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끄럽다면 부끄러울 이야기지만 이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이 제가 읽은 이영도 타자님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브릿G에서 접한 몇몇 단편들을 즐겁게 읽었음에도, 심지어 본가 책장에 자리를 마련하느라 시간과 힘을 제법 쓰면서 [눈물을 마시는 새]도 모셔 두었지만 아직 펴 달릴 엄두를 내지 못했거든요. 근데 이번엔 소개를 보니 무척 좋아하는 클로즈드 서클 밀실 살인 추리물 같기도 하고, 단편들로부터 유쾌한 티격태격 말놀음을 보여준 더스번 칼파란 경과 사란디테가 이런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도 궁금해서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
재미있게 휘리릭 읽었다고 하기엔 쪽수 대비 시간을 꽤 썼는데, 여러모로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그 다들 범인이 궁금하긴 한 거야? 수사는 절실한 것 맞아? 하는 생각이 머리 한편을 헤매는 동안,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툭 던져진 상황에서도 일정 정도 이상의 속도로 생각하고 처음 듣는 이름들과 사건을 예로 들거나 곁들여서 말하는 인물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앞뒤 상황을 못 읽은 것 같은데, 싶어 읽다 보면, 아 여기서 그 얘기가 슬쩍 다시 비치는구나 싶은 흐름들, 영 다른 방향과 속도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들과 그걸 기똥찬 모양새로 긁어오는 아까의 그 인물들… 게다가 인물들 별명은 왜 그렇게 많나요… 가볍게나마 인물 안내서를 넣어주신 황금가지 편집자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저 주요 용의자랄 네 사람과 스트레스 가득한 수사관 모두, 아무리 미운 놈 있다 해도 못된 맘 먹고 칼로 찌르고 비틀어 죽일 인물들은 못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보통 이렇게 모여서 기다리거나 불안해 하고 있으면 어디서 엉뚱하게 죽어나가는 게 정석인데! (이쯤 되면서 저도 그러니까 범인이 누구야 생각은 내려놓았던 것 같습니다, 예. 어쩌면 범인은 모르겠고 재미있는 광경이나 계속 봤으면 바랐는지도요…) 필요 이상으로 직업정신 투철한 사서들이 나타나고! 판타지 아니랄까 봐 검열의 괴수가 나타나고! 악몽이 시각화되고, 전쟁이 청각화되고!
이런 군침 도는 설정을 두고 타자님은 어쩌면 조금 외로운 심사를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걸까 싶기도 했고,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기다리는 글이 하염없이 늦거나 뭐가 좀 마음에 안 들거나 어쩌면 무슨 억하심정이 있더라도 귀엽게 웃고 지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글과 작가, 창작과 비평, 원본과 사본, 소장과 배포, 필경사와 사서 등등 글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꺼리가 담겨 있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메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요? 장마다 희곡의 형식으로 공감각적 자극을 주는 것도 아주 깜찍한 환기가 되었어요. (종반부 여러 유명 작품의 이름들을 언급하는 부분도 재미로 빼놓을 수 없네요.) 앞뒤로 재밌지만 길고 어려운 서술들에 치이다가 쉬어가는 효과랄까요… 여러 인물에 허술하고 웃긴 점들을 참 꼼꼼하게 심어두신 것도 즐겁습니다. 막바지 더스번 경과 네롤 사서의 대화에서 이 글은 어디서 온 거냐, 누가 쓴 거냐, 하는 대화를 보는데 어쩌다 그 끝에 닿아 그 글을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있는 저도 괜히 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채 다 이해 못한 농담과 설정이 궁금해 다시 읽고 싶기도 합니다. 그… 왜 어쩌다 아네지 세도웬을 사칭하고, 아네지파 1호 2호가 되었던 걸까요?
하지만 그 전에 [눈물을 마시는 새]를 먼저 집어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