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재밌는 이유에 관한 반 분석 반 감상 감상

대상작품: 피비린내 나는 책갈피 (작가: 이일경, 작품정보)
리뷰어: Campfire, 3시간 전, 조회 4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상은 이러한 것이었다.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잘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후 잠시 머리를 식혔다. 나는 사이코패스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른다. 사이코패스의 특성이 어떤 건지도. 그러니까 감탄사로 터져 나온 저 말을 엄밀히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미친 사람이란 이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다. 이성만 남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가장 잘 체현한 작품이 아닐까?

작품을 보며 어떤 점이 좋았는지를 의식의 흐름대로 열거해 보도록 하겠다.

 

※결말까지의 스포일러 포함

몸을 들썩이며 움직여보지만, 두 팔은 등 뒤로 넘어가 허리부근에서 손목이 묶여있었고, 발목도 마찬가지로 거친 밧줄 같은 걸로 묶여있는 것 같았다. 그걸 풀어보려고 손과 발을 힘껏 움직여보았지만 거친 밧줄의 표면에 피부가 스치면서 쓰라리고 따갑기만 했다.

준수한 필력이 눈에 들어온다. 도입부부터 시작해 작품의 세팅이 머릿속에 잘 들어온다.

 

그가 짐작컨대 단면의 반경이 2cm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적인 위화감이다만 밧줄의 굵기를 반경으로 계산하는 사람이 있나 의문이었다. 둘레나 비슷한 굵기의 다른 물체>직경>반경 순으로 떠올릴 거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사실 다시 읽으니까 눈에 띈 거지 처음 읽을 땐 신경 쓰이지도 않는 부분이긴 했다.

 

‘시발, 시발, 시발, 도대체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차가운 벽면이 어깨와 발뒤꿈치, 허리를 통해서 느껴졌다.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공포 때문이었는지 그 냉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에둘러 말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 이 작품의 문장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직설적인 욕설과 서술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흡인력을 만들어낸다.

 

“말하기가 좀 힘들 거야. 그 뭐냐, 그 약물이 좀 그렇대. 사람 기절시키기엔 딱인데, 당한 사람은…왜, 그런 거 있잖아. 술 잔뜩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숙취로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 그것보다 더하게 입이 텁텁하다고 하더라고.”

바로 위와 같은 맥락의 장점. 긴 대사인데 자연스럽게 읽혔다.

 

줄 톱이 세면대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욕조에 누워있어서 세면대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어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진 못 했지만, 세면대의 바닥이 낮아서 그 위로 튀어나온 줄 톱의 윗부분과 그 옆으로 삐져나온 밧줄의 끄트머리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뭔가 직육면체의 두꺼운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그게 뭔지 자세히 보기도 전에 진완이 말하였다.

“그거 알아?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한 번 보면 다시 반복해서 보지 않는대. 책도 그렇다고 했던가?”

소설에서 살아있는 유명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꽤 난이도가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잘못 쓰면 그동안 작품이 쌓아 올린 분위기를 단번에 무너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선 잘 어울린다.

 

뜬금없는 말에 성진은 진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처음 봤던 그 감상과 인상을 간직하고 싶어서라고 했을 거야. 하지만 난 그것 참 신기한 일이다 싶었지. 왜냐면 난 좋았던 작품은 보고 또 보는 타입이었거든.”

그건 성진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진완은 하나의 책에 꽂히면 그 책만 몇 번을 읽었다.

독자들은, 적어도 나는 소설에 그렇게 금방 몰입하는 편은 아니다. 그리고 위의 문장까지 아직 5천 자도 안 되는 분량이다. 그래서 박찬욱 운운을 읽는다고 해도 ‘대체 사람을 욕조에 감금 해놓고 저런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라는 식으로 궁금해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 개성적인 흐름을 만드는 것과 분위기 조성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

작품은 속도감이 있는데 리뷰는 그렇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 이후는 조금 빠르게 넘어가도록 해보자.

 

물론 성진도 가만히 있진 않았고 진완에게 너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니 그렇게 조용한 곳을 원하면 네가 찾아서 가라고 윽박지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그 뒤로 성진이 과제를 하려고 하면 옆에서 책 하나를 피고 중얼중얼 따라 읽으면서 정신을 쏙 빼놓기 일쑤였다. 심지어 커터 칼을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기까지(끼기긱) 하였다.

(중략)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면 조용한 곳을 찾아서 가.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하지만 그런 그를 향해 항의의 눈빛을 보내면, 진완은 커터 칼을 여전히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며 성진을 보고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성진은 수틀리면 자는 사이에 그 커터 칼로 자신의 목이라도 찌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룸메이트였던 만큼 주인공의 뇌리에서 납치범 진완의 과거 행적이 나온다. 이 부분은 작법 스킬보다는 작가가 생각하는 구체적인 미친놈상相이 얼마나 재밌느냐가 관건인데 나에게는 확실히 재밌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주둥이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폭력을 휘둘러서 이 기숙사에서 쫓겨나선 안 되었다. 기숙사를 이용하지 못 하게 된다면 주변에서 방을 구하는 것부터가 막막한 일이었다.

주인공도 마냥 선량하고 무해한 피해자가 아니라 나름 성깔이 있다는 게 분명해진다(그간의 욕설만으로는 이 느낌이 안 나온다). 그래서 작품에 피카레스크적인 재미에 대한 기대감이 조성된다.

 

(중략)여동생이 태어난지 5개월도 되지 않아 땅에 묻히게 되자, 그 상심을 이겨내기 위해 개를 한 마리 집에 들여왔었다. 말티즈 암컷이었다. 진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걸리적거리는 걸 하나 치웠더니 새로운 게 등장했다. 그리고 아기와 개를 비교하자면, 개가 더 똑똑했다.(중략)

다 담기엔 분량이 많아 중략으로 대체했다. 진완이 저지른 두 건의 살해 사건이 에피소드처럼 들어가 있다. 아마 이 두 건의 사건을 묘사하지 않았다면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앙상하게 느껴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분풀이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가 원하는 건 다시 이 소설을 즐겁게 읽는 거야. 이 소설에서 그 좇 같은 기분을 빼버리는 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

 

“미친 새끼… 넌 체포될 거야. 평생을 감방에서 썩겠지.”

죽을 위기에서도 살려달란 말 한 마디 안 하는 주인공 캐릭터도 재미있다. 맞수들끼리 제대로 맞붙었다는 흥미진진함이 생긴다. 감정적으로 대처했다면 식상했을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절반정도 밧줄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줄다리기 할 것도 아니고 직경 4cm나 되는 밧줄을 손 묶는 데에 썼으니 예정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성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욕조 위에서 익사한 시체처럼 힘없이 둥둥 떠 있는 소설책이었다. 소설책은 표지를 위로 향한 채 펼쳐져 있었다. 그게 무슨 소설이었는지는 모른다. 성진은 앞으로도 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만약 알게 된다면 그 소설을 볼 때마다 이 일이 떠오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자극이 약하긴 한데 그래도 중간에 던져놓은 문장을 회수하는 깔끔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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