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일러스트러브; 혹은 어떻게 나는 모든 걱정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 감상

대상작품: 외나무다리의 노예 (작가: 떡대, 작품정보)
리뷰어: 무강이, 5시간전, 조회 7

* 본고를 시작하기에 앞서, 동백차 님에게 사과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미리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본 감상문은 동백차 님의 <외나무다리의 노예>에 대한 감상이라기에는 거리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분을 뵙는 것은 늘 즐거운 일입니다. 단순히 성격이나 지금까지 봐왔던 작품들이 겹치는 분, 괴이물 같은 ‘장르적인’ 지향이 맞는 분. 이런 분들도 물론 좋지만 ⋯ ⋯ . ‘철학’이 비슷한 분을 만나면 정말 하루종일 행복해집니다.

작품 <외나무다리의 노예>는 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습니다. 애들 싸움 스케일을 굉장히 유치하면서도 만화적인 감성으로 키운 다음, 일러스트로 스펙터클을 극대화하하는 전략. 정석적인 단편 라이트노벨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향수’를 느낀 건 제 작품의 기저에 라이트노벨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적인 감성의 라이트노벨’을 추구하던 ‘시드노벨’이나 ‘노블엔진’ 계열의 작품들이요. <외나무다리의 노예>가 딱 그 시기에 읽었던 작품들을 연상케 해 주었습니다.

고마운 글이었어요. 특히나 ‘라이트노벨’ 시도해 보려고 그림 깎기 시작한 사람의 입장에서요.

 

그런데 이런 질문도 해볼 만 합니다. ‘라이트노벨 그거 삽화 있는 소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삽화가 중요해요?’

네. 중요합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그 질문에 ‘갈!!!!!!’하고 꾸짖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하기 위한 발버둥입니다.

 

삽화의 발명은 출판 소설의 부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아닙니다. 근대 ‘출판’ 소설이요. 19세기 초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삽화로 더 유명한 작품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삽화를 쓴 건 소설뿐만이 아니라서, <도깨비 시장>이라는 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집에도 삽화가 실리기도 했답니다.

20세기 초쯤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삽화가 유행했지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박태원이 쓴 소설이고 하융이 삽화를 그린 신문 연재 소설입니다. 하융은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문학인의 필명 중 하나이니 언제 기회가 되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학에서 ‘삽화’는 퇴출되고 맙니다. 개인적으로는 ‘잡지의 쇠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근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삽화가 쓰인 작품의 대다수가 ‘잡지’에 대량생산되었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뿐.

 

라이트노벨은 그럼 왜 삽화가 있을까요. 라이트노벨의 기원은 복잡다단합니다. ‘애니메이션의 스핀오프 소설’이 라이트노벨의 기원이라는 말도 있고, ‘게임 잡지에 실리던 부차적인 연재 소설’이 라이트노벨의 기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건 간에, 삽화는 중요했을 겁니다. 전자의 경우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나오는데 삽화가 빠질 수가 없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도 ‘잡지 연재물’이라는 점이 19세기 초 유럽 연재 소설의 삽화와 겹쳐보입니다. 이것들이 독립되면서 ‘라이트 노벨’이라는 서점 코너가 생겼다고 봐도 무방할 테죠.

그런데 다른 소설 장르에서 ‘삽화’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해 퇴출되었는데, 왜 이 ‘라이트노벨’만 삽화를 신성시하는 걸까요. 그건 라이트노벨의 근간이 ‘캐릭터 소설’이기 때문일 겁니다. 네, 작가층이고 독자층이고 노답 오타쿠라서 그렇습니다.

 

국내의 ‘시드노벨’이나 ‘노블엔진’은 사멸했고, 굳이 ‘한국’ 작가가 삽화에 집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건 개인적인 문제 쪽이 더 클 겁니다.

‘삽화의 존재’는 한때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위한 발판으로 쓰였습니다. ‘야, 이 캐릭터 귀엽지? 애가 만약 만화로 그려지면 어떨 것 같아? 애니로 나오면? 게임으로 만들면 어떨까?’ ‘이야기’에 불과한 ‘소설’이 ‘캐릭터 삽화’를 만나 ‘다른 장르, 다른 IP’로 거듭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이건 핑계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해서 IP로 거듭나지 못하고 묻혀버린 수많은 작품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이에서 이익을 거둔 건 소설가나 일러스트레이터, 실무 편집자가 아니라 가운데서 주판 두드리는 사람들이 더 클 겁니다.

독자가 ‘삽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오히려 간단합니다. 미소녀 그림 보고 싶다. 이 소설의 장면을 보고 싶다. 하지만 작가가 ‘삽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궁금증이 생기실 겁니다. 왜 굳이 (일본에서조차) 라이트노벨이 사장세인 지금 ‘삽화’를 작가들이 원하는 거냐고요?

