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문론 작가님은 본인이 쓴 모든 소설에 등장인물을 A, B, C라는 이니셜로만 제시한다. 이니셜 뒤에 숨은 익명성은 익명성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A가 될 수 있고, 누구나 B가 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시골 마을에 사는 A는 서울에서 전학 온 B를 질투한다. B의 긴 머리, 화장품 냄새, 여학생들의 인기, 그 모든 것이 짧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A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자극이다. 특히 A의 유일한 친구였던 C가 B와 친해지면서 A의 질투는 극에 달한다.
B가 결석한 C에게 가정통신문을 전해주러 가는 날, A는 폐광에 가보고 싶어하는 B에게 ‘폐광이니까 당연히 닫혔지’ 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래도 닫히지 않은 입구가 있을지도 몰라’ 라는 말로 유인한다. ‘C를 만나게 두고 싶지 않다’는 충동적인 감정에서였다. 폐광에서 B가 추락 사고를 당하고, A는 B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놀라서 줄을 놓쳐버린다. 어쩌면 우발적 사고였는지, 의도된 살인이었는지 모호한 그 순간, B는 죽는다.
그런데 작가는 독자에게 섬뜩한 의문들을 남긴다. 왜 폐광은 열려 있었을까? 왜 풀숲에는 마침 칼이 놓여 있었을까? 왜 누군가 드나들었던 것 같이 되어 있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C는 왜 사라진 B에 대해 물으면서 마치 죽은 사람을 찾는 것처럼 말했을까?
“요즘엔 수십 년 전에 흘린 피 한 방울만 있어도 살인마를 잡는다”는 C의 말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의 암시처럼 들린다. C는 어쩌면 A로 인해 B가 죽은 것을 알았던 걸까? 아니면, 더 소름 끼치게도, C가 풀숲에 칼을 가져다 놓은 것일까? B는 정말 혼자서 줄을 붙들고 있었을까?
작가는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 애매함들이 소설의 진짜 공포를 만들어낸다. 만약 C가 A의 질투를 알고 있었다면? 만약 폐광으로 가는 길을 미리 준비해둔 사람이 있었다면? 만약 떨어진 B가 올라올 때 다른’것’이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면?
작가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한 사람의 악의나 거짓말이 아니라, 악의가 서로 얽히고 증폭되는 구조다. A의 질투는 명백하다. 하지만 C는 어떤가? C는 정말 순진한 피해자일 뿐일까?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C의 역할은 의심스럽다. C는 A와 가장 친했으면서도 쉽게 B와 친해졌다. C가 결석한 날, 하필이면 A가 가정통신문을 전해주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B가 사라진 후, C는 ‘빨리 찾아야 할 텐데’라고 말하면서도 이미 죽은 사람을 찾는 것처럼, 법의학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은 단순한 질투나 살인이 아니라,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불러일으킨 집단적 악의일지도 모른다. C는 A의 질투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A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B는 자신이 불러일으킨 질투의 크기를 몰랐다. 누가 가장 나쁠까? 사실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악의는 이유없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라나고 증식하고 전염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을 A, B, C로 지칭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보편화할 뿐 아니라, 그들의 역할을 유동적으로 만든다. 처음에는 A가 가해자이고 B가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B도 무의식적으로 A를 괴롭혔고, C는 어쩌면 가장 교묘한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니셜은 또한 독자가 누구의 편도 들 수 없게 만든다.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이 없기에, 우리는 A를 단순히 악인으로 규정할 수도, B를 순수한 피해자로 동정할 수도, C를 무고한 방관자로 믿을 수도 없다.
이 소설의 진짜 공포는 우리가 진실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A의 시점으로 서술되었지만, A조차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폐광이 왜 열려 있었는지, 칼이 왜 거기 있었는지, C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작가는 끝내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문장이 모든 것을 암시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A는 무엇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C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 자신의 죄를 고백할 준비? 아니면, C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
때문에 [악의의 거짓말]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A가 주변 사람들에게 한 거짓말, A가 자신에게 한 거짓말, 그리고 ‘어쩌면’ C가 A에게 한 거짓말까지. 우리는 우리 안의 A를, C를, 그리고 어쩌면 B까지도 얼마나 직시하고 있을까? 그리고 가장 무서운 질문, 우리는 누군가의 악의에 무심코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만 이 소설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남긴 모호함이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많아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 위험이 있다. C의 역할, 폐광의 상태, 칼의 출처 등 너무 많은 의문들이 명확한 해답 없이 마무리 지어진다.
물론 이것이 작가의 의도나 문체적 취향일 수 있다.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 자체, 익명성이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모호함이 깊이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불친절함으로 느껴질 위험도 있다. 특히 C와 관련된 암시들은 너무 애매해서, (나처럼) 독자가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아예 놓쳐버릴 수 있다.
또한 이니셜 익명화 기법이 주는 보편성의 효과는 분명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에 대한 감정 이입을 어렵게 만든다. A, B, C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도 아니다. 이런 경우 독자는 심리적 안전거리 유지를 위해 자연스럽게 관찰자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는 오히려 소설의 감정적 몰입을 약화시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 일 아님 ㅇㅇ’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평범한 일상 속에 도사린 악의를, 그리고 그 악의가 얼마나 쉽게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