 탈출구는 어떤 모습인가요?

 

흔히 ‘중세판타지’ 혹은 ‘정통판타지’라는 장르를 내세우는 여는 작품들을 살펴보자면, 과거 왕정이 다스리던 유럽풍의 배경과 더불어 현실의 한계를 벗겨낼 수 있는 환상적인 요소의 조화를 제시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어떤 소설적인 장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환상’으로 대표되는 배경 하에 많은 것들이 느슨하고 게으른 인과를 제시하는 경우도 더러 있죠. 냉정히 말하자면, 수없이 양산화 되었던 과거 판타지 소설들을 살펴보면, ‘질서’로 함의되는 배경에 대한 고민보다는, 해당 배경과 환상적 요소에서 나오는 낭만성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의 심장, 어둠의 피>의 배경과 소재에 분명 주목할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중세풍 배경과 마법이라는 소재야 익히 대중들이 즐겨왔던 무언가로 비춰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앞서 중세판타지의 ‘중세’가 주인공 르네를 속박하는 ‘질서’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것처럼,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는 소재들 또한 인상적인 함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선 대목에서는 이 작품이 중세판타지를 표방하며 ‘중세’를 어떻게 장치하였는가에 대해 분석해보았다면, 이번 대목에서는 ‘판타지’를 어떤 식으로 장치하였는가에 대해 분석해볼까 합니다.

 

마법은 그 판타지의 대표 격인 장치입니다.

 

의외로 ‘마법’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는, 역설적이게도 대중들이 상상하기 쉬운 대표적인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초월적인 힘으로 해결하는 과정이야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재생산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형태가 명확하지 않기에 많은 소재로 장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듯합니다.

 

<빛의 심장, 어둠의 피>에서도 이런 초월적인 힘이 상식으로 자리 잡은 세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초월적인 힘은 ‘마법’이라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정의되며, 그것은 일종의 학문이자 힘으로 배경설정 하에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르네 또한, 이런 ‘마법’을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1-1.(P1) 티리엔 변방의 작은 도시 아이델룬에는 하이스트라는 한 마법학교가 있었다. (중간생략)마법사 사회 내에서도 저 학교 출신들이 왠지 범상치 않더라라는 말이 심심찮게 도며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작중의 묘사에 따르면 ‘마법사’를 양성하는 기관은 다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나, 그녀가 졸업한 ‘하이스트’는 변방에 자리 잡았다는 지리적 요소와는 별개로 능력적인 면에서 동경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작품 내에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학업의 장에 따라 ‘출신’이라는 개념이 작용하는 셈입니다.

 

1-Prologue.(P17) 그렇게 르네는 마법사가 되기 위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도착한 학교에서 마법사가 되기 위해 그 누구보다 공부에 매진했다. (중간생략)마침내 궁에서 벗어나 왕비의 감시에서 달아나 또래친구들과 어울리니 르네는 그토록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다만 주인공 ‘르네’는 학교를 ‘출신’으로 구분하는 마법사 사회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가장 최상위 신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 ‘마법사’가 된다는 것 자체야 신분적인 면에서 가산점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그녀에게는 오로지 왕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마법학교 ‘하이스트’는 그녀가 왕실이라는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였던 셈입니다.

 

1-4.(P40) “. 마법사들이라면서?” (중간생략)겸손하시긴. 하이스트 출신들이라고 들었는데.”

2-13.(P10) “안 그래도 공주님을 진즉에 뵙고 싶었습니다. 요즘 하이스트 출신 마법사들이 실력이 워낙 좋다길래, 안 그래도 자문을 좀 구해볼까 했거든요.”

2-14.(P33) “이 자는 몇 년 전에 하이스트를 수료한 마법사라고 합니다.” (중간생략)오호. 마법사시라고? 그래. 귀하신 마법사께서 이곳 라비앙 본영엔 어쩐 일이시오?”

 

물론 르네가 ‘하이스트’라는 인정받는 교육장을 나온 것은 특별한 지점을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해당 사회에서 ‘마법사’라는 존재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엘리트성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마법사’라는 존재를 초월적인 가능성으로 간주하듯이, 이들의 사회에서도 마법사는 일반 사람들을 뛰어넘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특히 ‘하이스트 졸업생’이라는 신분이 ‘마법사’들 중에서도 특출 나게 눈에 띄는 존재들로 인식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작중에서 르네에게 ‘마법사’는 왕녀로 대표되는 그녀에게 또 다른 신분으로 덧씌워진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왕녀’가 탄생으로 빚어진 정체성이라면, ‘하이스트 출신 마법사’는 그녀가 직접 손으로 빚어낸 창조된 정체성입니다.

