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2부-2.(P70)
목차
1.『욕(欲)을 분석하는 인간에 대한 단상….』
2.『욕망과 파멸, 그리고 깨달음』
3.『소설에 담아내는 목소리는 독특할지도 몰라요』
4.『로드시커(Road Seeker)』
1.『욕(欲)을 분석하는 인간에 대한 단상….』
사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로 서두를 열자면, 인간의 ‘욕망(欲)’에 대한 탐구는 수많은 세월에 걸쳐 이뤄졌지만, 현대에까지 이르러서까지 ‘욕망’ 그 자체에 대해 무게를 주는 해석들은 다소 회의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요소 자체가 근반적인 인간의 행동원리를 구성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따지고 보면 인간이 벌이는 모든 사건들은 곧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라는 인과로 정의된다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도 한몫 하고 있습니다.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확히는 낯섦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이야기죠.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권력욕, 물욕, 애욕에 휘둘려 성공과 파멸을 반복해왔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들은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에서는 특별한 해석과 이견을 동반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뚜렷한 면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욕망’이라는 포괄적인 원동력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되겠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 읽은 <로드시커 Road Seek(이하 ‘로드시커’)>는 분명 독특한 지점이 있습니다. 앞서 ‘욕망’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은 무의미해졌다고 언급했지만, 이 작품만큼은 그런 제 사고에 도전장을 던지듯 ‘욕망’ 그 자체에 대한 연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현빈’이라는 인물이 그 어떤 욕구도 채워주겠다는 수상한 천사를 만나며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직관적인 줄거리와 명징한 의도로 무장하고 있으며, 가독성 있고 정확한 문체와 단어의 응용은 독자들을 결말까지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이 분명했습니다. 글쓰기 면에서 무척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로드시커>라는 작품이 제시하는 ‘욕망’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를 분석해보고, 그것이 ‘소설’이라는 매체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고민해볼까 합니다.
이 감상문은 문해력이 부족한 독자의 주관적인 의견과 해석에 불과합니다. 부디 다정하게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욕망과 파멸, 그리고 깨달음』
앞서 언급했던 내용입니다만, 현대의 창작물의 중심은 ‘인간’으로 제시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인간이 품고 있는 욕구가 사건을 만드는 것을 기본 뼈대로 제시하는 것이 익숙한 흐름인 반면, 이 글의 주인공 <로드시커>는 욕구가 곧 사건으로 제시되는 듯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이 표면적인 주인공은 ‘현빈’이지만, 실제로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 ‘욕망’을 건드리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물의 동기, 사건과 갈등,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소설적인 분석보다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함포하고 싶은 사고와 해석을 쫓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부-1.P27) “저 뉴스 좀 봐. 강도 전과자가 로또 1등에 당첨됐대. …(중간생략)… 형사 생활 15년에 복권 4등도 안 됐는데, 강도 놈이 1등이라니? 이게 말이 돼요?”
작품은 직접적으로 물욕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시발점을 끊어냅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처지에 대한 비관이며, 한편으로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질투입니다. 작중의 ‘현빈’은 평범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느 남자이지만, 뒤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기 때문이죠. 무심코 손에 들고 나온 복권 한 장은 그런 ‘욕망’의 표본이며, 자신이 바라고 있는 물욕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채울 수 없는 갈증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채울 수 없기에 충족될 수 없는 욕이라는 요소.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벽에 부딪히는 것이 ‘현빈’이라는 남자의 모습입니다.
(1부-3.P28) “나는 저 높은 곳에서 파견된 수호천사다. 너를 돕기 위해 왔다. …(중간생략)… 이제, 자네의 소원을 말해보게.”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천사’라는 존재는 복권 한 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회로 작용합니다. 무조건적인 욕구의 충족.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월적인 존재. ‘현빈’은 그의 모습과 힘에 매료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1부-3.P61) “천사는 본래 무한한 사랑의 존재라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뭐든 해주고 싶듯이, 나도 자네를 위해 기꺼이 뭐든 해주고 싶다네.”
물론 독자들의 입장에서 그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욕구를 채워주고 행복을 바란다는 그가 어두운 목적을 갖고 있으리란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죠. 하지만 ‘현빈’에게는 그런 제3자의 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힘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다그치는 모습만 봐도, 그는 의심해야하는 존재가 아닌 믿어야만 하는 존재로 격상합니다.
(1부-3.P56) “너무 낙담하진 말게. 복권 2등 정도라면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이뤄줄 수 있어. 매주 2등에 당첨 되도록 해줄 수 있다네.”
