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도 영어와도 친하지 않아서 대충 수학의 다음이나 뒤 정도라고 제목을 추측했는데 검색해 보니 합성어로 영어 사전에 있는 말이더라고요. 옥스퍼드 영한사전에 따르면 ‘aftermath’는 전쟁이나 사고 등의 여파, 후유증을 일컫는 단어라고 합니다. math에는 수학이나 계산이라는 뜻밖에 없는데 어째서일까요? 하지만 이런 걸 몰라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 없어서 제 국어 능력에 감사함을 느끼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혹시 맨 처음 주혁 씨 어머니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고 너무 놀라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라는 묘사에서 겁먹으신 분이 또 계시나요? 장르에는 호러 하나만 쓰여 있지, 소개에는 ‘숫자의 심연’ 공백 포함 딱 6글자 적혀 있어서 잔뜩 긴장했던 저는 여기서부터 무서웠답니다. 여기서 친구네 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사실 그 집은 2년도 더 전에 일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폐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던가 하는 거지! 그런 거지!! 지레짐작했는데요, 고등학생 때 있었던 낯 뜨거운 얘기라면서 회상한 장면들이 너무 가슴 따듯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온 부담스러운 부탁에는 저도 얹힐 뻔했지만, 고기도 먹었고 연락도 받은 이상 토해냈었던들 어쩌겠어요. 설령 그 친구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게 됐더라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부탁 한 번은 들어드려야지 않겠어요?
그래서 찾아간 집에서 인사도 잘 드리고 방까지 들어갔는데, 시체 뱃속에 들어온 것 같대서 나가고 싶다는 기훈 씨의 묘사에 백 배 공감하면서 문을 잠가 달라고 해도 잠그면 안 됐던 건가 탄식했습니다. 호러 시작된다…. 이제 우정을 피로 씻어내는 끔찍한 내용이 나온다고 각오한 와중에, 울먹이는 친구를 보니 다행스러우면서도 이렇게 멀쩡한데 왜 감금 생활을 자처하는 건지, 내가 들어온 밖에 사실은 뭐가 있는 건지 덜컥 무서워지더라고요. 아니, 수학 하나밖에 취미가 없던 애가 수학이 문제라는데 이게 큰일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랬더니 웬 프로그래머 도시전설을 얘기하지 않나, 만에 하나 그런 명령어가 인간한테도 있다고 쳐도 뜬금없이 원주율 얘기를 하지 않나, 친구를 무슨 구경거리처럼 얘기한 동창들이 아니꼽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나 싶어서 착잡했는데 이게… 너무 생존 피해자의 반응인 거예요…. 호러 작품보다는 호러 작품에 쓰인 사건의 이후를 다루는 재난물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친구가 내내 갇혀 있던 방문 밖으로 나왔고, 그 정도 숫자는 수학 연구자 아니면 볼 일 없겠거니, 그만뒀으니 앞으로는 괜찮겠거니, 살아만 있으면 사지 멀쩡하고 어머니도 계시니까 어떻게든 먹고 살겠거니 싶어서 기훈 씨의 맥주는 차고 제 입맛은 쓰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공포도 너무 수동적이어서 나 같은 겁만보도 볼 수 있고 괜찮다고 안심했었죠.
그래 놓고서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거 아닙니까?? 전 원주율 찾아볼 생각도 없었는데 이렇게 내밀어 주셔서 수동적인 공포라매요! 수동적인 공포라매요!! 하고 열심히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무해하다는 작가 코멘트를 본 뒤로 두 번째 읽는데도 여전히 숫자 나열이 무서운 게, 단순히 이런 작용을 하는 숫자의 존재뿐만 아니라 친밀한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공포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인간은 굉장하다!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 너무 복잡해서 우주 그 자체나 다름없다! 들어온 말들이 허무해지는 기분도 착잡하고요.
하지만 호러 작품은 이런 기분을 맛보기 위해서 읽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폰트의 어떤 요소도 조작하지 않고, 시꺼멓거나 피 칠갑한 그림도 없이, 오로지 10pt 크기 글자로 컴퓨터 화면 내로 들어올 원주율 소수점 아래 몇 번째 이상에 존재한다는 숫자의 나열만으로도 무서워할 수 있는 내용에 몇 번이고 감탄했답니다! 갑자기 보인 숫자에 놀라 후다닥 내렸지만, 출근길에 전화를 받고 그날 밤의 일을 조금 뒤라고 표현한 기훈 씨의 시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는 즐거움도 있고요….
차근차근 쌓은 공포를 마지막에 사정없이 터트리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