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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사랑…. 꼭 지켜서 데려 올게”
(본문.3-P92)
목차
1.『좋은 글쓰기? 나쁜 글쓰기?』
2.『작가가 글을 집어삼킬 때』
3.『생각할 여유도 없이 빨라지기만 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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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좋은 글쓰기? 나쁜 글쓰기?』
예전부터 저는 ‘좋은 글’과 ‘나쁜 글’을 가르는 경계에 답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글’이라는 매체에 대한 뛰어난 접근성에서 비롯된 신념에 가까웠습니다.
그림과 영상에 비해, 글쓰기는 창작을 원하는 대중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그 이상으로 폭이 넓은 도구입니다. 비록 그 매체 자체가 시각적인 오락에 비해 순간을 집중시키는 매력은 떨어지지만, 상상력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에 있어서 그 독자적인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무조건 쉽고 간단해야 합니다. 누구나 손을 댈 수 있는 접근성을 확보하며, 누구나 읽고 즐길 수 있는 오락성을 담보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상을 비롯한 매체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서 ‘좋은 글’과 ‘나쁜 글’을 가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벽이 되고 거리감을 만드는 독이 되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서두가 지루했습니다. 이런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질서에 대해 길게 설명한 것은, 이번에 읽은 <[CODE-ONE] : 하나의 팀 / 전설의 시작(이하 코드원)>이 제가 믿고 있던 기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지점을 아주 명확하게 짚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코드원>이 ‘나쁜 글’의 표본이라는 난폭한 언어로 규정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돌부리처럼 걸리는 질문들은, 기본적으로 ‘작가가 지양해야할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 고민할 지점을 만들 수 있다는 데에서, 아주 인상적인 표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2.『작가가 글을 집어삼킬 때』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소설을 정의하는 데에는 갖은 요소들이 존재하듯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 소설을 정의하는 데에도 갖은 요소들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비문과 오타를 비롯한 자잘한 실수들을 지적할 수도 있을 테고, 명확하지 않은 서사와 난해한 인물 조형 따위에 트집을 잡는 것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소설’이라는 매체를 정의할 때 나올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그 ‘소설’이라는 기준에서 조금 벗어난 것을 ‘소설’이라고 정의한다면, 저 같은 애송이는 잠시 말문을 닫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코드원>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그 특유의 서술 방식에 있습니다. 흔히 ‘웹소설’이라고 정의되는 속도감 있는 문체를 지향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술보다는 인물의 대사로 조형을 잡으려는 시도가 무척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P63). “형… 왜 모르는 척 하는 건데… 리나… 강 대위이이이!!!!”
(3-P58). “가긴 어딜 간다는 겁니까, 자꾸! 그 몸으로!!!”
눈에 띄는 점은 대사가 무척 현실적인 구어체를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흔히 소설로 재현되는 대사를 문어체로 정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에서 내세우는 구어체의 대사들은 생동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장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구어체로 재현되는 대사들을 보면, 단순히 대사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한 장치 이상으로, 사람이 직접 말을 하는 언어들을 그대로 옮긴 듯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소리의 강약을 살리려는 듯한 느낌표와 말줄임표의 과도한 사용은 물론이며, 사람이 말을 하며 더듬거나 감정에 흐려지고 갈라지는 부분들을 모조리 재현해놓고 있죠. 구어체가 생명이나 다름없는 드라마 대본조차 명확한 문체를 가져가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어체의 정도가 다소 심한 편에 속합니다.
물론 구어체가 심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읽을 때 쉽게 상상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으로도 작용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단순히 대사뿐이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에서조차 구어체가 작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P34) 기분 나쁜 그 소음은… 아주 잠깐… 모두를 멈춰 세웠다.
(4-P52) 그 눈빛을 마주하니… 확실히… 압도적이다….
대사 바깥에서조차 그 특유의 톤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넘어, 마치 작품 자체가 어떤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이 작품에서는 생동감을 위해 대사에 신경을 썼다는 인상 보다는, 이 작품 자체가 어떤 커다란 목소리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쪽이 맞을 듯합니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너무 제 주관을 드러내며 독자를 끌고 간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쩌면 끌고 간다는 표현 자체도 굉장히 순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은 ‘독자들이 글을 읽고 상상한다는 행위’ 자체가 거슬린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내용을 제 목소리로 통제한다는 인상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 구절에서 누군가는 ‘작품이 오해 없이 잘 읽힌다’는 뜻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말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해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을 하며 화를 내면 그것은 화를 내는 것 이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으며, 누군가 슬퍼서 소리를 지르면 그건 슬퍼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작품 내 목소리로 확고하게 매듭지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눈앞에 맞닥뜨리는 인상조차도 순간 인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설명하며, 마치 그것이 독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마저 있습니다.
착각?
