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이 작품 어때?’라고 물으면 가장 먼저 답할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겁니다.
열린 결말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이야기
이야기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불멸하는 인간과 인간은 다 죽어 인공지능 하지만 티키타카가 중요할 뿐, 실질적인 내용은 주목할 게 없습니다. 작중에 나온 대로 스몰토킹의 연속, 그리고 중간중간 독자를 위해 세계관과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되짚기, 아주 약간의 해프닝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결말은 붕 떠버리기 쉽습니다. 해프닝과 티키타카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전개를 스무스하게 만들어주는 윤활제… 즉, 보조 도구이지 메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역설적으로 붕 떠버리기 쉬우니까 붕 띄워버리는 전략을 내세웠습니다. 이 전략은 유효합니다. 의도치 않은 가벼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역량부족’을 떠올리게 하지만, 의도했다면 얘기는 달라지니까요. 정녕 작가가 역량이 부족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열린 결말은 이래저래 말이 많은 결말이긴 합니다. 이래저래 조건도 많고, 호불호도 갈리고요. 저도 열린 결말과 닫힌 결말,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깔끔한 맛이 있는 닫힌 결말을 선택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열린 결말의 가치가 닫힌 결말보다 낮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같은 식을 열린 결말로 퉁치는 걸 자주 접했기에 열린 결말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것이죠. 열린 결말의 조건 중 하나는 상상의 여지입니다. 그건 곧 과거에 대한 상상의 여지가 아닌, 미래에 대한 상상의 여지입니다. 작품이 제시하는 목적과 목표에 대해 작품이 스스로 답을 내리지 않았기에, 독자가 스스로 답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 열린 결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러한 ‘무답(無答)’은 ‘무근거’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책 없이 ‘알빠노’ 해버리는 게 열린 결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중요한 건 작품이 답을 내리지 않았을 뿐, 답을 추론할 근거는 작품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매우 성공적인 열린 결말을 맺었습니다. 왜냐면 작품 자체가 가지는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앞서 말했듯 해프닝과 티키타카는 내용이 아닙니다. 전개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것이 본격적인 사건과 갈등과 엮일 때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건은 끝난 뒤고, 사건은 더 일어나지 않았으며, 티키타카로 시작한 이야기는 해프닝으로 끝나 티키타카로 마무리합니다. 그 사이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관계성만이 두드러질 뿐이죠. 악우 관계인 둘은 서로가 나름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추구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디로 향하지 않는 작품은 어떻게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이 바로 열린 결말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붕 떠버리게 될 바에 먼저 붕 띄워버리는’ 전략을 취합니다. 작품 말미에 대놓고 ‘좋은 결말이 떠오르지 않아’를 언급하는 게 핵심이죠. 이로써 작품은 의도적으로 손을 놨습니다. 결말은 이제 아무래도 좋아졌어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관계성은 해프닝과 티키타카를 통해 충분히 보여줄 만큼 보여줬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되었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시 적절하게 다뤄졌어요. 둘의 성격 역시 저는 충분히 어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둘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떻게 될지는 즐겁게 상상할 수 있는 겁니다. 중요한 건 인간은 죽지 않을 것이고, 인공지능은 혀를 차며 죽이겠다 인간을 외칠 테니까요. 그게 보장되는 한, 우리는 작가가 띄워놓은 작품을 풍선처럼 들고다닐 수 있을 겁니다. AM의 티키타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