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길고 긴 방학이 끝나갈때 쯤이면 늘 가슴 한켠이 무겁고 답답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끝나버린 방학에 대한 아쉬움, 밀려있는 방학숙제로 인한 압박감 등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건 ‘이 귀한 시간을 뭘 하며 보냈나’에 대한 자책이었지요.
성인이 된 요즘이라고 별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리부터 일정을 계획했던 여행 같은 것이 아니라, 급하게 지정된 임시공휴일이나, 회사 일에 치여 아무 준비 없이 맞이한 휴일 같은 날들은, 해질녘이 되면 문득 [이 좋은 휴일을 무얼 하며 보냈나]하고 한숨짓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아마 죽음을 맞이할 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귀한 생(生)을 나는 무엇으로 보냈나’하고 말이죠.
글 속 인물들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구는 곧 멸망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확실하게 예고된 덕인지 작중 세계에선 그로 인한 큰 혼란은 보이지 않습니다. 종말물에서 흔히 보이는 무너진 세계- 태업, 강도, 살인, 무질서, 혼돈 -등은 등장하지 않지요. 오히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인물들이 있어 지구 마지막 날까지도 그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성실한지, 되려 작중 주인공이 ‘나라면 마지막 날까지 출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들은 무엇을 하느냐? 제목에 나와 있듯이 이들은 ‘시네필(들)’입니다. 영화 애호가죠. (그러므로 주인공이 ‘자신은 시네필이 아니다’고 부정하면서 시작하는 서두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종말까지의 넉달간을 매우 시네필스럽게 인식합니다. 종말이 확정되자 어떤 영화가 재개봉했는지, 어떤 영화들이 다시 인기를 끌었는지, 무슨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상영했는지 등을요. 아마 주인공들이 시네필이 아니라 경제학자였다면 종말이 확정된 순간 주가는 어떻게 되었고 환율은 어떻게 되었으며 세계 노동시장 및 통화량은 어떻게 변했는지 따위로 세상을 설명했겠지요.
작품은 종말을 맞이하는 개인과 국가의 시스템 등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다시 주인공들에게 집중합니다.
이들은 결말까지 보지 못한 한편의 영화를 찾고 있죠. 그 과정에서 해당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들을 몇차례 놓쳤음을 깨닫고 결국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냅니다. 함께 영화 블루레이를 찾으러 가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해당 영화가 유투브에 통채로 공개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급히 결말로 넘겨보지만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고, 주인공은 지구를 (실수이긴 하지만) 멸망시킨 외계인에 대한 작은 복수삼아 짧은 영상 하나를 영화처럼 올려두죠. 나중에 지구에 대해 연구할 외계인들에게 하는 작은 복수 삼아서요.
주인공들은 부정하겠지만, 그들은 시네필이 맞는듯 합니다. 생의 마지막 날에 영화를 본 사람이 시네필이 아니라면, 누구를 시네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적어도 생의 마지막까지 가장 좋아하는(혹은 관심있는) 일을 했으니 모든 것이 조용해진 그 순간에 조금은 더 편안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종말을 다루는 작품치고는 매우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매우 평온하고 담담하게 느껴졌기 때문인데요, 작중 자살하는 이들에 대한 설명이 계속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좀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작중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 습관적으로 관련 영화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아주 짧은(그리고 다분히 충동적인), ‘버킷리스트’ 가 떠 오르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주인공들이 찾던 그 영화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유투브에 전편까지는 아니고 짧은 몇 분짜리 영상이 몇개 올라와있기 하더군요.
씨네필의 ㅆ도 못되는 저는 그 예술 영화를 아마 생의 마지막 날까지 안 보게 될 것 같지만^^; 덕분에 그런 영화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게다가 오늘은 그간 미뤄두었던 리뷰를 두 편이나 썼으니, 최소한 오늘은 주인공들처럼 소소한 만족을 품은채 여유있는 저녁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에 나온 영화 한편 감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