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하게 이 일을 사랑해서 하는 거야”
(본문 P77)
인간사회가 상상을 창작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순간부터 ‘사후세계’라는 개념은 언제나 화두에 오르며 그 모습을 달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형태에 대해서는 창작자의 주관이 반영되기 마련이지만, 전체적인 ‘사후세계’의 모습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나타납니다.
그건 바로. 그 세상을 구성하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죽음으로 현세의 삶을 끝냈다는 가정을 두지만, 그 사후세계를 구성하는 것 또한 인간이며, 그곳에도 우리가 익숙한 모습으로 인간들이 얽히며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당장 인간의 모습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며, 그에 따른 사후세계의 모습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눈 것만 봐도, 죽음 전후로 나뉘는 세상을 현대 인간의 모습을 근반으로 상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선악의 구도가 무척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도덕적인 제어방식을 창의적으로 허물 뿐이죠.
이번에 읽은 <저주받은 자들의 영원한 칵테일 파티> 또한 이런 인간의 모습으로 빚어진 ‘지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파티는 죽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벌이는 어느 파티 현장을 익살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방식은 불편할 정도로 극단적입니다. 누군가를 헐뜯고 편견을 씌우며 비난하는 걸 멈추지 않지만, 그 바깥으로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작가는 이 파티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셈입니다.
이 작품은 어떻게 지옥을 조명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봤습니다.
첫째, 지옥불에서 익숙하게 뒤틀리는 인간의 모습
앞서 말했듯, 창작물에서 그려지는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도덕의 제어방식을 기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두고, 그 양극단에 다다른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는 방식이죠.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독자들이 그 방식을 납득하는 것은, 작중의 인물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지옥 또한 그 기준을 망가뜨림과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한 인간사회를 조명하는 데에 힘쓰고 있습니다.
(P10) … 살아있는 자들의 통념과는 달리, 지옥의 거주자들은 언제나 영겁의 고문을 견딜 곳을 선택할 수 있다. … 많은 저주받은 영혼이 이승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비교적 새롭게 지어진 ‘영혼을-빨아들이는-막다른-길의-최저임금-노동’ 고리를 선택하지만… (이하생략)
이 서술은 무척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지옥은 죽은 뒤에 찾아오는 새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비록 ‘고문’이라는 섬뜩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적어도 살아 있을 때의 삶을 근반으로 준비된 무언가에 몸을 담아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최저임금 노동’이라는 고문을 선택한다는 것만 봐도, 그것이 주는 고통의 강도와는 별개로, 이 지옥에 사는 이들이 사후세계를 본인들의 삶의 연장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14) 손님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중간생략)… 옛 친구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중간생략)… 많은 이들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이고, 시선이 이리저리 꽂히고, 때때로 감전당한 쥐새끼처럼 움찔대거나 얼어붙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옥에서 벌어지는 ‘파티’는 익숙하면서도 기묘한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파티’는 만남의 장입니다. 다수를 상정하고 진행되는 행사이며, 적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렇기에 작중의 파티는 소란이 가득합니다. 당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같은 묘사만 보아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이 장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사람이 모이면 떠드는 것이 당연했던 ‘인간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배경이 ‘지옥’이라는 것을 가정하면 일반적인 웃음과 소란도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인다’라는 묘사만 보아도, 사냥당하기 직전의 어린 동물들이 연상될 정도로 긴장되는 면이 있습니다.
즉, 이 파티는 두 가지 분류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소란에 섞여드는 사람.
– 소란 바깥으로 멀어지려는 사람.
그리고 이 두 참가자 부류를 ‘사냥꾼’과 ‘먹잇감’에 비유한다면 그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느 참가자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둘째, 차별과 누명이 판치는 사회비판
‘에인슬리’는 틀림없는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이 파티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간이고, 앞서 비유한 가장 맛있는 먹잇감이기도 하죠.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가 주목받는 것은 그녀의 바탕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P25) … 에인슬리 추는 살아 있을 때, 미디어 인플루언서이자 배우 지망생이었다. 물론,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져 자살하기 전의 삶이 그랬다는 뜻이다.
작중에서 표현되는 ‘에인슬리’는 관심에 익숙합니다. 더 나아가, 관심 그 자체를 먹이로 삼았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특히 ‘배우’와 ‘미디어 인플루언서’라는 관심을 먹고 사는 대표적인 과거를 제시하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즉, 그녀는 죽음이 삶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묘사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바로 이곳이 ‘지옥’이라는 반증이죠.
(P25) 베이조스는 인간들이 지옥에서 생전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매번 감탄하곤 했다.