(1부-4.P11) ‘칠천만원… 애매한데.’ 아파트를 사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평소 꿈꿔왔던 포르쉐는 꿈도 못 꿀 금액이었다.
(1부-4.P47) “그럼… 앞으로도 매주 2등, 확실한 거죠?”
천사는 자신의 권능으로 욕망을 자극하면서도, 복권2등이라는 한 끝이 모자란 선에서 타협을 요구합니다. 그 의도는 명확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을 관습적으로 하지만, 그것은 곧 끝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욕망’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한 계단을 밟으면 정점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2등은 정점에 닿지 않는 경계입니다. 천사는 현빈에게 ‘욕망’의 정점에 다다르지 못 하는 현실을 주입하는 것으로 그를 부추기는 셈입니다.
(1부-5.P25) “… 아버지 인감도장하고 신분증이 필요해요.” …(중간생략)… 아버지를 보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내뱉은 거짓말들이 쇳덩이가 들어앉은 듯 마음을 짓눌렀다.
(1부-5.P27)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이었고, 지금은 단지 한 번 넘기는 것뿐이라고. …(중간생략)… 그렇게 죄책감을 애써 억누른 며칠이 지나, 드디어 포르쉐출고일이 다가왔다.
(1부-6.P11) 2억 원대의 자동차. 평범한 서민이라면 평생 모아도 구입하기에 힘든 금액이었다.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즐거움을 넘어 부의 욕망 그 자체를 자극하는 물건. 어쩌면 극소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욕망이라는 계단을 오르는 것은, 그 계단을 밟을 수 있는 계기로 묘사됩니다. 처음에는 물욕의 대부분을 채우지 못 할 거 같았던 금액이, 이윽고 그가 물욕을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작용합니다. 현빈 스스로에게는 그 간격이 크지 않습니다. 발췌된 문장처럼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이라고 합리화하는 사이 몇 계단을 올라 만족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까요. 점층적으로 불어나는 욕망의 단계. 작품은 그것을 세심하게 쫓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1부-7.P78) 현빈은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돈만 있으면,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을.
(1부-.8P39) “돈만 많다고 모든 일이 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이제 저에겐 당장 좋은 집안과, 좋은 직업이 필요해요.”
물욕의 충족은 곧 ‘애욕(愛慾)’으로 단계를 넓혀갑니다. 웅덩이 하나를 메우면 다른 웅덩이가 눈에 띄는 욕망의 흐름. 다양한 욕망들은 그 자체가 완벽히 충족되지 않기에 인간을 움직인다고 하며, 그것은 현빈에게도 크게 다른 질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현빈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 도구가 바로 ‘천사’라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1부-8.P59) 결국 깨달은 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1부-9.P15) ‘이토록 많은 걸 얻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과연 행복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1부-9.P36)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잖아요.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돼도, 그건 행복과는 다른 것 같아요. 뭔가 항상 부족한 느낌….”
물론 작품 내에서는 이런 ‘욕망’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추상적이지만 강력한 동기는, 이런 욕망을 충족하며 이뤄갔던 결과물에 대한 안티테제로 제시됩니다. 초월적인 힘으로 자신의 물욕과 애욕, 그리고 승부욕을 하나둘씩 채워가던 현빈은 그 끝에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곧 지금 그가 채워가고 있는 욕망이라는 구덩이가 곧 ‘행복’을 발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부-10.P31) “천사? 대체 누가 천사라는 거지? 나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어.”
(1부-10.P41) “내가 자네에게 나쁜 짓을 한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게.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빈 건 누구였지? 힘을 달라고 애원한 건? 폭력배들을 짓밟으며 쾌감을 느낀 건 누구였나? 나는 자네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자네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던 거지.”
(1부-10.P46) “… 널 일부러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놨다. 그리고 손을 놔버렸지. 왜냐고? 넌 혼자 힘으론 날 수 없는 놈이었으니까. 네가 스스로의 날개로 날아올랐다면 추락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윽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던 도구라고 여겼던 것이 자해를 재촉하는 ‘악마’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현빈은 무너집니다. 이 과정에서 악마가 주는 경고는 눈에 담을 가치가 있습니다. 악마는 현빈에 대해 배고프면 떼쓰고 화가 나면 소리 지르는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욕구 그 자체의 충족만을 바랐던 인간의 결말을 현실로 보여줍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악의적인 행동에 대한 정당화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 품은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인간 본인이라는 것과 더불어, 초월적인 힘의 도움 없이는 완벽에 가까운 추구를 이뤄낼 수 없는 욕망의 본질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부-1.P41) 아무것도 가진 건 없지만,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는 거였구나. 왜 ,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중간생략)… 그는 난생처음,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혼자서도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걸,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현빈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눈여겨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 무엇도 제 손으로 채워본 적이 없는 그가 작중에서 처음으로 제 손을 써서 무언가를 시도한 순간이기 때문이죠. 그 결과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그는 처음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오히려 욕망이라는 구덩이를 채우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덕분에, 감겨 있던 눈이 뜨인 셈입니다.
