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를 다루는 소설, 영화, 드라마의 필수 덕목은 ‘화두’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필자 개인의 생각이므로 마음껏 반박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SF 태그를 달고 있는 작품을 볼 때 재미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지 살핀다.
필자가 보는 게 하나 더 있다. 제목이다. 필자의 리뷰를 읽은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 것이다. 고로 필자도 글에 제목을 붙이는 게 가장 어렵다. 너무 직접적이면 글을 읽기도 전에 다 읽은 것 같고 또 엉뚱한 걸 제목에 붙이면 시간을 투자해서 읽은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안기기 때문이다.
‘물러난 거리’ 제목을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는가? 필자는 ‘거리’를 ‘길’로 인식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길, 아무도 없는 공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제목에서의 ‘거리’는 물체와 물체가 떨어진 정도를 말한다. ‘서로 떨어진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떨어진 정도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작품을 천천히 따라가면 알 수 있다.
본 리뷰는 작품 내용을 전부 다루기 때문에 먼저 작품을 읽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분량이 길지 않지만 재밌어서 금방 읽습니다 
여기 자신을 기계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로봇이 있다. 연구원들은 로봇이 기계 ‘인간’이라고 주장하면 지금까지 연구한 것들이 꼬이기 때문에 ‘인간’이란 주장을 무시하려고 하지만 한 연구원이 어떤 영문인지 들어나보자고 한다. 그렇게 시뮬레이터 2203과 연구원 가비 리의 인터뷰가 시작한다. 가비는 시뮬레이터 2203에게 기계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묻고 시뮬레이터 2203은 그것에 대한 답을 낸다. 일련의 문답이 오가며 독자는 시뮬레이터 2203의 기억을 따라간다.
시뮬레이터 2203의 과거와 기억을 보면서 필자가 딱딱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지점이 있었다. 시뮬레이터 2203을 만든 이안은 시뮬레이터 2203을 그릇으로 삼아 융합하려고 한다. 하지만 시뮬레이터 2203은 거부한다. 이안이 시뮬레이터 2203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그와 동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안에게 과거를 수백만 번, 그 이상을 반복해 안기며 과거의 잘못과 마주하게 한다. 이것에 ‘원하지 않는 직시는 사람을 망가트린다’는 원망을 듣지만 시뮬레이터 2203은 원하지 않는 직시를 이안이 원했다고 말한다. 시뮬레이터 2203 안에 이안이 있기 때문에 그의 결정이 곧 이안의 결정이라는 것. 이안은 처음부터 하고 싶어 했다. 즉, 이안은 육체를 버리고 시뮬레이터 2203으로 들어가면서 자신/과거와 ‘거리’를 가지게 되었고 시뮬레이터 2203이 들이부은 현실에서 깨달았다. 자신의 과거가 잘못되었고 집착은 쓸모 없다는 것을.
그렇게 시뮬레이터 2203은 주장하지만 필자는 왠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시뮬레이터 2203이 분해 당하기 싫어서 절름발이 흉내를 낸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물론 시뮬레이터 2203의 몸이기 때문에 이안을 침입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 너의 몸은 내 것이야’ 같은 상황. 한편으론 시뮬레이터 2203이 이안과 동화되었다면 가비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안이었다면 과거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기계 ‘인간’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 시뮬레이터 2203이 이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가비가 이것에 대해 물음표를 띄웠 듯 필자도 이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인간’인 이유로 이어지진 않았다. 인간처럼 이안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경험했고 느끼고 거부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인간’이라는 증거라기보다 ‘이안’을 학습한 로봇이라는 증거에 가깝다. 기계 ‘이안’이라고 주장하면 어느 정도 수긍하겠지만 말이다.
시뮬레이터 2203이 ‘인간’임을 증명하지 못했으니 시뮬레이터 2203은 결국 분해되었을 거라고 본다. 팔과 다리는 잘리고 이안과 시뮬레이터 2203의 기억만 따로 옮기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
작품은 ‘시뮬레이터 2203이 기계 ’인간’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했지만 ‘기억을 놓은 것이 지키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본다.
인간은 기억의 연속체이며 경험의 연속체다. 인간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후회한다. 애석하게도 인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허우적대는 건 시간 낭비다. 기계로 대체해서 같은 상황을 수백만, 수억 번을 반복 체험한다고 해서 이미 이뤄진 일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복적인 자책은 후회만 남을 뿐 상처를 입은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후회는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약 시뮬레이터 2203을 인간으로 봐야 한다면 ‘기억을 반복해서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로봇은 주어진 자료를 반복해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스스로 새로운 인풋을 찾지 않으니까.(고도로 발달한 AI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9주 작가님의 작품은 담담하지만 묵직하다. 또 생각할 거리를 하나씩 던져주어서 읽을 때마다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즐겁다.작품이 공개되면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하지만 혹여 오독한 부분은 아량 넓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작품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