 

2-10.(P46) “마법사가 되려면 돈이 무척 많이 들거든. 이런 시골에서 평범하게 사는 너한텐 매우 어려운 일일 거야.” (중간생략)그런데 우리 동네에 살았던 어떤 사람도 마법사가 되러 떠났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도 저처럼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꿈을 갖고 떠난 거잖아요. (중간생략)그렇다면 제게도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2-10.(P75) 마법사는 어딜가나 매우 귀한 존재였다.(중간생략)그래서 르네도 처음에 마법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 카이저로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중간생략)만약 왕가를 이어가야 할 아들이었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카이저였다.

2-21.(P21) 일반 사람들에겐 평생 마법사를 한 번 만나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에겐 마법을 구경하기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발췌한 구절들은 해당 사회에서 ‘마법사’라는 존재가 갖는 특수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작중의 묘사에 따르면 ‘마법사’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약할 수 있는 만능으로 대표됩니다. 재능과 노력이 있다면 학업을 통해 익힐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죠. 하지만 돈과 시간, 그리고 신분을 비롯한 각종 장애물들 때문에 접근성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민에게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버거운 일이라고 할 수 있죠. 르네는 이에 대해 자신이 여자가 아니었으면 결국 신분의 질서로 무마되었을 꿈이라며 자조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거리감이 있지 않으면 그녀는 평생 왕녀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Prologue.(P21) “마력은 인간의 생명력을 갉아먹지(중간생략)그래서 마법사들은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 게다가 자식 또한 낳을 수가 없어. 마력이 인간에게 분에 넘치는 힘이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부릴 수만 있다면 정말로 신비롭고 강력한 힘이지만 그 힘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돼있거든.”

2-10.(P73) 부부 중 누구라도 마법사가 있으면 그 부부는 자녀가 생길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2-20.(P29) “아니, 왜 여자들만 잡아들였던 거야? 여자가 마법사가 되는 게 무슨 죄라고?” (중간생략)물론 차별적 요소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건 마법사는 아이를 못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마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학업의 장에 도달하는 과정이 험난하다는 것을 넘어, 그 자체가 함부로 다루기 힘든 무언가라는 것을 끊임없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히 목숨과 자손을 대가로 초월적인 힘을 얻는다고 한다면, 단순히 손에 익기 어렵다는 것을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망가뜨린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집니다. 한 마디로, 작중에서 ‘마법’이란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큰 대가를 바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1.(P6) 세 명의 남자 동기들은 졸업 이후 그들만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고렌시아 대륙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미지의 땅 화이트리아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중간생략)화이트리아로 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로 간주됐다.

2-10.(P53) 생각해 보니 르네도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시안은 어쩌다 이 촌구석에서 하이스트까지 가게 된 것일까?

2-11.(P74) “걔들은 어디로 갔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거야?”(중간생략)아이반은 거기 남고 싶대. 그래서 남았어.”

2-20.(P22) “대마법사들에 관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나 제피온은 어려서 형편이 매우 안 좋았는데, 그런데도 마법사가 되길 포기하지 않아서 그 과정이 매우 험난했다고 하더군요.”

2-22.(P99) “왜긴? 나도 강해질 거야. 그래서 역사에 남을 대 마법사가 될 거라고. 어차피 너도 나더러 거기 가보라고 하지 않았어? 아이반을 만나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마법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해당 왕정 사회에서 ‘마법사’라는 신분이 주는 해방욕은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분의 변화를 넘어, 신분이라는 질서에 눌려 있던 제 자신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누군가에게는 ‘마법사’라는 힘과 신분을 얻었기에 누구나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세상으로 여정을 떠날 수 있었고, 부패한 봉건사회 특유의 수탈에 시달리며 늙어갈 수밖에 없던 과거를 벗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합니다. 생명을 소비한다는 전제가 있는 ‘마법사’의 특성상 한철의 불꽃처럼 느껴지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평생 피우지 못 했을 심지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인생반전으로 취급되는 복권과 같은 운적 요소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전할 수 있는 학업으로 묘사된다는 것 또한 이런 ‘기회’의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1-8.(P66) 폐하계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뜻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전 왕녀 르네 티리엔이 아닌 마법사 르네 마라로 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3-10.(P41) “난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너랑 다를 바 없는 평민 소녀였어. 내가 궁에 있었던 기간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중간생략)난 늘 궁 밖에서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살아왔어.”