(2부-1.P123) “자네가 정말로,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생각 하나에만 집중하라는 말이지.”
(2부-4.P39) “우리 마음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잠재력이 있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그 힘을 불러내서 쓸 수도 있고, 그대로 잠재워놓을 수도 있지.”
흥미로운 점은 작품은 욕망을 품은 ‘마음(心)’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자신에게 있으며, 그것은 손에 담길 만큼 아주 작은 부분에서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나직이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곧 2부의 중심 주제인 ‘행복을 찾는 방법’과 연관됩니다. 현빈은 곧 자신의 행복이라는 목표로 다가갈 수 있는 첫 번째 계단에 다다릅니다. 그 존재는 ‘가영’이라는 여성입니다.
(2부-6.P46) “우리 다음에는 지하철 밖에서 만날까요?” …(중간생략)… 이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현빈은 내면의 망설임과 싸웠고, 거절의 두려움을 억눌렀고, 정신을 가다듬고 오직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그렇게 마음을 정제하고, 또 정제했다. 그 모든 감정의 응축 끝에 마침내 흘러나온 한 마디였다.
현빈이 가영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선 1부에서 욕망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주장했다면, 이 순간에 다다라서 그 경고를 이해한 독자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또한 가장 순수한 ‘애욕(愛慾)’에 접근하고 있는 현빈의 모습 덕입니다. 즉, 이 또한 욕망을 해결하고 있는 인간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부-1.P15) … 현빈은 댐 앞에서 얼쩡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다. 불길한 예감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댐 앞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중간생략)… 악마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3부에 이르러서 또 다시 ‘악마’의 존재가 언급되며, 악몽을 꾸고 일어나는 현빈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대목에서 ‘악마’는 곧 현빈의 과오라고 해석됩니다. 젊은 날의 과오. 욕망에 휘둘렸던 과오. 그로 인해 껍데기 같은 인생을 자각하고 절망했던 순간이 나날이 피어오릅니다. ‘악마’는 언제든지 그의 인생을 댐처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현재의 행복이 과거를 지울 수 없다는 또 다른 경고로도 읽혀집니다.
(3부-2.P53) “그래서 그 녀석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확 잡아서 혼을 내주어야지요!”
이번에 현빈은 자기 자신이 아닌 가족들을 위해 움직입니다. 악마와 대적하는 것. 그 힘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3부-2.P78) “러시아의 대문호였던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정신으로사,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중간생략)… 그렇기에 신을 발견하기 가장 쉽고 가까운 곳은 바로 자신의 내면인 것이지요.”
악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은 내면에 있다. 즉, 욕망을 건드렸던 근원과 맞설 수 있는 힘은 내 자신을 심신으로 단련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작중에서 그 과정은 무협이나 다름없는 신기에 가까운 묘사로 등장합니다. 그 자체는 장르적인 재미를 준다기보다, 내면이라는 위치로 상징되는 ‘영혼’ 그 자체의 묘사로 해석하는 쪽이 그럴 듯합니다.
(3부-5.P19) “그런데 솔직히 한 번 생각해 보게. 자네는 정말로 자신이 악마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네 덕분에 헛된 것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떨쳐냈다네. 허울뿐인 성공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버리고 변화될 수 있었지. 나는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고, 참된 영혼의 길을 걸어서 진정한 성공에 이르렀어.”
(3부-5.P24) “많은 인간들이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을 가지고 혼란스러워하지. …(중간생략)… 내가 방해했던 많은 인간들이 인생을 망쳤지. 그들 중 일부만이 자네처럼 되었다네.”
악마와 재회하며 현빈이 터뜨리는 울림은, 곧 작가가 터뜨리는 울림과 결을 같이 합니다. 말 그대로, 현빈은 자신을 흔들던 욕망이 ‘헛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행복과 여유 없이 이뤄낸 성공을 ‘허울’이라고 규정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곧 내면. 작가가 말하는 성공이란 나 자신에게 충실 하는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3부-6.P30)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도 있고, 진짜 천사도 있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의미가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악마의 모습을 가장한 천사도 있겠군요?”