이 서술은 작중의 지옥이 명확한 목적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에인슬리라는 인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전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도망치고 싶었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주는 데에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P22) “야 좀! 뭘 어째야 주목받을 수 있는 건데?”
(P24) “말 좀 해 봐. 왜 나를 VIP로 만들어주지 않는 건데?” 베이조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너는 VIP가 될 만큼 중요하지 않으니까.”
에인슬리의 첫 등장은 그녀가 가진 욕망을 반영합니다. 그녀는 시종일관 파티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더 높은 지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파티를 주관하는 악마는 직접 누군가를 VIP로 지정하며, 그가 관심과 시기의 표적이 되어서 몰락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의도대로 그런 행동은 오히려 에인슬리의 욕구를 부추깁니다.
(P33) “요즘 개나 소나 VIP가 된다지만, 누구나 적성에 맞는 건 아니거든. 전문가로서 한마디 하는데,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면 내려놓아야지.”
그녀의 발언은 추종자들을 감회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마치 만용처럼 보이는 이 대사조차 주변에 불온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직종을 언급할 때 흔히 거론되는 문제점과 결을 같이 하죠.
그들이 끼치는 영향은 단순하면서도 선명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힘이 된다는 전제를 두고 있죠. 에인슬리는 그런 말을 힘으로 사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의미를 담을 수 있고, 사람들을 설득 혹은 선동 할 수 있는 힘을 사용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지옥에서는 그 힘이 에인슬리 한 사람을 향하는 화살이 됩니다.
(P43) “에인슬리 추가 스시는 역겹다고 했대! 스시를 어찌나 싫어하는지 말 그대로 샐러드를 더 좋아한다는 거야. 정말 인종차별적이야.” …(중간생략)… “내 말은 스시 저체를 얘기한 게 아니었어!” 그녀는 절규하며 말한다.
(P47) “에인슬 리가 한국 혼혈이었나, 아니면 중국인? 일본인들을 차별하는 사람인 걸 알게 되다니, 정말 끔직해. 본인이 동양인이라고 해서 동양인 혐오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라고!”
(P57) “너는 셰프 야마토를 공격했어.” 이전에 에인슬리가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소녀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가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봤어?”
누가 봐도, 에인슬리는 평범하게 자신의 기호를 밝힌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해석은 무척 공격적입니다. 단순히 ‘스시를 싫어한다’는 말에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을 받는 모습은,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허황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허황되었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 따른 엉성한 해명을 덧붙이는 에인슬리를 공격하기에 이르죠. 누군가의 말이 힘이 된다는 ‘인플루언서’의 속성에 따라, 에인슬리는 자신의 말에 담긴 힘의 논리에 의해 무너지는 결과를 낳은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에인슬리는 관심을 퍼뜨리는 직업에 종사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언급된 것이 전부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에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는 추측이 그럴 듯합니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죽음으로 도망친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아마 에인슬리는 이런 표현에 적합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그녀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파티를 뛰쳐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상상해보자면, 출구가 없는 통로를 달려간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지옥이나 다름없이…….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주받은 자들의 영원한 칵테일 파티>이 복잡한 해석이나 심오한 주제를 다룬 작품은 아닙니다. 그 주제가 명확하다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너무 우직하여 ‘동화’나 ‘우화’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대사가 과격하다는 것은 흥미가 동하는 구간이지만, 그 역시도 ‘지옥’이라는 소재에 함몰된 난폭함에 가까울 뿐이라는 비판이 따라올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지옥’이라는 소재마저 독특한 상상력으로 빚어졌다기보다는, 앞서 말했던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비판을 바탕으로 창조한 또 다른 사회를 보여준다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지옥에서 즐기는 파티라는 소재는 매력이 가득하나, 지옥도 파티도 그 느낌과 개념만 살리는 것에 급급하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서두에서 밝혔듯, 창작자들은 꾸준히 사후세계를 그려왔고, 앞으로도 그릴 예정입니다. 그 창작으로 빚어진 세계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누구도 사후세계를 체험해보지 못 했기 때문이죠. 당장 ‘천국’이나 ‘지옥’이 또한 종교를 바탕으로 내비친 상상의 영역인 만큼, 앞으로 우리가 이 소재를 다루는 방향 또한 밑그림이 없는 종이에 색을 입히는 과정에 가깝다는 것은 자명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저주받은 자들의 영원한 칵테일 파티>가 이런 상상의 영역을 넓혔다고 할 만큼 방점을 찍은 소설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이 다뤘던 ‘지옥’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창작되었는지를 한 번 짚어볼 수 있는 표본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그럴 듯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상 깊은 작품 감사합니다. 언젠가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은 소설이었다는 말을 남기며, 비루한 감평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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