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의 진실 감상

대상작품: 공작단풍 (작가: 오메르타, 작품정보)
리뷰어: cedrus, 4시간 전, 조회 12

3을 앞둔 설 명절, 세란은 부모님의 정육점에서 일을 돕다가 골절기에 엄지 끝이 잘리는 사고를 겪는다. 병원으로 옮겨져 무사히 수술을 받았지만 세란은 의사인 승록과 기묘한 관계를 이어간다. 간질간질한 감정이 싹트는 사이 잘린 손가락과 함께 핏빛으로 물든 비밀이 세란에게 가까워져 온다. 글의 중심에 놓인 공작단풍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세란은 승록과 병원의 비밀을 밝혀가는 도중 병원 뒤편의 붉은 단풍나무를 발견한다. 발목이 잘린 무당은 저 나무를 베어내지 않는 한 환자들의 상처가 낫지 않을 것이라는데. 그러나 사건의 순서를 따져보면 의문이 생긴다. 공작단풍이 병원 주차장에 옮겨진 것은 작년 가을의 일로, 환자들의 접합 수술이 실패하기 시작한 최근 한 달과는 반 년도 훌쩍 넘는 시간차가 있다. 홍단농원에서 굿을 하다 무당이 크게 다쳤다는 박 부장의 말을 떠올리면 농원에서 본 것과 같은 나무를 발견하고 무당이 놀란 것도 이상하진 않다. 정확한 사연을 알지 못하더라도 공작단풍이 불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단풍이 현 상황의 진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나무를 베어낸다고 정말 문제가 사라질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붉게 물든 공작단풍은 사태의 표상에 불과하다. 화려하면서도 음산한 인상으로 인해 공작단풍은 보는 이의 눈을 한순간에 사로잡는다. 동시에 공작단풍 외의 것들을 시야에서 지워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스스로 믿고 싶은 것만을 취사하는 양상은 무당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관찰된다. 주인공인 세란만 봐도 그렇다. 세란은 승록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에 기뻐하며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 외의 일은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고도 자신에게만 특별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라 철석같이 믿지 않았던가. 박 부장에 의해 승록의 비밀이 드러나고 승록이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세란은 그의 행동을 좋게 받아들이려 애쓴다.

승록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돈다는 걸 그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두 번 일어난 소동도 아니고 몇 달이나 지속적으로 귀신을 목격했단 말이 나왔다. 귀신에 대한 소문과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솔리하의 모습에는 정말 아무런 이상이 없었을까. 시간이 한참 흐르고 솔리하의 상태가 달라진 뒤에도 승록은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접합수술 실력과 관련된 부분도 그렇다. 세란이 자라면서 몇 번이고 보았던 골절기조차 다루기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수지접합 수술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과정이었을까. 여기에 수간호사의 증언을 더하면 승록의 원래 실력은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 승록의 수술 실력이 하루아침에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때, 그리고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한 일은 눈앞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수술이 잘되면 아무래도 좋으니 넘어가고, 수술이 실패해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되는 상황에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보다 다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주어진 상황을 유리하게 활용하며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다가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자 스스로를 속여가며 애써 두려움을 억눌렀다.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외면한 끝에 진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그 상태로 천천히 위험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세란의 주변인이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잘렸던 손가락이나 승록과의 관계에만 매달린 결과 세란은 어느새 집과 학교로부터 동떨어져 나왔다. 불편한 진실을 거부해 왔기 때문에 자연히 주변과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심리적 고립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처한 것이다. 발밑이 극도로 좁아진 마당에 세란이 믿던 진실이 무너지자 그 충격은 훨씬 더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비현실의 침입으로 인해 세란과 승록을 둘러싼 현실은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끝내 일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만다.

솔리하가 겪은 일을 재구성해 보면 그 역시 왜곡된 인지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란이 손가락을 다쳐서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받은 직후 부모님은 바쁜 가게 일로 인해 세란의 곁에 있지 못했다. 승록은 취약한 상태의 학생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유사한 일이 솔리하에게도 일어났을 것이다. 그가 겉으로 보여준 호의에 솔리하가 의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솔리하는 국제 결혼 이후 여권을 빼앗긴 데다 체류 자격이나 보험마저 없었고,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접합 수술과는 별개로 솔리하가 승록과의 관계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승록과 세란을 향한 분노로 이어졌을 공산이 크다.

이후로도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원하는 사실을 채택해 자기만의 진실을 만들었다. 박 부장이 솔리하의 죽음에 얽힌 비밀 상당 부분을 밝혀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승록을 협박할 빌미를 마련하고 싶었을 뿐, 솔리하를 위해 진상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박 부장이 알아낸 진실은 필요에 의해 선별되었으며 불충분하다.

불완전한 정보와 왜곡된 믿음이 상충하며 있을 수 없는 일이 마구 자라나기 시작한다. 수술 실력이 몰라보게 발전하는가 하면 발목이 없는 여자가 병원을 배회하고, 불과 한 달 전까지 병원을 찾던 인물이 네 달 전에 이미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공작단풍이란 모티브를 떠올려보자. 공작단풍의 가지를 일반 단풍나무의 뿌리에 접목시켰을 때, 언제부터 단풍나무는 공작단풍으로 여겨질까. 공작단풍과 단풍의 경계는 어떻게 허물어지기 시작할까. 같은 질문이 세란과 승록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이 경험한 것 가운데 비현실이 뒤섞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작년 가을부터 한여름을 지난 현재까지의 시간이 있을 수 없는 일로 점철되어 있다면 세란에게는 중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완벽한 수술이 솔리하의 영향이었다면, 그리고 솔리하가 떠나 다른 접합 수술들이 전부 실패하고 있다면, 세란의 손가락은 어떻게 붙어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분명 세란의 것이었고 잠시 떨어져 나간 신체 일부였다. 그런데 비현실적인 힘에 의해 손가락이 세란의 몸에 달라붙게 되었다면 비현실은 세란의 현실에 얼마나 깊이 침입한 것일까? 손 끝에 달린 이것이 지금도 여전히 세란의 손가락이기만 한 걸까?

접합 부위가 붉게 변하는 마지막 장면은 재차 공작단풍을 접목한 나무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변화는 진작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변화의 방향을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 세란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 미지의 공포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두려움을 투영해 세란의 손가락에 찾아올 변화를 상상하게 된다. 그렇게 『공작단풍』의 진실은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지만 붉고 섬뜩한 이미지와 함께 독자의 마음에 고유한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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