 

그거야 캐릭터 삽화는 예쁘니까. 라고 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설명들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자기 캐릭터 축전 받아서 기분 나빠할 작가는 없을 겁니다. 단순히 ‘캐릭터보다 치밀한 서사에 집중하고 싶으니까, 굳이 삽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에 가까운 것이겠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로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일단 ‘삽화’는 어느 상황에 쓰일까요? 그야 ‘멋있는 장면’일 겁니다. 작품의 가장 하이라이트 부분 말입니다. 동백차 님의 <외나무다리의 노예>로 치면 두 인물이 서로 격돌하는 그 장면이 하이라이트 부분일 겁니다.

(보통 라이트노벨은 페이지 소설이다 보니 페이지에 맞게 작업하는데, 웹에 맞춰 세로로 길게 작업하셨다는 사실을 인상깊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봤을 때, ‘캐릭터 소설’에서 ‘삽화’가 제일 큰 기능을 하는 건 오히려 앞부분입니다. 캐릭터를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나리타 료우고의 <듀라라라!!>입니다. 이 작품의 첫 권은 사실상 등장인물 소개로만 60%를 진행하는데, 매 챕터 캐릭터의 외형을 일러스트로 제공하면서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서 제일 큰 역할을 하는 건 단연코 표지입니다. 한국 웹소설 시장에도 대다수의 작품은 표지에 ‘주인공’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전략이 다양해진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언어 기호가 전부입니다. 그 결과 캐릭터를 묘사하려면 수많은 문장이 필요합니다.

‘백록은 흰색 후드 집업 밑에 상복을 연상시키는 새까만 한복을 입고 있었다. 옷고름 밑에는 새하얀 복주머니가 달려 있었는데 옷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짧게 잘랐는데 ⋯ ⋯ .’

이거 일일이 쓰는 입장에서도 지치고, 읽는 입장에서도 귀찮습니다. ‘캐릭터’ 소설이니까, 일러스트 한 장 띄워놓고

‘백록은 하얀 후드 집업 밑에 상복을 연상시키는 새까만 한복을 입고 있었다.’

정도의 인상 깊은 부분만 묘사하고 나머지는 일러스트를 제시하는 편이 (서술적으로) 경제적입니다.

액션 장면 관련해서도 전략을 다양하게 짤 수 있습니다. 동세 묘사는 일러스트에 맡기고, 주인공이 액션 씬에서 무슨 전략을 취하는가에 관해 설명한다던가요. 어차피 ‘문장’으로는 <존 윅> 못 따라합니다. 일러스트 달아놓고 존 윅이 좁은 공간에서 왜 이런 무기를 썼고 왜 이렇게 싸우는지를 서술하는 쪽이 확실하게 경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라이트노벨에서 ‘작가-일러스트레이터’ 협업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기존 라이트노벨 씬은 사실상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페어로 돌아갔습니다. 나리타 료우고는 <듀라라라!!>에서 야스다 스즈히토와 콤비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타입문을 근간을 이루는 나스 기노코와 타케우치 콤비는 유명하죠. 니시오 이신과 VOFAN의 협업은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작가-일러스트레이터의 콤비’는 한국 라이트노벨 씬에서도 여전해서, ‘오트슨-INO’나 ‘오소리-유나물’의 콤비도 존재했습니다.

‘콤비 시스템’의 장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씬을 일구고 협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만난 나리타 료우고-나스 기노코-타케우치 등에 같은 전격문고 레이블이었던 산다 마코토가 만나서 이루어진 게 ‘타입문’입니다. ‘오트슨-INO’는 한때 <클로저스>라는 게임에서도 협업을 했고, ‘오소리-유나물’의 경우에도 지금 <블루 아카이브>라는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예전 제가 한 중학교 때 쯤인가, ‘라이트노벨은 만화 못 그리는 애들이 소설 쓰는 거 아니냐’ 하는 비아냥거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서사를 잘 말아주기도 힘들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야기 잘 쓰는 법은 모르겠는데 주간 연재라서 작품 말아먹은 작가들은 지금도 점프에 수두룩하고, 아예 미국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라이터-펜슬러 스튜디오제로 굴러갑니다.

 

근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협업의 이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소설과 삽화 따로 하는 것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굳이 AI 그림을 기용하지 않아도, 이젠 클립 스튜디오에서 키나 쓰리 사이즈 등을 입력하면 인체 파일을 띄워주고, 그걸 3D로 각도 잡아서 일러스트로 그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타블렛과 각종 프로그램들은 편해졌습니다. 애초에 요새는 애플 펜슬에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시더라구요.

 

그래서, 왜 그래서 캐릭터 소설 쓰는데 굳이 삽화가 필요하냐구요?

그건 전부 제 소설 캐릭터가 귀여워서 그렇습니다. 귀여운 걸 어떻게 말로만 설명하냐구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야 ⋯ ⋯ .

 

* 부연 설명입니다만, ‘그럼 차라리 컷 연출까지 배워서 만화를 하면 안 돼?’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 ⋯ ⋯ . 물론 가능은 합니다만, ‘라이트 노벨’에 비해 ‘만화’는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구요.

컷을 연출하기 전에 시나리오 초안과 스토리보드를 짜는데 그게 이미 소설 창작과 맞먹는 수준으로 노력이 들어가는 것 같더라구요. (사실 애초에 저는 ‘라이트노벨’ 정도에 만족해서, 별달리 관심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