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는 건 왜 이렇게 가볍고 날카롭고 빠르고 무성의해 보일까요? 대면했을 때만 생기는 유대감이나 신뢰감 같은 것도 분명 있지만, 말만 두고 보면 이 흔적도 남지 않는 투명한 결과는 그 진의를 의심받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너무 어렵지 않나요? 무엇이든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다다르긴 어렵다고 해도 말은 그냥 그 자체로 고려할 게 너무 많잖아요. 때와 장소와 상대에게 맞는 적절한 빠르기, 높낮이, 크기는 물론이고 시선이나 표정, 손동작, 자세도 말을 전달할 때 영향을 끼칩니다. 거기다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주변 환경은 또 어떻고요? 그러니 성의는 좀 없어 보여도 상대의 시간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제가 숙고해서 답할 수 있도록 말 대신 문자나 카톡을 사용하는 건, 두 글자로 줄이자면 제 변명입니다.
그래도 자길 죽인 사람이 누군지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보다야 훨씬 짧죠!
설마 이런 판타지 추리물을 읽고 제 대인관계를 되돌아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판타지여도 사람 사는 곳이니 어떤 점은 현실과 닮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도, 등장인물은 대부분 귀족이고 피살자는 한창 승승장구하던 유명 작가인데 저랑 무슨 연관이 있겠냐 싶었죠. 불이 켜지지 않는 방에 앉아 남이 보지 않을 때만 글을 쓰는 장치 같아진 어스탐 경은 특히나 더 그랬습니다.
자기 장례식에 누가 올지 상상한 적 있으신가요? 죽을 때 곁에 누가 있을지는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걸 알아도 그 대답을 영원히 피하고만 싶어집니다. 재주가 좋은 사람이야 사후 세계에서 근엄하게 열릴 심판이 필요하겠지만, 저한테는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쳐서 숨이 막혀요.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기회는 점점 줄기까지 하는 게, 이게 좀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니 어스탐 경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요?
어스탐 경에 관해 어떤 말을 해도 자기 합리화처럼 느껴져서 좀 괴롭지만, 그래도 같이 와 준 가족과 환대해 준 부부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야지아 사람이 새터네이 단검을 준비할 때처럼 깊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공기만 울리다 흩어질 한마디 말로는 부족해서 자기가 제일 잘 하는 분야로 4년이라는 시간을 쏟은 거죠. 문제는 그러느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초대받은 별장에 계속 머물러 원망을 추가로 사고 여러 사람과 존재의 정신에 큰 상해를 입혔단 거고, 이러니 사람 됨됨이가 아니라 글로 사랑받으려 했구나 싶어서 자꾸만 씁쓸해집니다.
이럴 수 없는 것 이전에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은 사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던지고 떠난 어스탐 경이 그들의 반응을 보지 못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만 드니 저도 갈 길이 먼 것 같네요.
읽을 때는 마지막까지 깔깔 웃었으나 곱씹으니 아찔해지는 맛이 연말에 읽기 딱 좋았습니다! 앞으로는 좀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해 주는 작품이었어요. 부디 내년 연말에는 제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