사실 이 표현을 찾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글을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며 쫓아가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며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못 했던 과정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할지 고민이 길었기 때문이죠. 막상 그 순간을 받아들일 때는 작중의 내용을 이해하는 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막상 그 순간이 지나고 보면 제 머릿속에 일방적으로 주입되던 감정적인 서술들을 떠올리며 난감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서술에 대해서, ‘그것이 곧 묘사가 잘 됐다는 의미가 아니겠나?’라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현시점에서 100매 남짓한 이야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은 분노와 슬픔 같은 원초적인 감정들을 쥐고 있다는 것도 한 몫 합니다. 흔히 대중가요에서 ‘사랑 이야기’가 많은 이유가 그것이 가장 표현하기 쉽기 때문이라고들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가장 표현하기 쉬운 무언가를 우직하게 내지르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작품 전반을 집어삼키고 있는 특유의 ‘목소리’에 담기며, 마치 그것이 생생하다고 느끼도록 착각하는 효과를 주고 있는 셈입니다.
‘목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모호하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저는 이 작품을 쓰신 작가님이, 직접 이 소설을 목소리로 읽으면서 썼다고 생각합니다. 소리로 내진 않아도 마치 서술과 대사를 누군가 읽어주는 듯한 감각을 떠올리며 썼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런 작업 방식이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은 문장 간의 운율을 넘어 작품 자체에서 느껴야하는 감정과 내용을 모조리 말해주는 듯한 감각으로 지배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막상 사건 내용에 대한 평가가 없는 것이 의아할 법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특별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100매 남짓한 내용에서 사건이야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이 좋다 나쁘다 무섭다 압도적이다 어떤 감상을 달자니 이미 작품 자체에서 장면 하나하나를 목소리를 담아 평가해주고 있으니까요.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무엇을 고뇌하고 있을지 제가 해석할 여지가 없는 이상, 그저 작품 자제를 소개해드리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는 형편입니다.
3.『생각할 여유도 없이 빨라지기만 하는 세상..』
관습적으로 어떤 유튜브를 구독하고 있는지 얘기를 나누며 서로의 관심사를 찾을 때가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FC서울 팬으로서 축구 관련 채널과, 영화 및 게임 리뷰를 다루는 채널들을 즐겨보는 편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채널들을 추천받았습니다. 특히 게임 관련으로 가장 성공했다는 ‘지oo세’나 ‘영o기’ 같은 채널들을 추천받았고, 그 자리에서 저는 ‘이런 채널은 취향에 안 맞는다.’며 의견을 표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거부감은 해당 채널에서 보여주는 힘이 뚜렷한 목소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떤 컨텐츠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합니다. 하지만 해당 채널들은 그런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컨텐츠를 즐기며 느꼈던 불쾌함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과 더불어, 마치 그것이 하나의 답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확고한 결이 무척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도 해당 채널의 독자들은 마치 영상에 나온 목소리가 답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이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견이 나올 수 없도록 그 목소리가 생각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죠.
굳이 어떤 채널을 고르지 않아도, ‘숏츠’라는 플랫폼으로 퍼져나가는 영상들은 그런 생각의 결을 거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피사체의 감정과 행동을 모조리 설명하며, 그 외에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도록 제안합니다. 짧은 영상의 속도감을 위해 필요한 선택이라고는 하나, 결국 그런 영상을 넘겨보는 사이 내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영상 자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기억하고 답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 ‘소설’이라는 매체는 이런 일방적인 사고 교환에서 거리를 두며 움직이는 편입니다. 문장 하나를 읽어도 그 자체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것을 ‘주관’이자 ‘해석’이라는 언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읽고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무척 느리고 답답하다는 데에 동의하나, 원래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인간의 사고와 상상력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현재 냉소적인 인식들에 대해서는 다소 쓴맛이 돌아도 어쩔 수 없겠습니다.
간혹 ‘소설’과 ‘웹소설’ 자체를 구분하기 위한 시도들이 눈에 띄곤 합니다. 혹자는 소설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웹소설도 읽어야한다는 표현을 쓰며, 마치 두 개가 소설이라는 매체로 묶이지 않는 무언가라고 암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비판적인 어조로 서술했던 <코드원>의 단점 또한 ‘웹소설’이라는 매체로 평가할 때 오히려 장점으로 비춰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뒤로 덧붙여질 비판조차 웹소설이기에 허용될 수 있는 특권으로 해석된다면, 굳이 ‘소설’이라는 매체로 평가받겠다는 태도 자체가 모순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코드원>이 보여주고 있는 형태가 좋은 글쓰기인가, 나쁜 글쓰기인가에 대해서는, 모두 평가가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달라야 마땅하고요.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은 분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글쓰기의 형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위에서 서술되는 비판들이야말로 새로운 흐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느 아날로그 세대의 넋두리 정도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고리타분한 애송이들에게야말로, 이런 작품은 소설이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방식을 거세한 무언가로 느껴졌다는 것에서 복잡한 감정을 구겨두는 바입니다.
좋은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나쁜 글쓰기는 무엇이고요. 사고를 거세하며 발걸음을 재촉해야하는 여느 현대인들에게는, 그 속도를 쫓아가기 위한 글이야말로 ‘좋은 글쓰기’의 표본이 된 것이 아닐까를 생각해보며, 이 길고 느릿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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