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은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습니다.” – prologue 1
빛이 심장이고 어둠이 피라면, 빛은 어둠을 만들어내는 걸까요. 심장이 피를 순환시키듯 빛이 어둠을 순환시키는 걸까요.
왜, 그리고 무엇이 그리 상반된 인과를 내놓은 걸까요.
마이너감성 작가님의 <빛의 심장, 어둠의 피>는 로그라인에 따르면 저물어가는 티리엔을 둘러싼 티리엔을 둘러싼 세력 간의 대립과 그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두 마법사의 이야기인데, 현재로썬 쇠퇴해 가는 나라와 그 속의 정치적 대립과 계략들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본 리뷰는 50화 가량의 분량을 읽고 작성한 리뷰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임을 알려드립니다.
※ 리뷰에는 작 중 대사들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선 저는 이 제목이 몹시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빛의 심장, 어둠의 피.’ 피는 심장의 결과물이라고 가정했을 때, 빛과 어둠은 이에 반해 너무나도 반대되는 요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품을 읽을 때 무엇이 심장이고 피인지, 그리고 왜 빛과 어둠이 얽히게 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모순이 빚어낸 역설들은 크게 아래의 것들로 추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억압-자유
- 증오-사랑
- 감정-이성
억압과 자유
르네 마라, 혹은 르네 티리엔은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과거 평민이었지만, 서녀라는 이유로 왕궁으로 들어와 왕녀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이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르네에겐 그러지 않았습니다. 르네에게 왕궁과 티리엔이라는 이름은, 억압이 되어 그녀를 짓눌렀을 뿐입니다.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문제를 직시하게 됐다. 르네의 존재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왕비가 그녀의 삶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왕비는 사사건건 르네의 트집을 잡아 그녀를 가혹하게 굴었다. 르네는 드넓은 궁 안에서 그녀를 두둔해 줄 사람도 뒷배가 돼줄 세력도 없었기에 언제나 외롭고 위태로운 처지였다. (후략) -prologue 1
그랬기에 그녀는 자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마법사가 되어 힘을 얻고, 르네 티리엔이 아닌 르네 마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신분, 의무, 혹은 고립이라는 이름의 억압이란 심장이 만들어낸 상반된 결과였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바로 시안 로지어의 경우입니다. 시안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마법사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그에게 그의 할아버지인 한스 로지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한 같은 건 품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 아비는 네 아비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중략)… 굳이 죽음을 택한 건 그 자신의 뜻이었지. 그러니 원한을 갚겠다는 건 도리어 그의 죽음에 먹칠을 하는 격이야. (중략)…결단코 자식에게 하찮은 복수 따위를 바란 것이 아니란 말이다.” -Prologue 1
위의 대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안에겐 의무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산 것이고, 흔한 ‘복수를 해다오 아들아.’ 같은 유언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그에게 그의 선택이 부질없기까지 함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가 복수를 위한 삶이라는 억압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선택이었다면, 이 또한 저의 선택입니다.” -Prologue 1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갈망하는 르네와 자유에서 벗어나 억압을 택하는 시안의 대조 되는 모습은, 제목이 나타내는 모순 속 역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증오와 사랑
양극단에 선 르네와 시안은 배움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르네가 공주라는 것과, 시안의 증오의 대상이 그녀의 아버지인 왕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증오는 무엇보다 강력한 사랑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시안은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조금씩 밀어내며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점차 드러냈다. (중략)…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의지와는 달라서 숨길 수 없는 진심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시안은 무너졌고, 또다시 그녀에게 애틋한 마음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Prologue 1
아버지의 원수라는 거대한 증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라는 의지가 그녀 앞에서 무너졌다는 것은, 르네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증오가 있었기에, 그리고 그 증오를 시안 또한 알고 있었기에 결국 시안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결국 의지대로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시안은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이 마음에 굴복하기로 했다. (후략) -Prologue 1
반대의 경우인 사랑이 증오가 된 경우 또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서와 시본의 이야기입니다. 시본은 왕비가 되어 궁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둘째 아서를 유혹해 사랑에 빠지게 한 후 그를 발판 삼아 첫째인, 즉 더 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루시드에게 닿는 것에 성공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을 이용한 사기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서의 사랑은 증오, 복수심이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아서가 왕좌에 대한 의지를 최초로 품게 된 것은 모두 그날의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시본을 형에게 뺏긴 이상 자신도 그로부터, 혹은 시본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지 않고는 도저히 그 분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중략)… 이후 아서는 그 복수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2장 13
어쩌면 시본의 의도와 방법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만들기로 되어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또 한번 빛은 어둠을 낳게 됩니다.
