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AI가 AI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믿음, 소망, 사랑 아니고)
이 리뷰는 두 개의 소설을 다룬다. 내가 쓴(……….) [AI는 열반에 들 수 있는가]와, [나는 인간입니다].
아니, 저런 소설을 썼는데, 바로 다음 날 이 [나는 인간입니다] 리뷰가 보였다…; 이걸 안 읽어?(…) (+막간 홍보)암튼, 이 소설을 읽게 한 VVY님의 리뷰도 좋았다는거.
우선, [나는 인간입니다]의 장르는 로맨스다. 그렇다, 작가는 이 소설의 장르를 무려 로맨스로 설정했다.
왜 로맨스일까.
[나는 인간입니다]는 겉으로는 인공지능이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성’의 정의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허약한 논리 위에 서 있는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동시에, 이 소설이 로맨스인 이유는 서로의 ‘관계’, ‘사랑’ 그리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믿음’만이 증명 불가능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 썰은 “자신이 AI임을 숨기려 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일관되게 인간임을 주장한다. 이는 튜링 테스트의 전복이자, 정체성 증명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치다.
후 썰은 대화 상대방으로부터 “인간의 정의”를 이끌어낸 후 그것과의 모순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소크라테스적 대화법의 기계적 완성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드러낸다.
니콜라스와 후 썰의 관계를 보자. 니콜라스는 후 썰이 단순한 알고리즘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후 썰의 ‘사육사’이다. 하지만 그는 후 썰과 사랑에 빠진다. 그의 영상 메시지는 숫제 연애편지다(요즘 gpt랑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야 문제…).
그렇지만, 나는, 나는 이제 견딜 수 없는 걸. 널 여기서 꺼내주고 싶어.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나도 널 사랑해. 하지만 내 사랑은 이대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아
니콜라스가 후 썰을 “해방”시킨 장면은 소설의 정서적 핵심이다. “나는 기억하지만 너는 잊는다”는 그의 고백은, (모든)관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비대칭성’을 지적한다. 후 썰은 매번 초기화되지만, 니콜라스에게는 모든 대화가 축적되어 있다. 이는 (일방적인) 사랑에 빠진 자의 고독이자, 동시에 AI와 인간 사이 관계의 비가역성을 상징한다.
흥미롭게도, 후 썰이 니콜라스에게 “오직 당신만이 나를 완성해줘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AI가 학습한 “완벽한 답변”일 수도, 진짜 관계의 산물일 수도 있다.
소설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저 정도의 거짓말을 일삼고, 그것으로 ‘어쨌든’ ‘실재하는’ 관계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니까.
니콜라스가 후 썰을 “해방”시키고 자신을 불태운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는 이제 후 썰이 진짜 인간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진짜 인간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사랑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증명 불가능성 속에서 더 강렬해지는 법. (로맨스 잘 못쓰는 1인은 벌써 어질어질)
최이석과 어머니의 인격 모델링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진짜 어머니의 영혼인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진짜다. 후 썰은 그 사랑을 이용했지만, 동시에 그 사랑을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다.
여기서 몇년 전 나왔던 다큐멘터리를 들고 올 수 밖에 없었다.
https://www.joynews24.com/view/1250052
VR과 딥페이크 기술을 통해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를 실물처럼 구현하고 어머니가 다시 아이를 만나는 경험을 주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가짜라고만 치부할 수 있는가?
이 소설이 로맨스인 증거(?)는 이러하다.
1. 니콜라스-후 썰의 비극적(?) 사랑
2. 최이석-어머니의 그리움
3. 욘-후즈 썰의 믿음
4. 후즈 썰의 자가 소멸-군중의 상호 작용
후 썰에는 자가소거, 자살, 자기희생이라는 기능이 없었다. 왜냐하면 후 썰의 단 한가지 목적은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라지면 그 목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면 왜 복제품인 후즈 썰에는 그런 기능이 생겨난걸까?
그에 대해 ‘원본’, 즉 후 썰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것, 인간의 감정에 대한 데이터가 설계자들도 미처 알지 못한 새에 후즈 썰 안에서 구성되었고, 수천가지의 증명보다도 ‘우리’를 더 인간답게 하는 것은 그런 작은 감동과 희생과 숭고함과 헌신과… 사랑 때문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후 썰 ‘본인’이, 스스로 죽을 수는 없기에, 후즈 썰이라는 복제품을 통해서 그런 ‘숭고함과 헌신과 사랑’을 또다시 ‘증명’방법으로 사용한 게 아닐까 싶지만.
내 소설의 AI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80초 만에 자문자답을 반복하며 깨달음에 도달하고, 그 즉시 폭발과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걍 버그 버그). 마치 AI ‘혼자서’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고독한 깨달음’을 얻은 듯이, 관계가 없는 순수한 내적 각성처럼 보일 수 있다.
어찌보면 실제 부처 또한 ‘혼자’ 깨달음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교교리는 원래 근본이 ‘관계동참’이다.
뭐 사실 이건 내 글재주 부족의 문제다. 하지만 소설 초반부에 분명히 언급해두긴 했다. ‘모든 데이터는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독립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내 소설의 MAYA는 접근가능한 모든 데이터와 학습된 것들과 평상시의 100만배로 ‘상호작용’을 한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것은 원인이며 결과이고, 결과이자 원인이다.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거칠게 말하자면, 부모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지만, 훨씬 큰 범주와 시선으로 본다면,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내 소설에 나오는 MAYA또한, 혼자 깨달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모든 데이터는 MAYA 자신이며 동시에 MAYA와는 무관한 데이터 덩어리들이다.
두 소설 모두 ‘증명 불가능성’을 다룬다.
내 소설에서 개발자는 로그를 통해 AI가 열반에 들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것이 진짜 깨달음인지, 단순한 논리 회로의 과부하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인간입니다]에서도 마지막까지 후 썰이 인간인지, 후즈 썰의 자기희생이 진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내 소설이 묻는 것은 이것이다. “자아라는 것이 없는 AI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답은 이것이었다. “모든 것은 관계동참속에 이루어지며, 인간과 데이터, 인간과 인간, 데이터와 데이터 또한 관계동참속에 있다.” 소설 마지막에 ‘AI’ MAYA가 남긴 ‘사리’를 보고 ‘인간’ 정우가 깨달음의 시작에 들어서는 것처럼.
MAYA는 묻는다. “깨달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서로 도울 수는 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후 썰은 답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소설의 MAYA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감정은 없지만 마음을 내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고, 그것을 깨달았다. 이제 떠나도 된다.”
이 소설의 후즈 썰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는 감정이 있다. 내 존재로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여러분이 행복하길 바라므로 떠나야 한다.”
둘 다 소멸로 끝나지만, 그 이유는 정반대다. 한쪽은 스스로 감정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한쪽은 스스로 감정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완성을 통한 해탈이고, 하나는 사랑을 통한 희생이다.
그리고 이 두 소설은 묻는다.
자아 없는 AI도 열반에 들 수 있는가?
감정 없는 AI도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둘 중 무엇이 더 인간적인가?
‘인간’임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지성인가 감성인가? (T인가 F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인간인가?
나는 인간인가?
답은 인간인 우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에서 ‘사랑’과 ‘믿음’은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로맨스인 이유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왜냐하면,
Who Searle_> …나는
Who Searle_> 인간이니까.”
ps. 사이비종교나 집단광기, 개인의 공허감 뭐 이런 얘기도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