 

그녀에게 ‘마법사’라는 신분을 얻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야 자명합니다. 마법은 ‘티리엔’이라는 태생적인 족쇄를 벗고 자신의 이름 ‘르네 마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왕비가 주는 핍박에 시달리거나 후계자 싸움에 휘둘려 고생하는 왕녀가 아닌, 단 5년의 궁 생활에 빼앗겼던 본래의 인생, 서민들과 어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여정을 떠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만든 탈출구입니다.

 


 

4.아직은 마법의 빛깔이 희미한 듯해요.

 

앞서 ‘정통 판타지’에서 ‘정통’과 ‘환상’으로 구분되는 요소들이 어떻게 장치해야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졌습니다. <빛의 심장, 어둠의 피>가 보여주는 ‘정통 판타지’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 환상성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영리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초월적인 힘을 넘어 기회를 만들고, 중세의 도시에서 꿈으로 향하는 탈출구를 만들 수 있는 장치야말로, 현실에 있는 독자들에게 정통 판타지에서 ‘마법’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아름답게 구체화될 수 있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 명의 독자로서 <빛의 심장, 어둠의 피>를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제 길을 찾아가는 여주인공과 더불어, 암울하고 삐걱거리는 봉건사회에서 ‘마법’이라는 특수한 힘이 하나의 동경으로 비춰지는 시선 또한 고민거리를 던져주며 몰입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정통’도 ‘판타지’도 다소 공허하게 그 형태만 잡고 있는 여느 작품들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기술적인 면에서 무척 안정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소 비문과 오타가 발견된다는 점은 퇴고의 영역으로 차치하자면, 글을 쓰는 면에서 훈련이 잘 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빛의 심장, 어둠의 피>는 고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소설로서 기술적인 빈틈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 자명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작품을 향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빛의 심장, 어둠의 피>가 가진 잠재력이 더욱 눈부시게 빛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는 제언입니다. 저는 <빛의 심장, 어둠의 피>에서 관찰되는 아쉬움들을 두 가지로 살펴볼까 합니다.

 

첫째는 발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작품이란 하나의 로그라인을 갖기 마련입니다. 가령 판타지 소설 분야에서 가장 큰 지지를 얻고 있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같은 경우, 그 줄거리를 ‘사우론의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동료들을 모아 여정을 떠나고,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정도로 서술할 수 있겠죠.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당 로그라인으로 발골 할 수 있는 줄거리의 핵심은, 이 작품이 시작되었던 ‘절대반지’라는 소재에 대한 ‘발상’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작품이야 호흡이 늘어질 수도 서사가 거대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작품을 감상했을 때 그것의 뿌리가 되는 ‘발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명징한 스토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의 심장, 어둠의 피>는 독자로서 선뜻 파악하기 힘든 뿌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로그라인을 발췌해보자면, 작가님이 직접 소개에 달아주신 문구로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소개: 저물어가는 왕조 티리엔을 둘러싼 세력 간의 대립과 그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두 마법사의 이야기

 

이 로그라인에서 발췌할 수 있는 발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저물어가는 왕조’라고 대표되는 ‘망국(亡國)’의 현재라고 할 수 있으며, 둘째는 그 한복판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마법사’라는 인물들이 그것이죠.

 

