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끝에서 역사의 단면까지 의뢰(감상)

대상작품: 가느다란 바늘이여, 형주가 되어라 (작가: 4CLAMPS, 작품정보)
리뷰어: 영원한밤, 6시간 전, 조회 10

※본 리뷰에서 다룬 본작에 대한 해석은 리뷰어의 주관적 해석이고, 작가님의 공식 해석은 아닙니다.

※작품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는 담지 않았으나, 스포일러 부분을 보면 작품의 재미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브릿G의 운영 방침 중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중단편을 적극 장려한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특정 작가님이 쓰신 완결된 이야기 여러 개를 읽다 보면, 어느 정도 해당 작가님의 작풍이 느껴지고, 그것이 독자로서 취향에 맞으면 그 작가님이 쓰실 차기작에 대해서도 기대를 하게 됩니다.

본작은 유료 작품이지만, 작가님의 그동안 보여주었던 기존 단편들을 봐 온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작가님이 쓰시는 글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런 작가님이 유료 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을 기울였고 그 퀄리티에 있어서도 보증한다는 자신감으로 여겨졌기에 거부감 없이 구매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료준비부터 표현 하나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이셨을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읽는 입장에서는 재밌게 읽었고, 쓰는 입장에서는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

그런 작품에 대해서 작가님으로부터 직접 리뷰 의뢰를 받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받아보는 리뷰 의뢰에 부디 제 감상이 작가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리뷰가 공개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제 나름대로의 감상을 적어봅니다.


1. 유명 소설의 끝에서 시작하는 역사적 사실의 비틀기

작품의 미리보기에서는 죽음에서 돌아와 기괴하게 움직이는 누군가를 묘사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품의 소개에서는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 법한 유명한 소설의 명대사가 적혀 있습니다. 본작은 이처럼 유명한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시작합니다.

작품의 시작이 유명 소설에 대한 오마주였다면, 작품의 끝은 동아시아 역사를 뒤흔든 실제 사건으로 닻을 내립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마주한 비밀은 마지막에 기사 한 줄로 스며들어, 역사책이 말하지 못한 틈새가 사실은 이렇게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본작은 그렇게 현실의 바깥 픽션에서 시작해서, 현실의 한복판에 도달합니다. 원본 문학에서 출발한 비극이 제국의 지하를 돌아 다시 역사적 폭발로 이어지는 이 여정은,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실은 얇은 막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 소설은 역사에 닿기 위해 쓰이고, 역사는 소설이 비춘 틈새를 통해 다시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작은 역사소설의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 이면의 서사를 제시하는 팩션의 모습으로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2. 제국의 실험실 – 가느다란 바늘의 주인들

작품은 읽는 편의를 위해 1부터 10까지 챕터를 구분해놓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강렬한 인트로의 1챕터가 끝나고 2 챕터부터 본격적으로 주인공인 나가이 마사루가 등장하면서, 좀비 서사로 시작한 역사소설은 ‘제국의 전쟁 범죄 서사’를 꺼내듭니다.

감염체, 사후 운동성과 같은 표면적으로는 장르적 장치처럼 보이는 이 키워드들이, 본작에서는 깔끔하게 “제국주의 생체 실험”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에 꽂혀 있습니다. 괴물이 무서운 게 아니라, 괴물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집니다.

 

제가 본작의 매력으로 느끼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제국주의 시대, 생체실험을 그리면서 “악한 일본군 vs 피해자 조선인”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물론 권력의 축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별 인물들의 위치는 훨씬 복잡하고 흐릿합니다.

 


3. 바늘과 형주 – 심판, 혹은 끝나지 않는 복수

실험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제국 지하병동의 실험실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제국의 전쟁 기계는 더 큰 전쟁을 향해, 더 넓은 땅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독자는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마사루가 설계하고, 엔도가 탐냈고, 제국이 승인한 그 바늘 하나하나는, 언젠가 제국 전체를 구속하게 될 형틀의 일부입니다.

 


좀비, 감염, 실험, 식민지 조선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실험체 좀비가 아니라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바늘과 형틀이라는 이미지가 남기는 여운이 제법 길었습니다.

 

아래의 스포일러 숏코드는 각 챕터별로 제목이 있다면? 하고 생각해본 것입니다.

감상에 도움이 될까해서 첨부해봅니다.

 

작품을 즐겁게 본 입장에서,

본작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는 본 리뷰가 작품의 흥미를 유발하였길 바랍니다.

작가님과 본 작품을 읽은 분들에게는 공감을 주는 리뷰였길 바랍니다.

 

즐겁게 잘 봤습니다! :g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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