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서 다룬 본작에 대한 해석은 리뷰어의 주관적 해석이고, 작가님의 공식 해석은 아닙니다.
※작품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는 담지 않았으나, 스포일러 부분을 보면 작품의 재미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브릿G의 운영 방침 중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중단편을 적극 장려한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특정 작가님이 쓰신 완결된 이야기 여러 개를 읽다 보면, 어느 정도 해당 작가님의 작풍이 느껴지고, 그것이 독자로서 취향에 맞으면 그 작가님이 쓰실 차기작에 대해서도 기대를 하게 됩니다.
본작은 유료 작품이지만, 작가님의 그동안 보여주었던 기존 단편들을 봐 온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작가님이 쓰시는 글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런 작가님이 유료 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을 기울였고 그 퀄리티에 있어서도 보증한다는 자신감으로 여겨졌기에 거부감 없이 구매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료준비부터 표현 하나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이셨을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읽는 입장에서는 재밌게 읽었고, 쓰는 입장에서는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
그런 작품에 대해서 작가님으로부터 직접 리뷰 의뢰를 받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받아보는 리뷰 의뢰에 부디 제 감상이 작가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리뷰가 공개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제 나름대로의 감상을 적어봅니다.
1. 유명 소설의 끝에서 시작하는 역사적 사실의 비틀기
작품의 미리보기에서는 죽음에서 돌아와 기괴하게 움직이는 누군가를 묘사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품의 소개에서는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 법한 유명한 소설의 명대사가 적혀 있습니다. 본작은 이처럼 유명한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시작합니다.
본작의 배경은 일제강점기입니다. 본작은 ‘운수좋은 날’의 마지막 장면을 오마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운은 좋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던 그, 김첨지가 집에 돌아오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유명 작품의 비극에서 바로 이어지는 죽은 아내의 기이한 운동성은 단순한 공포 장면이 아니라 제국주의 생체실험 서사의 문을 여는 장치입니다. 불쌍한 인력거꾼의 비극이었던 장면이, 본작에서는 무언가 잘못된 것의 첫 목격자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김첨지의 고통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첫 실험 피해자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습니다. 김첨지 부부의 이야기는 제국의 실험실이 어떻게 주변부의 가난한 이들을 집어삼켜 들어가는지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로 다시 쓰였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움직인다’는 익숙한 좀비 서사 클리셰로 시작하지만, 작품은 그 이야기를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 가져와 배치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괴물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다시 기어 나오게 만든 손, 그 손에 들린 가는 바늘, 그 바늘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더 중요합니다.
작품의 시작이 유명 소설에 대한 오마주였다면, 작품의 끝은 동아시아 역사를 뒤흔든 실제 사건으로 닻을 내립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마주한 비밀은 마지막에 기사 한 줄로 스며들어, 역사책이 말하지 못한 틈새가 사실은 이렇게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본작은 그렇게 현실의 바깥 픽션에서 시작해서, 현실의 한복판에 도달합니다. 원본 문학에서 출발한 비극이 제국의 지하를 돌아 다시 역사적 폭발로 이어지는 이 여정은,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실은 얇은 막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 소설은 역사에 닿기 위해 쓰이고, 역사는 소설이 비춘 틈새를 통해 다시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작은 역사소설의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 이면의 서사를 제시하는 팩션의 모습으로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2. 제국의 실험실 – 가느다란 바늘의 주인들
작품은 읽는 편의를 위해 1부터 10까지 챕터를 구분해놓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강렬한 인트로의 1챕터가 끝나고 2 챕터부터 본격적으로 주인공인 나가이 마사루가 등장하면서, 좀비 서사로 시작한 역사소설은 ‘제국의 전쟁 범죄 서사’를 꺼내듭니다.
이야기의 심장은 군인병원 지하, 아무도 모르는 실험동에 있습니다. 지하 실험실에는 죽지도, 완전히 썩지도 않은 채 결박된 실험체들이 줄지어 구속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김첨지의 아내 같은 외부 감염체도 있고, 감염체의 젖을 통해 감염된 유아도 있습니다. 마사루는 감염체의 공포/회피 회로와 숙주의 전전두엽 기능이 어떻게 동기화되고, 어떻게 마비되는지를 분석하며, 그 변이체를 개발중인 약물 핵심 재료로 사용하기로 합니다.
감염체, 사후 운동성과 같은 표면적으로는 장르적 장치처럼 보이는 이 키워드들이, 본작에서는 깔끔하게 “제국주의 생체 실험”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에 꽂혀 있습니다. 괴물이 무서운 게 아니라, 괴물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집니다.
