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기괴한 장르나 묘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최대한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따뜻한 이야기가 취향이다(…) 처음에는 작가님이 육아스트레스가 극심하셨나(…)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작가님이 ‘이건 주식 이야기’ 그것도 ‘ㄱㄱㅈ’, 개잡주이면서 교잡종 이야기라고 하시니 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우화’다. 주식투자에 대한.
기괴한 장르는 좋아하지 않아도 우화라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나는 상징적으로 숨겨둔 것들이나 우화로 표현된 것들은 매우 좋아한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체에 쳐서 그 안에 있던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너무 재밌다(…)
처음에 아기는 작고 볼품없었다. 눈도 못 뜨고, 팔은 이상하고, 다리는 쪼그라들었다. 성장하지도 않는다. 누가 봐도 버려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계미는 말한다. 예뻐. 아름다워. 이 문장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이 소설은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믿기로 결심한 인간의 이야기이며, 그 믿음이 어떻게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물병자리군.”
“네?”
“이 모양을 봐. 별 모양을 닮았지.”
“별자리. 12개의 별로 된. 푸른 색을 상징하는 제11궁. 좋은 징조야. 제12궁이 무슨 자리인 줄 알아?”
“그러니까 물병자리는 대어 직전에 출현하는 전조인 거야. 행운이 머지 않았어.”
기광은 계미의 아기=기대주인 척 하는 개잡주에 현혹되어 계미의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 별자리 이야기를 들먹인다.
가장 미신이 판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바로 가장 현실적인 숫자로만 돌아가는, 증권시장이다.
작가님은 아기를 ‘개잡주’에 빗댄다고 밝혔다. 그 순간 소설은 전혀 다른 독법을 요청한다. ‘계미’의 기괴한 집착은 ‘개미’투자자의 집착이 되고, 발진 난 손은 손실 난 계좌가 되며, 긁고 또 긁는 강박은 매일 주가를 새로고침하는 손가락이 된다.
그러나 단순한 알레고리로 소설을 보면 절반밖에 읽지 못한다. 이 소설이 진짜로 묻는 것은 더 깊은 곳에 있다. 개잡주에 물린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알면서 개잡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고른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기광은 마지막에 절규한다. 교잡종이라고. 순혈이 아니라고. 그 타락한 피의 반의 반절도 잇지 못했다고. 이것은 펀더멘탈의 언어다. 기초가 없고, 기원이 불순하고, 실체가 없다는 말. 냉정한 분석가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런데 계미는 흔들리지 않는다.
“속았다고 믿는 사람은 속게 됩니다. 우리는 아기의 태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는 것입니다.“
교잡종임을 알고도 믿는 것과, 교잡종인줄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는 것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기광은 후자다. 아기를 보여준 날 모든 것을 잃었다고 통곡하는 그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보고 나서 빠져든 자다.
이건 인내심 싸움이다. 그러나 내가 결국 지리라는 걸 안다.
계미는 전자에 가깝다. 아기의 추함을 처음부터 직면했으면서도, 아니 어쩌면 그 추함 때문에, 더 간절히 붙잡는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한 번만.
(물타기 그만하세요ㅠㅠ)
개잡주가 된 교잡종인지 교잡종이 될 줄 몰랐던 개잡주인지, 이 질문은 결국 인지부조화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기광은 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믿음으로 도피하지 못했고, 계미는 현실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전진한다. 둘 다 파멸하지만, 파멸의 결은 다르다. 아니, 계미는 파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는 에로그로테스크의 형식을 입어야 했는가. 이것은 작가의 취향적 선택 문제가 아니라 주제표현을 위한 필연의 문제다.
개미투자자의 인지부조화를 그리는 데 있어 사실주의적 서술은 본질적으로 재미가 없다. 그건 그냥 다큐멘타리다. 숫자와 손익계산서로는 계미의 내면에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잡주에 물린 자의 심리는 이성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손실을 확인하는 강박은 손가락 끝의 찌릿한 쾌락으로 나타나고, 매몰비용에 대한 집착은 긁고 또 긁어도 해소되지 않는 가려움으로 표현된다.
인지부조화란 결국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상태다. 머리는 이것이 잘못됐다고 알고 있지만 몸은 멈추지 못한다. 이 분열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지성이 아니라 감각에 직접 닿는 형식이 필요했다. 거기다가 ‘잘못된 것’을 ‘찬양’하는 태도. 에로그로테스크는 바로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형식이다.