감정과 이성
이젠 개인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큰 범위인, 티리엔 왕국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저는 이 왕국을 보면서 정말 숨 막히는 감정과 이성의 대치와 대체가 이뤄지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정적인 부분이 이성적인 계락과 음모들로 변화되어 왕국을 삼킵니다. 여러 경우가 있지만 가장 인상에 남은 부분은 카이저와 아서였습니다. 카이저는 세자를 고르는 것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장단점이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통상 첫째 왕자 루시드를 세자로 책봉하는 게 가장 바람직 했지만, 루시드는 왠지 카이저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너무 뻔뻔하고 거만한 성미였다. 더군다나 그는 처를 들이는 과정에서 동생인 아서에게 껄끄러운 일을 저지르기도 했었다. (중략)… 그렇다고 둘째인 아서에게 동정표를 주기엔 그는 자신을 지나치게 닮아있었다. (중략)…다만 그 야심이 독처럼 보였다. 본인 또한 난을 일으켜 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카이저는 그런 과거에 발목이 잡힌 사람이었고, 본인과 비슷한 성미인 아서가 왕이 됐다간 이 악순환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음 왕은 피를 흘리지 않고 치세를 이룩하는 성군이어야만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다시 해석되리라 믿고 있었다. -2장 02
설상가상 그나마 적합한 르네는 자유를 향해 떠나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이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던 중 아서와 시본 사이에서 언쟁이 벌어지게 되고, 카이저는 아서를 달래기 위해 아서를 위한 혼처를 알아봅니다. 비슷한 선에서 며느리를 고른다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한 채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이성적 태도는 감정에 의해 무참히 박살나고 맙니다.
“아서 왕자도 아서 왕자지만… 폐하계서도 이제 처를 들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로즈 라비앙 양에센 가히 왕비의 기품이 보였습니다.”
(중략)
카이저는 듣고 보니 그렇게 해도 별로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설픈 모양새인 건 사실이나, 젊고 예쁜 처가 갑자기 생긴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중략)… 웨인의 부추김을 듣고 나니 갑지기 젊은 처를 들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음… 그럼, 일단 국무관만 믿겠소.” -2장 08
젊과 예쁜 처를 향한 감정에 의해 그는 지극히 감정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물론 이는 아서의 차갑고도 위험한 이성, 즉 반역을 도모하는 일로 변질됩니다. 이성, 감정, 이성. 두 요소의 판 뒤집기 놀이에 티리엔 왕조가 재료로 올라온 것입니다.
아서는 다음 왕의 초상화가 걸릴 벽면의 자리를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누가 지나가다 볼지도 모를 그 아찔한 순간임에도 아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세상에 오직 단 한 명의 초상화만이 걸릴 수 있는 자리였다. 아서는 그 벽을 온전히 느꼈다. 마치, 앞으로 자기 것이 될 자리를 미리 느끼는 것처럼. -2장 13
한편 또 다른 쪽에서도 감정과 이성의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카이저와 세스입니다. 세스는 카이저의 최측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올곧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세자 책봉에 관해서는 이례적으로 나서서 이야기하는 등 충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스를 향해 카이저는 탐탁치 않음을 드러냅니다.
