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1부 삶의 의미를 잃은 주인공 수영은 타로 카페를 찾아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타로 점술사는 수영이 “죽어 있을 거였는데 이번 생이 주어진 것”이며, “당신이 살기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상담 중 수영의 몸에 비늘이 돋아나고 아가미가 생기며, 결국 그녀는 잉어로 변해 어항 속에 갇히게 된다. 2부 타로 점술사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녀들은 그리스 신화의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였으나, 이제는 힘을 잃고 속박된 존재들이다. 수영의 혼은 과거 “불에 타 죽은 사제”의 혼이. 노파들은 수영을 다시 현실로 돌려보낸다. 수영은 다시 그 안에서 늦잠을 자고, 출근 준비에 여념이 없이 바삐 산다. 3부 이 모든 일은 멸망한 지구의 투명한 수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인류는 이미 멸망했고, 생존을 원했던 일부 부유층(“사제”)의 혼이 태엽 인형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꿈꾸던 파라다이스는 없고, 단지 고통스러운 일상이 랜덤하게 영원히 반복된다. 로봇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체가 진화하고 있으며, 그들이 수조를 발견하는 날 인류는 진정으로 멸망할 것이다.
1. 사건 진행의 속도 – 느린 침강과 급격한 추락
이 소설의 서사는 독특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1부는 의도적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타로 카페의 검은 공간, 여자의 손톱, 카드 한 장 한 장을 뒤집는 장면들은 마치 물속에 가라앉듯 천천히 묘사된다. 독자는 수영과 함께 삶의 권태와 무의미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수영이 잉어로 변하는 순간부터 서사는 급격히 가속화된다. 비늘이 돋고, 아가미가 생기고, 추락하는 장면은 빠르게 전개된다. 2부에서 세 노파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 역시 빠른 템포로 진행되며, 3부의 반전은 단 몇 문단으로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이러한 속도의 대비는 의도적이다. 권태로운 일상은 느리게 흐르지만, 깨달음과 절망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마치 삶 자체가 그러하듯.
2. 주인공의 감정 곡선 – 하강에서 더 깊은 하강으로
일반적인 서사가 상승-하강의 곡선을 그린다면, 이 소설은 하강-착각된 상승-더 깊은 하강의 구조를 취한다.
1부 초반: 수영은 이미 바닥에 있다. “왜 살아야 하나” 묻는 그녀에게 더 떨어질 곳은 없어 보인다.
1부 중반: 잉어가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수영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한다. 아가미로 호흡하며 “명치가 갑갑하게 잠겨들 일은 없을까” 생각하는 장면은 오히려 평온하게 느껴진다.
2부-3부: 그러나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벗어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감옥에 갇혔다. 멸망한 지구의 수조 안에서, 태엽 인형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3. 죽을라 그러면 꼭 악착같이 살려내는 무언가
“살려야지”
“왜?”
“죽고 싶어하니까”
이 대사는 소설 전체의 핵심을 관통한다. 인간의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살고자 하면 죽을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그렇게 “죽을라 그러면 꼭 악착같이 살려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노파들이고, 운명이고, 시스템이고, 결국 ‘삶’ 자체다.
작가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통을 이야기한다. 수영은 사실 딱히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중견기업 인턴 탈락하고, 소기업에서 야근하며, 월 200만원 벌면서 사는 평범한 사람이다. “일평생 딱히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루 8시간, 때론 10시간 이상 하면서” 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문제는 이 삶이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신이 살기로 했다”는 노파의 말은 거짓이다. 수영은 전생에서, 살기로 선택한 적이 없다. 그녀는 어찌보면 노파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이 수조에 갇혔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그 운명의 여신들(모이라이)은 힘을 잃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녹슬고” “잊혀진 정령”일 뿐이다. 가위는 녹슬었고, 자는 부러졌고, 실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생을 재단하고, 미래를 가늠하고, 과거를 돌아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즉,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인간들은 자주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운명이 사라졌기에 더 끔찍한 무(無)운명 상태가 도래했다. 우리는 정말 ‘선택’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는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월세는 누가 내줘요?”라는 수영의 말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압박이다.