에로그로테스크는 본질적으로 교잡종의 미학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쾌락과 고통, 관능과 혐오가 섞이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장르. 불순한 혼합만이 에로그로테스크를 가능하게 한다. 즉 순수한 아름다움, 순수한 혐오는 에로그로테스크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교잡종이라는 사실은 아기의 결함이 아니라 이 장르의 존재 조건이며, 동시에 이 소설이 에로그로테스크여야 하는 이유와 정확히 포개진다. 숭배의 대상이 교잡종이고, 숭배의 형식이 에로그로테스크라면, 소설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의 논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개잡주(교잡종)를 숭배하는 개미(계미)투자자의 인지부조화를 그리는 데 있어 에로그로테스크는 장르적 선택이 아니라 유일하게 정직한 표현법이다.
계미의 긁기는 가장 선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긁는 행위는 고통이지만 쾌락이고, 자해이지만 관능이며, 멈춰야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첼리스트처럼 연주한다’는 비유는 이 행위를 황홀경과 등치시키고, ‘입맞춤만 하고 떠나는 부군처럼’이라는 비유는 성적 안달감과 직접 연결한다. 주가를 새로고침하는 손가락이 이 긁는 손가락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에로그로테스크의 언어는 감각으로 전달한다. 독자는 계미의 집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도록 강요받는다.
기광과 도살자를 향한 계미의 시선도 같은 구조 안에 있다. 기광의 차가운 눈, 도살자(아마도 자산운용사…?)의 좁고 꽉 찬 엉덩이, 상대의 경멸과 혐오(이걸 자산이라고 절 불렀어요?)가 오히려 계미의 욕망을 고조시킨다. 그로테스크한 상황(시신이 있는 집, 냄새 나는 방, 수색당하는 처지)속에서 에로티시즘은 꺾이지 않고 강해진다. 이것은 개잡주 투자자의 심리와 동형이다. 주가가 떨어질수록 확신이 강해지고, 손실이 커질수록 물타기의 욕망이 커진다. 현실의 악화가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강화하는 역설. 에로그로테스크는 이 역설을 이성으로 설명하는 대신 신체로 체험하게 만든다.
계미의 손은 이 소설의 가장 집요한 이미지다. 긁히고 발진이 오르고 갈라지고 진물이 나는 손. 그 손은 매몰비용의 신체적 증거다. 이미 너무 많이 잃어버린 자의 흔적. 그런데 결말에서 그 손에 수정 얼음이 쥐어지고(이쯤되면 상장폐지 거래중지 아닌가), 보라색 피부와 진물이 ‘위대한 생기’와 ‘끈적한 축복’으로 재명명된다. 손실의 흔적이 신성의 증표로 뒤집히는 이 전도가 소설 전체의 귀결이다. 개잡주에 물린 손이 예언자의 손이 되는 것. 추함의 숭배가 완성되는 순간.
계미 자신도 교잡종적 존재다. 그녀는 ‘여신의 얼굴’과 ‘오욕의 손’을 동시에 지닌다.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가 한 몸에 공존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에로그로테스크한 존재는 아기가 아니라 계미 자신이다. 그녀가 아기에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교잡종성— 부조화 —을 아기— 개잡주 —에게서 알아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기 역시 같은 논리 위에서 완성된다. 금박지에 싸여 붉은 실로 묶인 채 박제된 아기는, 살아있었다면 성장하고 변하고 죽었을 존재가 시간을 벗어난 신격이 된 것이다. 교잡종이 박제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영구화된다. 불완전함이 고정됨으로써 완전해지는 이 역설은 에로그로테스크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추한 것은 살아있을 때는 추하지만, 숭배될 때는 성스럽다. 개잡주는 상장폐지되는 순간까지 개잡주이지만, 신화로 만드는 순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가 된다.
계미를 미쳤다고 단정하는 순간, 독자는 자신이 한 번도 개잡주를 쥐어본 적 없는 사람인 척하게 된다. 그러나 손실을 의미로 바꾸려는 충동, 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욕망, 교잡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기로 하는 선택. 이것들은 계미만의 것도, 주식투자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절박한 상태에서 믿음이 필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하는 사건이다.
“아파트 11층이니까 그건 그렇군요.”
(뭔지 모르겠지만 11층에 물리셨구나…)
이 소설은 단순히 개잡주에 물린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린 것을 알면서도 손을 빼지 않기로 한 자가, 그 집착을 신화로 만들어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정을 에로그로테스크로 쓴 것은, 인지부조화란 결국 이성이 아니라 신체의 문제이며 그 ‘부조화’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언어임을 작가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