(3부-6.P32) “세상에서는 나누기를 무척 좋아하지요. …(중간생략)… 이렇게 나와 너를 나누듯이 선과 악도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습니다. 모두가 변화해가고 발전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죽음 뒤에 나타나는 키워드는 ‘성장’입니다. 삶을 전부 끝낸 현빈은 먼저 떠난 이들과 함께 세상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규정하려는 인간들의 관습을 비판합니다. 그것은 곧 1부와 2부를 거치며 보여줬던 욕망에 휘둘리고 행복을 지키려던 모든 시도들이, 이분법적 사고로 나눌 수 없는 ‘나(me)’ 자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3부-6.P40) “자네가 상상하는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중간생략)… 그럼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 길을 따라가서 도착하게 되는 곳은 어디죠?”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네. 진정한 자신의 길을 걷는데 소홀했기 때문이지.”
관습적으로 인간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을 ‘길(Road)’을 걷는다고 표현합니다. 그 길을 어떻게 걷느냐에 구체적인 답은 없습니다. 발걸음이 고르지 못 해도 한 걸음을 더 갈 수 있다면, 그건 곧 삶을 살아간다는 흔적을 남깁니다. 작중에서 작가는 현빈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걸음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내면에 대한 성장’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
저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마지막으로 이 비루한 해석을 마칠까 합니다. 욕망으로 시작되어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 <로드시커 Road Seeker>였습니다.
3.『소설에 담아내는 목소리는 독특할지도 몰라요』
앞선 단락에서 저는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욕망’과 그에 대한 작가님의 해석을 제 나름대로 풀어놓은 것을 기억합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작가님 특유의 정갈한 목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줄거리가 명확하고, 그것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명확하고, 그것들로 말하고 싶은 주장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합니다. 글을 쓰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문장과 단어를 명확하게 쓰는 솜씨며, 각종 성인들의 명언을 인용하며 주제를 강조하는 방식까지 더하면, 이 작품을 완성시킨 작가님 개인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조금 미묘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글이 ‘소설’이라는 매체로 공개되었다는 데에서 비롯되며, 때로는 이 소설로 나타내고 싶은 ‘욕망’이라는 주제에서 비롯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앞 목차에서는 이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독자로서 서술했다면, 이번 목차에서는 이 소설을 아쉽게 읽었던 독자로서 서술할까합니다. 해당 내용에서 무엇을 취사선택할지는 작가님의 판단입니다. 그저 앞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많은 독자들 중에서 나올 수 백 가지 의견 중 하나로만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보였던 약점들을 세 가지 키워드를 달아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정보’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소설’입니다. 다함께 글쓰기라는 분야에서 묶이는 수많은 글들이 있겠지만, 그 특성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기계발서는 직관적인 주제와 가르침을 제공해야하고, 수필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읊어줍니다.
그럼 이 작품이 채택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형식은 어떤가요?
당연하겠지만 소설이 주는 화법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라는 개념이 포괄적이지만, 그를 구성하는 세부요소들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의 동기가 제시되고, 그 동기로 벌어지는 사건을 제시하며, 사건이 마무리되는 결말과 주제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이토록 많은 재료들이 필요하냐는 것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것이 ‘소설’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소설은 정보를 ‘이야기’로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이 이야기를 썼는가?’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이런 이야기로 어떤 정보를 제시했느냐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다만 <로드시커>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이야기에 속하나, 소설의 화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정보를 전하는 방식은 영화나 만화 따위에서 컷으로 대표되는 ‘장면’이며 그것은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인물과 사건을 근반으로 합니다. 다음 발췌한 구절들은 이 작품이 정보를 전달하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전부 1부 8회차에 등장한 구절입니다.