제가 본작의 매력으로 느끼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제국주의 시대, 생체실험을 그리면서 “악한 일본군 vs 피해자 조선인”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물론 권력의 축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별 인물들의 위치는 훨씬 복잡하고 흐릿합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인물을 꼽자면 마사루, 엔도, 미치코, 에구치 4명으로 추릴 수 있겠습니다.
마사루는 분명 가해자입니다. 조선인 실험체를 대상으로 약물을 투여하고, 사후 운동성을 기록하며, 유아에게까지 실험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슬픈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감당한다고 믿으려 하지만, 죄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그는 제국의 손이 되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손에 잡힌 사람이기도 합니다.
엔도는 순수하게 야망형 과학자입니다. 마사루의 사생활을 알고 조언도 하지만, 마사루의 실험을 엿보고 그의 실험 결과는 탐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선수치는 것은 경계합니다. 그에게 실험은 데이터이고, 출세의 수단입니다. 그는 구조에 순응하면서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냈지만, 그 욕망의 끝에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있지 않았습니다.
미치코는 생존을 위해 과감하게 선택할 줄 아는 여성입니다. 에구치와의 관계, 나가이 마사루와의 관계, 그리고 총독부라는 권력 구조 사이에서, 안전한 위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 합니다.
에구치는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을 보여줍니다. 미치코의 스폰서로서 그녀를 소유물처럼 대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만 그는 그 행위를 무사히 덮어줄 권력적 보호막을 갖고 있고, 군부의 실험에 한 축으로도 엮여 있습니다. 그는 사적 폭력과 국가 폭력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를 체험하게 해주는 인물입니다. 특히나 그 시절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에구치의 폭력은 개인의 심리나 성향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식민지 폭력 구조의 톱니바퀴이자, 국가적 폭력이 일상에 스며들어 만들어낸 폭력을 권리화한 그 자체입니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입니다. 구조적 폭력 안에서 붕괴되어 갑니다. 마사루의 죄책감도, 엔도의 야망도, 미치코의 허영도, 붕괴를 향합니다. 작품은 절대적 권력을 가질 것 같은 에구치의 폭력조차도 끝내는 제국의 폭주와 함께 비극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3. 바늘과 형주 – 심판, 혹은 끝나지 않는 복수
실험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제국 지하병동의 실험실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제국의 전쟁 기계는 더 큰 전쟁을 향해, 더 넓은 땅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독자는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마사루가 설계하고, 엔도가 탐냈고, 제국이 승인한 그 바늘 하나하나는, 언젠가 제국 전체를 구속하게 될 형틀의 일부입니다.
가느다란 바늘은 주삿바늘입니다. 감염체의 혈액을 채취하고, 변이체를 주입하고, 실험체의 몸에 약을 밀어 넣는 도구입니다. 형주(刑柱)는 형틀, 처벌을 내리는 말뚝입니다. 누군가를 묶어두고, 매달고, 고정시키는 기둥입니다. 제목은 이 둘을 한 문장 안에 포개 버립니다.
본작은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의 바늘들이, 지금도 여전히 형주를 세우고 있는 중이라는 불편한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복수는 주인을 잃었지만 이미 바늘은 제국의 혈관에 들어갔습니다. 그 구체적인 결과가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역사적 실제 사건입니다.
형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제국이지만 그 형주를 세우는 데 조선의 피가 쓰였다는 사실만이 남습니다.
좀비, 감염, 실험, 식민지 조선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실험체 좀비가 아니라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바늘과 형틀이라는 이미지가 남기는 여운이 제법 길었습니다.
아래의 스포일러 숏코드는 각 챕터별로 제목이 있다면? 하고 생각해본 것입니다.
감상에 도움이 될까해서 첨부해봅니다.
1. ‘운수 좋은 날’의 문 뒤에서 깨어나는 것들
2. 김첨지가 도달한 제국의 뒷문
3. 마사루의 지하 실험실: 제국이 탄생시키는 괴물들
4. 공모와 침묵 사이: 엔도와 마사루
5. ‘황군의 영광’을 위하여
6. 미치코 생존기 : 살아남기 위해서
7. 실험, 그 비밀과 욕망
8. 설렁탕의 역전: 비극을 조롱하는 실험실
9. 괴물의 탄생, 인간은 붕괴하는가
10. 제국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는 형주
작품을 즐겁게 본 입장에서,
본작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는 본 리뷰가 작품의 흥미를 유발하였길 바랍니다.
작가님과 본 작품을 읽은 분들에게는 공감을 주는 리뷰였길 바랍니다.
즐겁게 잘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