다만 ‘2장’까지 내용이 진행된 현 시점까지 ‘마법사’라는 소재는 중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르네와 친구들이 ‘하이스트’라는 인정받는 교육기관을 거쳐 마법사가 되었다는 시작은 서사에 대한 여러 갈래를 제시하지만, 막상 졸업 여행의 시작부에서 왕궁으로 복귀하는 길을 선택하며, ‘마법사’라는 신분이 줄 수 있는 초월성을 그녀가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왕녀’라는 정체성에 밀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렇다면 전개상 르네가 ‘마법사’라는 정체성으로 기존의 신분질서와 맞서는 듯한 사건들을 준비해야하지만, 물리적인 대사로나마 그녀가 마법사라는 것을 강조할 뿐, 그녀의 행적은 왕궁에서 벌어지는 암투 따위에 희석되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렇다고 왕궁 바깥에서 ‘마법’이 힘을 발휘하지는 않습니다. 작품은 시안을 비롯한 남자 동기들이 위험한 땅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서사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인 르네와 행적 면에서 단절을 유도합니다. 만약 해당 여정에서 그들이 어떤 위험을 겪으며 마법사로서 성장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했다면 ‘마법사’라는 주제에 있어 의미 있는 시작이겠지만, 당장 작품의 시발점에서는, 오로지 르네가 머물고 있는 왕궁의 사정에 신경 쓸 수 있도록 만드는 인물 간의 퇴장에 가까운 역할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경설정 면에서도 ‘마법’이 미치는 효과는 미미합니다. 당장 르네와 시안의 행적이 관찰되는 2장에서도, 마법 그 자체에 대한 인상은 강조하지만, 막상 마법이 어떤 힘으로 사회에서 장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할 뿐입니다. 아예 ‘서민들은 평생 마법사를 보기도 힘들다’는 식으로 벽을 쳐버리니, 마법의 존재감이 흐릿한 것의 개연성은 있을지언정 작품적으로는 설정만 남은 무언가로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즉, 이 작품에서 ‘마법사’는 발상의 축으로서 인상을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축은 ‘마법사’가 아닌 ‘망국(亡國)’의 현실로 판단됩니다. 대신들과 노쇠한 군왕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왕자들과 공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찰, 왕녀의 위치에서 관찰되는 부패된 사회의 면모까지. 흔히 ‘정치’로 대표되는 일련의 장르들을 판타지의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한다면 설명이 되는데, 막상 작품 내에서 보여주는 ‘정치’는 극적인 소재로 정제했다고 보자니 너무 보편적인 빈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서민들을 수탈하고, 군주가 여색을 탐하고, 신하 간의 신뢰가 무너지는 이야기는 표면적인 부패의 면모입니다. 굳이 중세풍 유럽의 환상 속 왕국을 다룰 필요가 없이, 과거 역사책에서 흔히 관찰되는 망국의 전조들을 그대로 따오고 있습니다. 이 보편적이라는 지적은 곧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사건과 마찰들에 복잡한 인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뜻을 같이 하는데, 2장 막바지에 이르러서 왕자의 반란이 예고되는 것 또한 지나치게 감정적인 논리로 벌어지는 탓에 철저하게 설계되어야 마땅한 정치 극으로서는 다소 아쉬움이 드리우는 편입니다.

 

요약하자면, 2장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이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에 대한 컨셉(Concept)이 불분명합니다. ‘망국의 현실을 마주한 마법사’라는 막연한 바탕이야 존재하지만, 망국의 이야기를 다루자니 그 사정과 내막은 다소 상투적인 면이 있고,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자니 그것이 활약할 장이 지나치게 설정 쪽으로만 함몰되어 있습니다. 만약에라도 왕궁과 사회 내에서 마법사라는 존재들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과 차별이 있었다면(마법사들을 상대로 세금을 더 걷는다거나, 징병의 대상이 된다거나) 그것대로 정치적인 사건이 발현될 가능성이 있지만, 작품 그 자체는 왕궁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사정들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기에 준비된 무기를 사용하기 꺼려하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결국 독자로서는 이 작품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마법’을 축으로 놔야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작품이 축으로 잡고 제시하는 ‘권력’과 같은 형태가 불분명한 것들은 독자들에게는 너무 장황한 목적지입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같은 작품에서 힘과 권력을 ‘절대반지’라는 구체적인 매체로 제시했던 것처럼, 이 작품도 발상이라는 시작점을 다듬어본다면 훨씬 개성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둘째는 서사입니다.

 

앞서 이 작품이 글을 쓰는 기술면에서 무척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말로 호평을 남긴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특유의 힘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사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기술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던 장면을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너랑 대화를 나눌 땐 이런 방식이 편하더구나.”

 

카이저는 제단 계단에 그대로 앉았다. 그러면서 옆을 가리키며 르네에게도 똑같이 앉으라고 권했다. 르네는 마지못해 옮겨 앉으며 어색함을 느꼈다. 이 큰 홀에 의자도 많고 자리도 많았건만, 두 사람은 굳이 그 계단 바닥에 주저앉아 넓은 알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르네는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내 너에겐 처음으로 묻는다.”