(1부-8.P57) 그가 가졌던 기존의 생각은 참으로 무지한 것이었다. 회계도, 마케팅도, 인적 자원관리도, 경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어느 날 아침, 부하 직원이 그를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도 덮어두고 넘어가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1부-8.P59) 처음에는 그까짓 거 나라고 못 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쉽게 만 생각했다. 결국 깨달은 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1부-8.P60) 그는 일 년 가까이 계속된 복권 당첨으로 쌓은 재력과 기업의 소유라는 기반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상류층에 끼어 보려고 애를 써보았다. 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장면들은, 냉정히 말하면 ‘장면’이라고 볼 수 없는 서술에 가깝습니다. 현빈이 초월적인 힘으로 이뤄낸 부에 적응하지 못 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에 따른 사건들이 전무하며, 오로지 그의 배경을 설명하는 ‘진술’에만 갇혀 있습니다. 소설의 기본은 글을 읽고 상상하는 것에 있는데, 그것은 인물이 움직이고 사고한다는 ‘이야기’의 규칙은 근반으로 합니다. 이 구절을 읽은 독자들은 어떻게 부하 직원들이 그를 무시하는지, 어떻게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지, 어떻게 돈에 대한 회의감을 깨닫는지,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독자로서는 현빈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쫓아가는 경험이 배제된 채, 오로지 질문과 답만 제시되는 진술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영화를 보러 갔는데 깜깜한 화면 위에 상황을 설명해주는 배경 나래이션만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설이라도 진술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거나 사소한 정보들은 진술로 빠르게 처리해야할 경우도 왕왕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가장 필요한 장면들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토록 진술로 서술되는 정보들의 비중이 높다 점이 아쉽습니다. 사소하다고 볼 수 없는 현빈의 행동과 경험까지 모조리 진술로 생략되는 탓에, 독자로서는 이 작품을 ‘이야기’로 여길 거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인상마저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명한 것도 있습니다. 바로 인물의 ‘대사’입니다. 대사는 인물의 목소리로 정보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인물이 말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은 필수적으로 대화와 행동으로 연결되는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즉, 대사 부는 어떤 식으로든 진술에서 벗어난 ‘이야기’의 속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대사들조차 이야기의 틀에서 너무 느닷없고 사변적인 정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그런 사변적인 정보의 예시라고 할 수 있죠.
“과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제가 아니라고 해. 시각이나 청각으로 들어온 정보를 뇌가 재구성해서 만든 이미지일 뿐이지.”
“모든 세상 사람들 마음이 저 호수처럼 맑았다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진짜 자기가 누군지 몰라. 마음의 표면만 보면서, 그게 자기 본질인 줄 알고 착각하지.”
“본래부터 사람이 우매한 건 아니지.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사실과는 다른, 자기만의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 틀대로만 세상을 보려 해.”
사실 이 대사들 말고도 결이 비슷한 문장들을 수없이 있지만, 이런 몇 가지 대사만 보더라도 작품에서 추구하는 ‘대사’의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침’ ‘교훈’ 저는 그런 단어로 이 대사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품에서 나오는 대사들이 질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뜻이 명확하게 읽히는 것이 좋은 대사에 속한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소설’의 대사라고 한다면, 극의 생동감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런 관찰 또한 앞선 ‘진술’로 함축된 장면들과 결을 같이 합니다. 대사의 역할을 다양합니다. 인물의 성격을 제시하고, 소설적 생동감을 살리고, 각종 대화로 사건의 중추를 담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대사들은 그런 모든 역할들을 배제한 채, 오로지 ‘교훈’과 ‘깨달음’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사들은 대부분 말투가 비슷하여 생동감이 없는 편에 속하고, 그 대화에서 어떤 사건이 진행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대사가 나오는 부분은 딱 그 대사에 담긴 정보를 우직하게 전달할 뿐입니다. 대화에서 느껴지는 감상이 없이, 그저 대사를 읊고 있는 내용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셈입니다.
그렇다보니 대사가 등장하는 부분은 무척 사변적이고 상황과 맞물리지 않는 감도 있습니다. 예시로 호숫가에 함께 놀러간 동성 친구가 교수님과 같은 지식을 자랑하며 깨달음을 주려고 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생경함이 느껴집니다. 친구가 그런 식으로 고풍적인 사색을 즐기는 인물이라 여길 수 있겠지만, 사실 작중에서 현빈과 만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이 이런 현자(賢者)와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은 조금 다른 해석을 낳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저로서는 민석과 장인어른의 목소리를 특별히 구분할 수 없었고, 성격과 기호를 비롯한 당연한 배경조차 알기 힘들었습니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런 구분의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느낌마저 받았죠. 어째서일까요? 그 대사들이 내용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둘 뿐이지, 인물을 구체화하는 역할은 상대적으로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이 간략한 줄거리에 비해, 너무 많은 정보를 주려고 노력하는 면도 있습니다. 당장 ‘악마와 만남’이라는 소재만으로도 커다란 사건인데, 그에 이어 복권을 사고, 회사를 사고, 자살시도에서 목숨을 건지고, 여자를 만나고, 환생을 찾고, 내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고……. 중간에 방울 이야기까지 더하면, 이 이야기에 너무 많은 소재와 인물이 등장합니다. 흔히 소설을 작가가 선별한 장면의 나열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작품은 소설로서는 선별되지 않은 무언가가 한 곳에 뭉쳐 있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로 ‘가영’이 있는데, 이 인물이 물리적으로야 분량은 충분하지만 현빈의 아내라는 역할을 제외하면 구체적으로 작중에 영향을 미치는 바는 크지 않습니다. 만약 그녀가 중심으로 등장하는 2부를 통째로 도려낸다고 해도, 줄거리에 큰 공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마에게 휘둘렸던 나 자신이 성장한다’는 줄거리에 적대하는 대상이 명확해지며 기승전결이 선명해지는 효과마저 있습니다. 방울이나 전생 이야기야 그 뜻은 있겠지만, 소설적인 정보를 주는 사건으로서는 사족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소설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 어색함을 띠고 있습니다. 인물이 움직이고 대화하며 갈등을 겪는 모든 과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아직 작품 내에서 고려하는 바가 부족해보였습니다. 심지어 소설로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부터, 이 정보를 어떻게 전달할지까지의 과정이 다소 무시되는 탓에, 모든 것이 과도하고 어수선하다는 인상마저 주게 됩니다.