운명이란 적어도 ‘방향’이 있다는 뜻이다. 시작과 끝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문명에는 그것조차 없다. 태엽은 그저 돌고, 인형들은 의미 없이 반복하고, 끝도 없이 계속된다. 심지어 그 살아갈 생의 매 회차조차 랜덤이다. “운은 묘연하고, 명은 끝을 모른다”는 문장이 이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운명이 있다면 적어도 저항할 대상이 있다. 하지만 운명마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저항해야 하는가? 무엇을 탓할 수 있는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존재가 없으니 정말로 우리는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가?
더 잔혹한 것은 의미 없는 반복이다. 태엽 인형들의 삶처럼, 우리는 같은 하루를 반복한다. 출근-야근-귀가-수면. 그리고 다시 출근. 이 쳇바퀴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죽고 싶어하니까” 살려낸다. 사회는, 시스템은, 책임감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죽고 싶어하는 존재를 왜 살려내려고 하는가? 그것은 자비인가 형벌인가?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눈 앞에서 죽고 싶어하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리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죽고 싶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월세는 누가 내줘요?”라고 묻는다.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인간은 모순덩어리다.
제목의 “문명”은 과거형이자 현재형이다. 소설 속 문명은 이미 멸망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도 이미 “운명이 사라진 문명”이 아닐까? 우리 각자가 의미를 묻지만 답은 없고, 방향을 찾지만 모두가 쳇바퀴만 돌고 있는 이 시대 말이다.
4. 아쉬운 단점
이 소설은 세 가지 장르를 넘나든다.
1부: 심리 스릴러 + 환상 호러 (타로 카페의 괴기스러운 분위기)
2부: 신화적 판타지 (그리스 신화의 모이라이)
3부: 하드 SF (멸망한 지구, 태엽 로봇, 진화하는 생명체)
작가는 3부에서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설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다. 장르 전환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준비 없는 전환이다.
1부에서 독자는 “현대 한국 서울의 타로 카페”라는 현실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수영의 고민(야근, 월급 200만원, 소기업 마케터)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기에 환상적 요소(비늘, 잉어 변신)가 더해지는 것까지는 납득 가능하다.
2부에서 타로 점술사가 모이라이라는 것도 여전히 판타지 범주다.
그런데 2부 끝자락부터 갑자기 멸망한 지구, 대기 없는 땅, 투명한 수조, 태엽 로봇, 진화하는 사족보행 생명체… 이것은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마치 두 편의 소설을 억지로 붙여놓은 느낌이다. 3부의 두 단락이 꼭 필요했을까?
1부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집중한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통이다. 그런데 2부 마지막 부터는 갑자기 “인류의 멸망”과 “문명의 종말”이라는 거대 서사로 확장된다. 스케일이 너무 커지면서 수영 개인의 고통이 희석된다. 모이라이와 같은 신화적인 존재가 나오더라도 충분히 개인적 레벨의 서사와 연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수영의 모습이 보편적인 현대인의 모델이니까.
차라리 3부를 과감히 삭제하고, 2부에서 끝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한다. “수영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지만, 여전히 비늘이 났던 자리가 가렵다”는 정도의 여운으로. 그러면 그냥 초현실적인 실존주의 소설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아니면 3부의 SF적 설정을 1-2부에서부터 암시했어야 한다(예: 노파들의 방에 이상한 기계 소리가 들린다든지, 타로카페 창밖이 이상하게 보인다든지). 그리고 내용을 더 길게 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3부를 삭제하는 쪽이 단편소설로서, 그리고 실존주의적 주제를 부각하는 편이라 좀 더 추천하고 싶다.
5. 정직한 절망이 주는 위안
이 소설에는 희망이 없다. 구원도 없고, 해방도 없고, 해피엔딩도 없다. 수영은 여전히 수조 안에 있고, 노파들은 여전히 속박되어 있고, 태엽은 계속 돌아간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묘한 위안을 느낀다. 왜일까?
아마도 작가가 우리의 고통을 정직하게 인정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심히 살면 나아질 거야”, “의미를 찾을 거야”라는 거짓말 대신, 작가는 말한다. 그래, 삶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살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은 부당하다. 운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이 없어진 세계에서도 우리는 선택권이 없을 것이다.
이 인정 자체가 위안이다. 수영처럼, 노파들처럼, 수조 속 모든 혼들처럼, 우리 모두는 같은 고통 속에 있다. 결국 운명도, 의미도 없다. 남은 것은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다. 거짓된 희망이 아니라, 정직한 절망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차피 살아갈 거잖아요”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