 

르네는 일부러 눈을 맞추지 않았다. 감정에 호소하려나 싶어 단호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카이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르네를 감정적으로 요동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의 국본(國本)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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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한 장면은 카이저가 르네에게 가장 무거운 고민을 털어놓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이 소설적으로 훌륭하게 조직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카이저’라는 인물에게서 관측되는 ‘왕’과 ‘아버지’라는 양면성에서 비롯됩니다. 이 장면에서 카이저는 ‘제단 계단’에 주저앉으며 스스로 격식을 무너뜨립니다. 그것은 르네를 ‘왕녀’가 아닌 ‘딸’로서 제 얘기를 들어주라 설득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국본’을 정하는 문제는 왕가의 가장 비밀스럽고 무거운 고민이며,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의 신분에 앉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곧 앞으로 ‘카이저’라는 인물의 행적에 따라 서사가 쌓여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줍니다. 망국으로 치닫는 부패한 왕이라는 위치와, 언제든 격을 내려놓고 딸과 마주할 수 있는 늙은 아버지라는 해석이 서사가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죠. 이처럼 ‘소설적 장면’이란 것은 해석을 낳는 서술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사소한 대화와 움직임에서조차 독자들이 무엇을 관찰하고 느끼게 만드는지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님이 인물이 만드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감각이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런 감각이 번뜩이는 장면들이 무척 소수에 가깝다는 것은 아쉬운 점으로 지목됩니다. 사실 작품이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이 소설은 서사에 대한 구축보다, 설명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몇 가지 구절을 발췌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르네의 존재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왕비가 그녀의 삶을 옥좨기 시작한 것이다. 왕비는 사사건건 르네의 트집을 잡아 그녀에게 가혹할 정도로 눈치를 줬다. 르네는 드넓은 궁 안에서 그녀를 두둔해 줄 사람도, 뒷배가 돼줄 세력도 없었기에 언제나 외롭고 위태로운 처지였다.

 

온건파는 기존 원로들의 기득권을 타파하고자 뭉친 민중 기반의 정치세력이었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의 참정권 확대, 권력 구조 개편, 부의 재분배 등을 주장하는 집단이었다.

 

티나가 본 르네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로 태어나 으리으리한 왕궁에서 살다 팔자 좋게 비싼 학교에 들어간 그저 그런 마법사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그녀는 나름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오랜 세월 시본만을 바라봤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본과 형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발췌한 장면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으나, 저는 이 장면들을 일종의 사족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그 역할이 인물의 서사를 주는 것이 아닌, 뒤이어 벌어질 장면과 사건에 대한 사전지식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이 작품에서는 많은 동기와 배경지식들이 외부에서 흘러드는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물론 소설을 쓰는 기술에서 진술이 갖는 영향력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조차도 그것이 소설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런 정보들이, 말 그대로 정보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은 인물에게 집중되는 서사가 아닌, 그 인물에게 달아놓은 부연설명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작품의 많은 장면들에서 이런 정보의 전달에만 치중한 나머지 호흡이 긴 진술로 이어지는 경우가 관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진술이 많다는 것을 넘어, 왜 이런 건조한 정보가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법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떠올려보면, 이 작품은 대부분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인물, 설정, 배경 할 것 없이 작가님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죠. 주인공인 ‘르네’조차도 이런 ‘완성’된 인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왕비와 마찰이 있던 것도, 유능한 마법학교를 졸업한 것도, 왕녀라는 신분 자체를 족쇄로 여기는 가치관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작품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설정되어 있고, 그것은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땅속의 우물처럼 정제된 상태로 흘러갑니다. 외부의 사건이나 마찰이 그녀의 가치관을 흔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녀는 작품 시작과 함께 주어진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는 견고한 인형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보니 3장에 이르러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신분의 차이에 의한 갈등도, 그녀에게 서사로 쌓여져 있던 것이 표출되었다기 보다는, 기존에 완성되어 있던 설정을 상기시켜주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작품은 그녀에게 진동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독자들에게 작중에게 등장하는 인물들과 설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제1의 목표로 자리 잡게 되죠. 진술이 많다는 것은, 말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해야할 정보가 많다는 것과 의미를 같이 합니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서사를 쌓아가며 완성되는 것을 이상적인 인물로 보자면, 이 작품은 이미 서사가 완성된 인물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서사를 쌓는다는 말 자체는 무척 막연한 노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미 완성된 인물에 고민과 갈등을 심는다는 것 자체가 비싼 유리병에 흠집을 내는 듯한 감각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다만 독자로서는 그런 흠집을 채우는 과정을 기대하게 됩니다. 르네라는 인물이 단순히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닌, 그녀가 품고 있는 상처에 살이 돋는 과정을 기대하기도 하죠.

