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장르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궁금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아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훅 던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개연성과 서서히 긴장감을 높여갈 수 있는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겠죠. [잘못 태어난 당신]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물입니다만, 읽고 나니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독자 여러분들과 제 생각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작중 주인공은 난데없이 창문을 열고 침입한 코치토 라는 우주인(?)을 만나게 됩니다. 코치토는 주인공이 세상에 존재하는 9개의 우주 중 다른 우주에 태어났어야 할 영혼이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란 지금의 우주와 관계를 끊어내는 것, 말은 좋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은 코치토의 말에 점점 이끌리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은 쉽지가 않아서 주저하던 중에 또 다른 우주인 림보가 나타나게 됩니다. 림보는 코치토가 인간의 갑상샘을 수집하는 괴물이며 자신의 그를 막기 위해 왔다고 하면서 주인공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데…
이 작품은 미스터리 이면서 호러 입니다. 그래서인지 온갖 궁금증과 싸워가며 완독하고 나면 이후 찾아오는 건 서늘한 공포입니다. 이런 공포는 원초적인 공포라기 보다는 코스믹 호러 계열의 작품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대한 존재 앞에 섰을 때 엄습하는 절망감과 무력감 같은 종류라고 봐야 할까요?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성질이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그것은 독자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뭐라고 규정 짓기는 힘들겠네요.
제가 본 이 작품의 특징은 약간 모호한 대비 입니다. 보통 이런 작품에서는 갈등 구조를 명확히 하고 반전의 재미 같은 것도 생각해서 선악의 대비를 분명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초반의 분위기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그 대비가 점차 모호해집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을 점차 불편하게 만드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 점차 분명해집니다.
‘괴물이 나인지 저 녀석 인지가 너한테 중요한가?’
결말을 확인하고 나면 코치토와 림보의 정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둘 중 누가 진실을 말했던 간에 주인공은 스스로의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못 했을 것이고 내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 했을 테니까요. 차라리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말해주길 바랬을 만큼 막막하고 끔찍한 결말에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이 작품의 결말에 끔찍하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이유는 결말까지 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빌드 업 때문입니다. 사실 라 노벨에서 등장한 후, 이제 판타지 소설의 단골 소재가 된 이세계 전생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주인공에게 절망적이지 않으면 개연성을 부여하기가 힘듭니다. 지금까지의 삶과 그동안 쌓아온 모든 유, 무형의 모든 걸 포기할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하니까요. 이 작품에서는 갑자기 주인공을 덮치는 트럭 대신 친절하게 방법과 도구까지 준비해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한 발을 내딛지 못합니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설득당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해치는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리 지금의 우주에 내 자리가 없는 것 같다 해도 말이죠.
이런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건 작가님이 작품 속에 두신 여러 장치들 때문입니다. 작품 내에서 코치토와 림보는 하양과 검정으로 분명한 색의 대비를 보이는데, 림보의 등장으로 그 대비가 드러난 순간부터 백색의 코치토가 왠지 밝은 이미지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의혹이 걷어진 것 같은 순간에 오히려 정체를 밝히기도 합니다. 조금 혼란이 오지만 그 때 쯤 되면 인정하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그 곳에 주인공을 구해줄 구세주나 다른 세상 따위는 없다는 걸 말이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너무 힘들다는 것이 어딘가 나 만을 기다리고 있는 낙원 같은 장소가 있다는 뜻은 아닌 거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완전히 리셋 해주는 이세계를 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금의 내 모습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이세계로 가길 원합니다. 저는 다른 차원의 우주라던가 이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곳에서 내가 지금과는 다른 엄청난 존재로 대접을 받거나 또는 그 세계의 위기를 해결해 줄 구세주로 모든 이가 나 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서인지 저는 작품에서 주인공에게 코치토와 림보가 나타난 것이 비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하는 막연한 기대가 제대로 박살이 난 거니까요. 브릿G의 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신가요?
1. 현실이 암울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희망적이지 않은 다른 세상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 계속 암울함을 등에 지고 사는 게 낫다.
2.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도 있었던 다른 세상에 대해 알게 되면 상상 만으로도 힘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인 채로 삶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우울해질 것 같긴 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별로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