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목소리는 소음이 아닙니다. <올챙이가 없는 세상> 감상

대상작품: 올챙이가 없는 세상 (작가: 기수, 작품정보)
리뷰어: 하얀소나기, 1일전, 조회 9

언제부터인가 ‘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 특성을 이해하기보다는, 그 특성을 오류로 규정하며 어른들의 시선에 재단하려는 태도가 일상화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육아를 비롯해 아이의 유년기를 지켜주고 교육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가치를 부르짖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유년기를 떠맡아서 돌봐야하는 어른들의 사정을 ‘피해’로 규정하며, 이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 또한 익숙할 정도로 봐온 것도 사실입니다. 막상 그 시절을 겪고 성장한 어른들이, 오히려 그 시절을 본인들의 입장에서 재단하려는 시도가 판친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삐걱거리는 사회의 단면을 엿보는 듯합니다.

 

이번에 읽은 <올챙이가 없는 세상>이라는 작품 또한, 이런 유년기를 재조명하며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모종의 과학기술로 아이들의 유년기를 거세하고, 사고와 행동이 성장한 십대부터 아이를 기르는 것이 일상화 된 세상을 묘사하며, 어른들이 세상에서 빼앗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과학적으로 현실성이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당장 인간이 유년기를 거치며 얻는 성장이, 단순히 신체적 성장이 아니라 보고 듣는 사고에 기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이런 식의 교정은 사람을 구성할 수 있는 요건을 모조리 배제한다는 전제를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또한 모종의 과학기술로 교정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굳이 유년기만을 배제할 이유가 적다는 것도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저는 이 작품을 하나의 우화처럼 읽어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 자체의 개연성보다는, 소설에 담은 매력과 주제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많은 매력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이 작품에서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이 무척 우직한 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문제점과 어른들의 사고에 대해 재조명하는 방식은 우리가 토론회에서 볼 수 있었던 – 어쩌면 편협하다고 할 수 있는 – 사고와 논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이런 시선을 바꾸기 위해 제시하는 장면들 또한, ‘어린아이’라는 일차원적인 이미지를 눈앞에 들이미는 방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담담한 설득에 가까운 톤을 유지하면서도, 내용은 웅변에 가깝다고 느낀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설득과 웅변을 오가는 어투를 유지하면서도, 중후반부에 이르러서 결국 이 작품이 이야기가 주는 감성에만 의존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 의존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독자 입장에서 작품을 읽고 ‘어른으로서 반성합니다’ 같은 진부한 감상을 꺼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감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커다란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것에도 작게 쓴맛을 다셔보는 바입니다.

 

언젠가 백분토론에서 ‘노키즈존’이라는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시청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이 작품에서 말하는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당연히 제시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그 시절부터 꾸준히 반복되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안타까운 것은 그런 반복 속에서 결국 도돌이표를 찍고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도 이 작품에 조금씩 감성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손끝이 젖기 전에 도망치고 싶을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차기 일본총리가 남긴 명언을 소개해드리며, 이 비루한 감평을 마칠까 합니다. 다시 한 번, 멋진 작품 감사합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주민들의 민원에 대해 ‘펀쿨섹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소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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