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모름’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인적 없고 가로등마저 없는 외진 골목길을 혼자 걸을 때 내 뒤를 쫓아오는 남성이 어떤 사람인지 ‘모름’에서 오는 공포, 뿌연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긴 촉수로 사람을 낚아 채 간 존재가 무엇인지 ‘모름’에서 오는 공포, 갑자기 일어나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인형 속에 들어있는 그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 그런 것들이요.
그런면에서, 주인공은 많은 ‘모름’들을 맞닥뜨립니다. 여고생인 그녀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낯선 할아버지의 시골집으로 이사 오게 되지요. 할아버지의 밭에는 기이한 허수아비들이 이유를 ‘모른’채 밭둑을 따라 줄줄이 늘어 세워져 있습니다. 전학 간 낯선 학교에는 ‘모르는’ 반 아이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인공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 공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러한 모름들은 ‘낯섦’의 다른 표현이고, 약간의 어색과 불편을 가져오는 정도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녀가 허수아비를 ‘모른’다는 것이죠. 반 아이들에게 전혀 원치 않은 일을 당한 그녀는 그래서 허수아비를 때리며 말합니다. ‘죽어버려!’라고.
한순간 악에 받쳐 내뱉은 이 말은, 그 진의와 말의 농도에 상관없이 그대로 허수아비에게 입력되죠. 허수아비가 아니었다면 허공에 흩어졌을 악의(惡意)는 이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태(形態)를 갖춥니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원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죠.
(모든 감상은 개인적인 것이 당연하지만) 특히 저는 이 글에서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헐리웃에서 주로 만드는 10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슬래셔 무비들이요. 특별히 피가 낭자하거나 날붙이로 난도질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솔직히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한 명, 한 명씩 일을 당하는 전개에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받은 공포는, ‘곡성’같은 영화 류에서 받은 느낌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보다는 물리력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그들이 등장인물에게 어떻게 해를 끼치게 될 지 긴장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저는 글을 읽기 전부터 ‘허수아비’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고 가정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마치 ‘사탄의 인형’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귀신 들린 인형이구나 하고 알아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덕에 글 전반에 대한 이해는 빠르고 금방 했지만,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으스스함은 좀 덜했던 거 같습니다. 그게 못내 아쉬워서, 내친김에 이 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중단편 허수아비’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거였구나! 하는 기분이요. 왜 등장인물이 그토록 특정인물을 찾아 헤매는지, 그 인물은 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연작 허수아비’를 다시 읽어보자, 처음보다 글이 더 풍부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같은 글이어도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글 자체가 어떤 정보를 부족하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작품 제목이 같은지라 구별하여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연작 허수아비’가 ‘중단편 허수아비’에서 나왔던 내용 중 말하지 않는 정보는 고작 한 가지 정도 –
김pd의 바람이 사실이고, 그가 마지막에 자살하듯 돌부리를 놓는 장면
기괴한 허수아비들을 만들었던 황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손녀를 향해 자신이 ‘허수아비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허수아비들로 무엇을 하고자 했던 걸까요? 어쩌면 무엇을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허수아비를 만드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물에 빠진 가엾은 넋들을 허수아비 형상에 가둬 두려 한 것일까요? 허수아비들은 왜 그렇게 악의에 가득 차 있을까요? 그리고, 다 타버린 허수아비들 사이로, 그 안에 갇혀있던 넋들은 어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