제가 작가님의 글을 읽던 중 ‘학교 선생님이 아니신가요?’라며 물은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런 추측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화법과 강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장과 표현이 정확한 것에서 글을 읽고 쓰는 데 능숙하다는 것을 느꼈고, 각종 인문학적인 지식과 성인들의 인용문에서 학술적인 내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주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화법에서 학생을 두고 가르치는 ‘교사’의 인상을 느끼기 쉬웠습니다. ‘자기계발’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셨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닌 ‘자기계발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죠. 만일 바탕이 조금 다른 형식으로 이 글을 만났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화법에서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소설은 관습적으로 말하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있는 매체입니다. 간단한 말도 어렵게 말하고, 짧은 이야기도 길게 풀어내기 마련입니다. ‘생명은 모두 귀하다’라고 여덟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책 한 권을 써내서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흔히 글을 접하다보면, 작가분이 어떤 글을 자주 읽는지 아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이 글은 많은 내공을 품고 있지만, 아직 ‘소설’에 대한 감각을 연마할 여지가 있습니다. 집에 어떤 소설이 있으신가요? 가장 마음에 드시는 작품을 골라 읽어보면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전하고 있는 파악해보신다면 분명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둘째는 ‘주관’입니다.
떠올려보면 ‘이야기’라는 매체를 다룰 때에 ‘개연성’이라는 표현으로 장면의 이음새를 지적하곤 합니다. 그것은 곧 사건의 ‘객관성’과도 연결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통용될 수 있을만한 사실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정의됩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개연성이 일부 장면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가령 악마에게 휘둘리며 욕망을 풀고 다니는 1부에서 현빈의 모습만 봐도, 아무리 초월적인 힘에 휘둘린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유아적으로 표현되는 감이 있습니다. 다짜고짜 앞에 나타나서 마법과 같은 힘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떼를 쓰는 장면이며,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아무 계획도 없이 전화하는 장면이며, ‘내가 돈 쓰고 놀기도 바쁜데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냐’면서 떼쓰는 장면이며, 도저히 성인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미숙한 모습만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현빈의 모습이 정신적인 성장을 거치지 못 했다는 상징으로 묘사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만…… 그보다는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모습을 너무 단순한 예시로 표현했다는 쪽이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활비를 받으면서 살던 아들이 보증을 세우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는 장면 등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장면들도 더러 있는 것을 보면, 원초적인 주제를 위해 무리했다는 쪽에 더 설득력을 두기 마련이니까요.
2부로 들어서며 꿈을 꾸고 인연이 끊어질까 두려워하는 가영의 모습도, 저로서는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지는 못 했습니다. ‘꿈’은 허상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쁜 꿈을 꿨다고 그것이 현실로 벌어질 거라고 여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전생과 현생을 오가며 꿈의 장면을 설명하는 가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현빈의 모습도, 꿈이라는 허상을 믿게 만드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는 편에 속합니다. 이에 대해서 작가님은 ‘꿈은 무의식을 보여주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의의를 설명하셨습니다만……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저처럼 무지한 사람은 그 매커니즘을 이해하지 못 하지만, 꿈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부정할 정도로 고집이 센 편은 아닙니다.