“평의회에서 날 놀라게 만들더군.” “자네까지 내 신하일 필요는 없네.” “자넨 어차피 나와 한 몸이 아닌가. 굳이 그렇게 신하 노릇을 하려들 필요는 없다 이말이야. 그저 내 눈치대로 생각하고, 내게 들은 것대로 행동하면 돼. 스스로 뭘 판단해서 행동하지 말라고.” -2장 04
…위세를 부리고 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주군인 카이저에게 누를 끼치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행동거지와, 충정에서 우러나온 간언에 대해서는 멸시를 당하게 됐다. 안 그래도 세스는 최근 토먼이 카이저로부터 받는 대우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지던 차였다. 자신도 언제든 저런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그런 생각이 언뜻 들며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슴이 답답해진 그는 온종일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2장 04
이런 세스의 감정은 점점 깊어져, 이후 아서의 반란에 가담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성적으로 카이저 옆에서 최선을 다했던 세스 마저, 카이저의 감정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의해 반댓편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아서의 반란의 동기가 감정이 이성으로 변한 경우였다면, 세스의 경우엔 이성이 감정으로 변한 경우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보다는 작긴 하지만, 작품의 초반부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던 감정과 이성의 대치가 있습니다. 시안과 르네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둘은 시안의 과거에 의해 어딘가 불편한 모양새로 얽혀있습니다. 시안의 아버지는 사명을 지키다가 반란을 일으킨 카이저에 의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르네가 의지했던 토먼이 습격으로 목숨을 잃자, 르네는 분노로 폭주합니다. 아서의 반란 소식을 알게 되고, 아서가 토먼을 죽였다고 생각하게 된 르네는 시안에게 반란을 바로잡고 카이저를 구하자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말에 시안 숨기려 했던 진실을 밝힙니다.
“물론 내가 그랬다고 해서 너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순 없겠지. 네 상황은 조금 다르니까. 그리고 네가 감정 이입하는 게 비단 네 아버지만은 아니겠지. 오히려 네게 아버지 같은 분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넌 지금 네 아버지를 구출하는 데 내게 힘을 빌려 달라고? 그리고 이 반역을 다시 바로잡아 보자고? 하하하하하…” -3장 11
감정으로 이성을 눌러왔던 시안은 무모한 짓을 하려는 르네를 막기 위해 이성으로 감정을 누릅니다. 르네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며 말이죠.
“미안해, 결국 우리의 운명은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오늘의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난 널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3장 11
사실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겠습니다.
르네가 자유를 알았기에 억압 속에서 자유를 바랄 수 있었던 건지, 혹은 시안은 이미 사랑했기에 증오 같은 것이 없었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았을지, 아서의 깊은 증오와 분노의 바탕에 여전히 사랑이 있는 것인지. 시안의 고백과 선택이 르네를 향한 감정인지 아버지를 위한 감정인지 혹은 둘 다 이성인지. 억압-자유, 사랑-증오, 감정-이성이라는 다소 이분법적 방법으로 나눠 놓긴 했지만, 각각의 요소 중 무엇이 먼저인지,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명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선 모르겠다는 답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머리 아픈 질문처럼 말이죠.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일까. 심장은 무엇이고 피는 무엇일까.
저는 이 질문을 던지며 작품을 읽어나갔습니다만, 계속해서 읽어나갈수록, 또 리뷰를 위해 정리해 볼수록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심장과 피 둘 중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일까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일까요. 혹은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르네와 시안의 정체성 중 하나인 ‘마법사’ 하는 키워드가 그다지 강조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대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마법이라는 요소가 추후 이렇게 상반된 것들이 가득한 숨막히는 혼합물에 어떤 금상첨화를 올릴지 궁금했거든요.
개인적으론 미지의 섬 화이트리아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마법이라는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작가님께서 언젠간 다뤄주시리라 기대해 보며 부족한 리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