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조각들 공모(비평)

대상작품: 우리 (작가: 권선율, 작품정보)
리뷰어: 나르디즐라, 2시간 전, 조회 11

1.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소설의 이야기는 인물들의 상실을 파편적으로 그립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연극학과였습니다. 과제로 연극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 중 주인공으로 희진이 발탁됩니다. 조잡하다면 조잡한 대본이었으나 이후 희진에게 문자를 받습니다. 연극의 주인공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그 이유를 묻지만 답장은 없습니다. 그렇게 8년 후 지역 상담 센터에서 유진의 이름을 한 희진과 재회하게 되고 어지저찌 사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여름 제주도에서 유진이라는 이름은 사실 희진의 여동생이었으며, 여동생은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후 나는 희진과 헤어지게 됩니다.

나는 당뇨로 사망한 아버지를 보내며 고모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고모는 나에게 물에 빠진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형이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은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상처들만 짚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3.

에픽하이의 당신의 조각들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이 바라본 부모님과 지금의 자신이 바라본 부모님의 차이를 인식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 중 하나가 부모님의 현재에 대한 간극이 있긴 합니다만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유사한 부분이 있어 언급해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무언가의 차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왜 시간의 간극을 넘어야 할까요. 우리는 현재에 만족할 줄 모르고, 미래를 기대하고 상상하지만, 미래는 곧 현재가 됩니다. 그렇게 미래는 상실이 되고 말죠. 그리고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후회합니다. 소설은 그런 후회에 대한 내용인 듯 합니다.

근본적으로 상처의 해갈을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대개의 경우 혼자서 상처를 극복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물들은 서로 가진 상처의 층위와 시점이 다르기에, 상처의 시효는 휘발되며 그저 간직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통보의 가까운 일들로 인해 소통의 부재가 벌어져 상처가 깊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들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자신이 가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대부분의 경우 듣기보단 들어주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기억은 꺼내기엔 고통스러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억을 꺼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시간과, 조금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들어줄 때는 좀 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 일들이 너무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지역 상담 센터에서 일하며, 남의 일들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어 무력감마저 느꼈다고 말이죠. 사실 그 기저엔 희진과의 이별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처로 힘겹기에, 타인의 상처까지 받아들이길 꺼려했던, 일종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4.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죠. 아버지는 제철소의 반장이셨으며, 정년 코앞에 뭔가 사고 이후로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일을 놓지 않으시다가 당뇨에 걸려 사망하게 되죠. 그러면서 고모를 통해 아버지의 상처들이 하나씩 해부되는데요.  어릴적 강가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었던 형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 가수와 사랑에 빠졌고 이에 집안에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일본으로 건너 간다던 가수를 붙잡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고모의 입에서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철소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것도요.

자신의 생명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했다는 부채감. 죽음이라는 게 참 덧없게 온다는 회의감. 그리고 현실의 무게. 그 사이에서 아버지는 아마 제철소의 사고를 수습 하셨을 겁니다. 비록 픽션이지만, 그 간극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어떻게 다가올는지 쉬이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사연이 있을테고 그것은 보편과 타당 속에서 특이함을 가지기에, 공감이 되기보다는 받아 들여야하는 쪽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간은 저마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저마다의 의미란 것은 그래서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합니다.

죽음은 그렇게 양가적인 느낌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묵은 감정의 수의를 자신이 입어야 할 때 쯤이면 무언가 결론이 날테죠. 사실 결론이 나지 않아도 상관 없지 않나 싶긴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보편적인 이야기 외의 돌출된 개인의 무언가는 다 삭아내리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5.

연극이든 소설이든 작품은 결국 삶의 시뮬라시옹입니다. 그리고 시뮬라시옹이기에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의 복제를 복제할 때 그 것은 개인의 무언가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복제되어 개인에게 이해될 때, 그 복제품은 개인의 복제품으로 확장됩니다. 즉 개인의 시뮬라르크는 모든 개인의 시뮬라르크로 확장될 가능성을 품습니다.

권선율 작가님의 「우리」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죽음과 삶 사이의 무언가를 복제한 것들이 층층히 쌓아있는 소설입니다. 유사한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닌 사람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 경험의 복제를 통해서 우리 안의 무언가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소설의 구조를 살펴볼 때도, 파편적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볼 때 이 파편적인 요소들은, 삶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들을 개별적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것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군가의 삶을 복제한 것일 뿐인 소설은, 삶이 단순하지 않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명료화 합니다. 그리고 소설 「우리」는 그것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진동하도록 유도하지요. 어찌보면 무겁고 어찌보면 단순합니다. 삶과 죽음이란 것은 우리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니까요.

사실 그것에 깊은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삶이란 삶이고 개인이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니까요. 그렇지만 너무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지침을 찾고 이정표를 세우니까요.

단순히 그저 그 뿐인, 그것 뿐입니다.

목록
이전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