그 ‘가능할지도 모른다’로 대표되는 사고가 이 개연성을 악화시키는 이유가 됩니다. ‘꿈은 무의식을 보여주는 도구’라는 개념만이 반영된 나머지, 그 꿈을 받아들이는 현실의 상식이 다소 무시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가영과 현빈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독특한 누군가가 아닌, 세상의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으로 생동감을 가져가야하는 ‘소설’로서는 다소 어긋난 방식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이 지나치게 주관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진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런 ‘주관’은 장면의 개연성을 해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이 전부를 쏟고 있는 주제 면에서도 다소 의아한 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음 발췌한 구절을 한 번 살펴봅시다.
(1부-6.P11) 2억 원대의 자동차. 평범한 서민이라면 평생 모아도 구입하기에 힘든 금액이었다.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즐거움을 넘어 부의 욕망 그 자체를 자극하는 물건. 어쩌면 극소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 내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2억 원대의 자동차가 서민이 사기에 부담스럽다는 의견은 동의하지만, 그것이 곧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난감’으로 규정되는 것은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차의 여러 장점을 보고, 돈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는데, 그저 재물 사정이 빈약한 사람이 비싼 차를 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욕망으로 비롯된 과오’로 취급하는 건 다소 일차원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서민으로 대표되는 제 경우에는 2천만 원짜리 커스텀 일렉기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형편에 맞지 않는 악기를 샀으니까, 그건 ‘욕망에 기반 한 사치’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가격과 재산이 딱 떨어지는 비율이 있는 걸까요? 혹여 2억 짜리 차는 욕망이 불순하게 작용한 결과고, 그보다 저렴한 1억 원짜리 차를 사면 나름 욕망을 통제하고 있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납득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통계학적으로 그 기준을 제시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이 작품 내에서는 던져지는 대부분의 의문들이, 작가님의 주관만을 근거로 장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 논리를 차치하고라도, 이 구절이 누구의 생각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편인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이 판단은 어떤 인물이 내리고 있는 걸까요? 이 작품이 3인칭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현빈이 차를 타면서 내심 자신이 사치스러운 장난감을 샀다고 여기는 걸까요? 아니면 소설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현빈의 상태를 판단하고 있는 걸까요? 명백히 내용에서는 주관적인 해석을 밝히고 있는데, 그 주관의 주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 그 주관의 주체가 ‘작가님’ 본인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중의 모든 인물과 대사들이 단순히 작가님의 의도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작가님의 목소리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설적으로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논해보자면……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마냥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만일 그런 방식으로 이런 주제와 해석을 선보이고 싶었다면, 더 확실한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강연장에 올라 관련 주제로 마이크를 잡아도 되고, 관련 기사에 칼럼을 작성해도 되고, 어쩌면 자기계발서라는 이름의 책을 출판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굳이 소설이라는 매체에서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면서까지 작가의 주관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 복잡하고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부분 장르적으로 변주된 이야기를 선보이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본뜨기 위한 시도가 선명한 작품입니다. ‘악마’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을 배제하고 보면, 무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면보다는 그 한계에 부딪히는 장면을 조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그런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에 맞춰 객관성을 갖출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주제’입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욕망을 가진 인간보다는 욕망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을 내세우는 작품입니다. 인물과 사건의 희미함을 감수하더라도, 작가가 해석하고 있는 욕망에 대한 관점과 교훈을 설파하는 데 주요 목적을 두고 있죠. 당장 작품 소개에서 ‘욕망’과 ‘깨달음’ 그리고 ‘삶의 본질’을 주제로 내세운 만큼, 이 작품은 작가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진 무언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저는 ‘욕망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현대사회에서 이뤄지기 힘들 뿐더러, 연구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를 살면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욕망을 움직이고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수 천 년에 다다르는 데이터를 축적해왔습니다. 그만큼 욕구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동기이며, 몸 안에 피가 흐르고 살점이 뭉쳐 있는 것처럼 당연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왜 몸 안에 피가 흐르는지에 대해서 토론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욕구를 다루는 주제는 딱 그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독자들이 그 정도의 느낌으로 이 작품을 접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소설을 접할 때 ‘이야기가 재밌었고 주제의식도 좋았다’며 이야기의 흥미를 우선시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이야기가 재미가 부족해도, 오로지 주제의식만을 떼어놓고 논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 어려운 길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습니다. ‘욕망’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질과 내면의 성장. 이야기는 그 주제의식을 거들어줄 도구일 뿐이며, 이야기와 주제의식을 분리해놓는 순간 모든 힘을 잃어버리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도 작중에 사건이나 갈등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편에 속합니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악마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1부 정도로 표면적인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지만, 2부와 3부까지 통틀어 두루 살펴보면 지나칠 정도로 순탄한 흐름이 관측됩니다.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겪고 깨달음을 얻는다기 보다는, 그 깨달음 자체가 제시되기 위해 인물들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런 설계에서 비롯됩니다.
