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외자혈손전(外者血孫傳) 뜻은 딸의 자식 이야기 정도 될까요? [홍길동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이야기는 그 집안을 배경으로 합니다. 딸의 마음과 재능을 헤아리지 않는 아버지와 집안을 극복하고 자아를 찾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글 앞부분에도 직접 언급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고민은 (부르기야 아버지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저 혼사 자원일 뿐 사람이나 자식 취급, 교육은 고사하고 읽고 싶은 책도 못 읽는 주인공 무명 (심지어 이름도 무명이에요…) 앞에서 사치스럽게 여겨집니다. 게다가 생활 반경조차 좁게 제한되어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소녀 무명이 자기의 처지와 앞날을 체념하듯 이야기할 때 들리는 목소리와 그때마다 보이는 하얀 뱀이 신기합니다.
무명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혼사를 앞두고 슬퍼하는 목소리를 꿈에서 듣는데, 이 부분의 묘사가 흥미롭습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왜인지 나를 보는 엄마의 목소리인 것도 같고,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인 것처럼 강물의 냄새를 느끼고요. 무섭게도 피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도 보는데 무명의 출생에 대한 강한 암시를 남깁니다.
혼례 당일이 되어 서성이던 무명은 뱀의 이야기를 듣고 자유를 얻을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차근차근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곳간 강탈 후에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하는 무명. 아비가 가장 아끼는 곳간의 것들을 모두 없애고, 하나씩 격파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급기야 아버지에게 자식 혼내듯이 일갈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급히 흐릅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 대감은 이무기를 만나 첩으로 들이더니, 재산 손해를 구실로 자식들과 공모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습니다. 제 친자를 가진 몸이었는데도요. 무명의 엄마 이무기의 자식을 거둬 달라는 모성애 가득해 보인 유언은 어쩌면 복수의 복선이었고요.
아버지가 아끼던 것들, 재산과 아들들, 그리고 본인까지 잘근잘근 씹어 삼키는 결말은 통쾌하기도 했어요. 이무기 여자의 마음은 묻지도 않고 그저 욕심과 허기에 ‘쓰고 버린’ 죗값은 처참했지요. 호부호형 못하던 홍길동은 어케 가출해서 사람들을 모아 큰일을 했지만 집 밖에도 맘대로 못 가던 무명은 식부식형을 해냈습니다. 혹시라도 어느 이무기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조신하게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