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펑크 2077, 그리고 성리학 감상

대상작품: 성리학펑크 2077 (작가: 하늘느타리, 작품정보)
리뷰어: 무강이, 11월 13일, 조회 19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건 ‘성리학 펑크’가 아니다. 대놓고 첫페이지에서 ‘관상공학연구소’가 나오는 시점에서 스포일러조차 아니다. 근본적으로 ‘성리학(性理學)’은 ‘사주명리’나 ‘관상’ 혹은 ‘풍수지리’와는 분과가 다른 학문이다. 인간의 ‘명(命)’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性)’ 즉 ‘성품(性品)’에 관한 윤리철학이다.

맞다. 절찬리에 “나에 성리학은 이러치 아나!” 하고 있는 중이다.

 

작품의 내용은 인질 협상극이다. 사이보그 ‘사필귀정 13호’가 벌이는 인질극에 포도대장 ‘강문수’가 투입되어 협상을 하고 그 안에서 또다른 음모가 펼쳐진다. 나름의 반전과 허를 찌르는 묘미가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가가 절대로 성리학을 ‘모르고’ 썼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너무나도 ‘명리학(命理學)’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작품이고, 작품에서도 ‘명리학’이 수차례 언급되기 때문이다. ‘명리학’이 뭔지 아는 사람이 ‘성리학’이 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먼저, ‘성리학’이 뭐길래 피가 거꾸로 솟으신 건데요? ‘성리학’은 인간의 ‘성’ 즉 ‘성품’을 연구한 학문이다. 적은 유학에 두고 있으니 ‘명리학’과 비슷한 구석은 있으나, 연구하는 분야가 다르다.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미메시스’의 관계로 수많은 사물을 나누었듯, 성리학자들은 ‘이(;이치) – 기(;현상)’으로 모든 것을 나누어 설명하니 이것이 ‘이기론(理氣論)’이다.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즉 ‘본성이 곧 이치다’라고 만물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질문. 그럼 ‘본성’이란 뭔가요? ‘성리학’은 ‘유학’이니 만큼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른다. 맹자가 주장한 것이 ‘성선설(性善說)’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은 ‘선’이다. 그러니까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간직하라.

 

기왕에 ‘성리학 펑크’라는 타이틀을 단 것에는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유학의, 성리학의 나라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리학이 쓰였고, 이기론이 실증적이고 정치적인 윤리학으로 작용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런 ‘성리학’적 사고관이 아직도 한국을 다스리고 있다고 오구라 기조라는 어떤 일본인 학자가 분석한 적도 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저서인데, 90년대 말에 나온 서적이므로 다소 내셔널리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은, 하나의 ‘성리학적 윤리’를 ‘이상적인’ 상태로 규정하고 그것을 쫓는다고 본다. 그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동경, 즉 ‘한(恨)’을 품는 것이다. ‘한의 정서’라는 개념 자체가 이념적으로 낡아빠진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낡은 책이라 하겠다.

이제는 단순히 내셔널리즘적으로, ‘국민성’만으로 모든 걸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단순히 한국뿐만 아니라, ‘윤리’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의 사고관 같기도 하다. 세상이 윤리를 쫓으니 아, K-한류란 이런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우리의 얼 ‘한의 정서’란 ‘디나이얼’이었던 것이다.

아차, 맨날 정신줄 놓고 헛소리 하는 거 봐라. 슬슬 작품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점에서 작품에서 다루는 ‘명리학’적인 사이버 펑크 세계관은 ‘이치’를 탐구한다기보다는 ‘현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작품에서 자주 인용되는 ‘정약용’이나 ‘장영실’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람들이었다. 거중기, 앙부일구 같은 걸 만든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과연 ‘사상’을 담을 수 있는가. 한때 단단했던 것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마련이라, 한때 ‘본성’이었던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성리학은 격물치지의 수단으로서 수많은 ‘예(禮)’를 만들었다. 그러나 과연 그 ‘예’는 지금 이 시대에 맞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어쩌면 ‘껍데기’만 남은 것 아닌가.

‘성리학’적인 ‘예’는 ‘상승’을 위한 것이다. 유학적인 세계관에서는 아무도 타인을 구원하지 않는다. 믿을 ‘신(神)’ 따위는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의 ‘공부’가 스스로를 구원한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를 갈고닦아 군자가 되면, 다른 사람도 너를 보고 그리할 것이다.’라는 의미다. 쉽게 말해 남이 너를 구원할 리 없으니, 너 스스로 ‘아이돌’ 즉 ‘신’이 되라는 뜻이다. ‘기독교적 죄사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속 ‘명리학 펑크’적 세계관에는 이런 ‘성리학’의 ‘상승지향적’인 욕구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사필귀정-13’은 인질극을 벌인다. 사주팔자 따위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야말로 ‘사필귀정’을 바라 마지않는 셈이다.

무엇을 위한 ‘예’였는지, ‘본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 고것 참으로 ‘성리학 펑크’적인 메시지다.

 

그러나 기왕의 의문이 있다.

말했듯 성리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학문이고, 그 기저에 성선설을 놓는다. 성선설은 그 기저에 하늘을 놓는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이 정말로 하늘인가, 애초에 사람에게 본성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존재해야 하는가.

글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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