 

이미 이 작품은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이 인물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인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더 비중을 둘 수 있다면 더 매력적인 이야기로 정제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족하게나마 흠집을 잡았지만, <빛의 심장, 어둠의 피>가 능력 있고 의욕적인 작품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특히 대사를 쓰는 감각 면에서는 거의 손 댈 곳이 없을 정도로 느낌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작가님이 극본을 쓰는 데에 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넌지시 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고 실감나는 대사에 비해 소설적인 서술에서 감이 부족한 듯한 인상은, 그런 극본에 대한 감각이 소설로 옮겨지면서 생긴 빈틈이 아닐까 추측해보게 되었죠.

 

어떤 작품이든 단점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주관이라는 편리한 변명 아래 어떤 지적이든 ‘비판’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담긴 그늘이야 잠시 넘겨둔 채, 가장 밝게 돌출되는 부분들을 다듬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것은 세월과 세공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으로 대표되는 원석이 이토록 뚜렷하다는 것은 비판으로도 가릴 수 없는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로서 르네의 이야기가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순간을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멋진 이야기를 창조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5.작은 세상에 갇힌 거인들을 위하여.

 

‘르네 마리’ 혹은 ‘르네 티리엔’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로서 쫓아가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선명합니다.

 

그녀는 일종의 ‘거인’이라는 표현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왕녀’라는 신분은 태생적으로 그녀를 사회의 정점에 올려놨고, ‘하이스트 출신 마법사’라는 신분은 그녀의 노력으로 만든 또 다른 정점으로 대표됩니다. 그녀가 능력 면에서 평범하다는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은 존재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녀에게서 받는 인상은 단순히 ‘동경’이라는 키워드로 함축되지 않습니다.

 

1-Prologue.(P23) “부릴 수만 있다면 정말로 신비롭고 강력한 힘이지만, 그 힘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돼있거든.”

 

‘르네 티리엔’이 ‘마리’라는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는 ‘마법’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작중에서 마법은 힘과 대가의 등가교환으로 묘사됩니다. 인간의 생명과 생리에 직관되는 일부를 떼어주고 받는 ‘자유’의 힘이죠. 하지만 ‘르네’는 그것을 선택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힘이야 태생적인 사정으로 치부하더라도, 그것을 선택하고 싶다는 열망에 작은 머뭇거림도 관찰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능력적으로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폐쇄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도 모습도 가늠할 수 없는 지점에 갇혀 시간을 낭비하곤 하죠. 어쩌면 작중에 등장하는 ‘르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동기는 순수하리만큼 인간적이었습니다. 비록 이상에 가까운 무언가일지라도 누군가는 한 번 쯤은 꿈을 꾸고 길을 떠나게 만드는 힘이 있죠.

 

3-11.(P44) “르네. 난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어. (중간생략)근데 네가 말하는 것만은 차마 도저히 못 하겠다. 이렇게 널 사랑하게 된 것만으로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나더러 그 인간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라고? 미안해. 결국 우리의 운명은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3장에 이르러 르네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마법’으로 얻어낸 자유의 대가로 희생되어야 하는 무언가일지도 모르죠. 그녀에게 자유를 갈망하도록 만든 왕국이라는 환경이 비극을 만들었고, 그 비극을 가장 믿었던 친구의 모습으로 마주합니다. 저는 독자로서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남들이 하지 못 했던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열정이 어떤 보답을 가져다줄지를 기대합니다. 그것으로 그녀는 사랑을 잃을 수도, 환경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그녀는 긍정적인 영향을 부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을 쫓아가다보면 현대 사회에 짓눌려 있는 여느 ‘거인’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빛의 심장, 어둠의 피>의 부족한 감평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공백포함 1991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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