즉, 독자들은 이 작품에서 이야기로 논의할 거리가 없습니다. 오로지 작가가 제시하는 주제의식에 울림을 받는가 못 받는가로 평가가 갈리는 셈인데, 그 주제의식은 너무나도 보편적인 삶과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화하기에는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욕심 부리지 마라!’ 혹은 ‘건실하게 살아라!’ 같은 구절은 모두가 머릿속에 구겨 넣고 있는 교훈입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방탕한 삶에 심취하고 있는 무뢰한이 있겠지만, 그런 그들이 이 교훈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것이 딱히 울림을 갖지 못 하기에 무시하는 것이겠죠.
저로서는 이 작품의 주제적 해석이 그 교훈을 넘어서는 무언가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확신하기 어려운 쪽에 속합니다. 의아하다고 느끼는 쪽이 이상할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욕망’이라는 주제 자체가 더 이상 연구될 거리가 없는 인간의 근반인데, 그것에 대해 신선한 해석을 주지 못 했다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작품에서도 이런 욕망에 휘둘리는 모습을 돈을 많이 쓰거나 여자에게 빠지는 등 상투적인 이미지로 소비하는데, 그런 이미지들로 어떤 새로운 울림을 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구겨둡니다.
결말부에서 나오는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삶의 본질은 나름 생각할 거리가 있었지만, 뜬금없이 주인공이 사망해서 저승에 갔다는 전개와 더불어, 독자로서는 결말의 여운보다는 당혹스러운 토론거리로 느껴지는 감도 있었습니다. 사실 2부와 3부로 대표되는 주제들은 형태가 없는 ‘마음’과 ‘영혼’을 제시합니다. 이것들은 이미지로 잡히지 않는 추상에 가까운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소설적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그 자체의 개념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에 대해 작가님이 어떤 교훈을 주고 싶은지는 이해하지만, 그 또한 굉장히 신선한 해석을 줬다고 하자니 난감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 감평문을 작성하기 전에, 작가님이 따로 올려주신 ‘심리학자가 본 1부의 해석’을 정독했습니다. 대부분 이해가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악마’가 곧 인간의 내면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자꾸 ‘악마에게 휘둘렸던 인간이 복수하는 이야기’로 단순화 하고 싶은 제 모습이 야속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해몽이 따라오려면 꿈이 근사해야하기 마련입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제에 대한 해석에 설득을 주고 싶다면, 우선 이야기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무의식의 여정’과 같은 언어가 주는 울림은 상당하지만, 저로서는 현재 <로드시커>가 보여주는 이야기가 그 울림을 따라가지 못 해 괴리감을 준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런 주제적인 요소들을 전부 배제하고, 장르적인 특성만을 좀 더 찾아가보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설령 작품을 전부 읽고 나서 그 어떤 깨달음을 얻지 못 했더라도, 현빈과 가영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울고 웃었던 제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Story)’를 말이죠.
제가 부족한 문해력에 이 작품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못 찾아냈을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너무 보편적인 시각에 함몰되어 내면의 성장을 이룬 주인공의 모습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 했을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는 저도 글을 쓰는 내내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있는 주제를 다뤄주신 작가님의 훌륭한 시도와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4.『로드시커(Road Seeker)』
제목인 ‘로드 시커(Road Seeker)’는 직역하자며 ‘길을 찾는 사람’정도로 의미가 받아들여집니다. 작품에서 ‘길(인생)’이 주는 의미를 떠올리면, 그것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방식(Way)’을 찾는 여정으로도 읽힙니다.
작품이 보여주는 ‘길(way)’은 순탄하고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형태가 무척 선명한 축에 속한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3부-6.P42)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네. 진정한 자신의 길을 걷는데 소홀했기 때문이지 …(중간생략)… 세상으로 되돌아간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 한다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들은 진흙탕처럼 욕망과 분노로 가득한 세상을 뒹굴다 다시 돌아오고, 또 다시 내려가기를 끝없이 반복하겠지.”
몇 번이나 걸어본 그 길을 다시 걷게 되는 과정을 작중에서는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들이 걷고 헤맬 수밖에 없는 그 ‘길(Way)’이란 그 정도의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 얽혀 있다는 의미도 되겠죠.
진정한 나 자신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수많은 갈래 중에 어디에 이정표가 찍혀 있나요? 그 또한 내 자신에게 숨겨져 있을까요? 갖가지 질문을 제 자신의 내면으로 던져보며, 이 부족한 감평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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