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감정은 어때?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딱 그저 그런 상태? 조금 지루한 것 같기도 하고.”
– 그리고? 살아 숨 쉬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니.
“피 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쉰내가 장난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지. (후략).”
이 문장들에서 잠시 멈춰섰다. ‘-‘로 시작되는 말은 죽은 이가 하는 말, “”에 담긴 말은 주인공 수연이 하는 말이다. 아니, 죽은 자 그러니까 T로 명명된 자는 실은 죽어, 말이 없다. 허니 ‘-‘로 시작되는 말들은 수연이 상상하는 말에 불과하다. ‘T’가 살아 있다면 으레 그렇게 말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자문자답하는 풍경은 참 서글프고 스산하다.
마음에 와닿은 것은 다름 아닌 내용에 있었다. 이상 기후가 지속돼서 여름이 끝나지 않는 지구가 공간적 배경인 이 소설 <생명의 여름>에서 지구는 더이상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물도 없고, 생명을 영위할 그 무엇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땅 위에서 수연은 살아 있지만 죽어 있다. 어쩌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때에 그녀의 감정은 “딱 그저 그런 상태”이다. 조금 지루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느끼는 것들이 참 미시적이고 소소하다. 쉰내가 장난 아니란 걸 떠올릴 정신이라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상당히 고차원적인 걸 생각할 것 같지만 막상 오늘 입은 옷, 내가 먹다 남긴 피자 조각 같은 알량한 것들만 떠올리는 게 인생이니까.
이 소설 <생명의 여름>은 잘 읽힌다. 현재의 이상 기후에서 조금 더 발전되면 이 소설 속 풍경이 머지 않은 것 같아서 섬뜩하기도 하고, 바로 그렇기에 수연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마음을 나누던 이가 그야 말로 개죽임을 당했다. 가족과 함께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바다로 향하던 고속도로에서, 차 안에 갇힌 채로 죽어 부패된 시체로 만났고, 이제는 영영 떠나가 버렸다. 그 ‘영원한 작별’, 장례식장의 풍경으로 시작해 수연의 스산한 ‘결단’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어떠한 ‘수미쌍관’의 구조도 띄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과 죽음으로.
산다는 건 참 별 것이 아닌데, 동시에 별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산 자는 살아 있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고 무언가를 먹어야 하며 충분히 자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하여 운동을 하고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책을 있거나 여러 일들을 해낸다. ‘해야 하는 것’에 둘러싸여 있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재앙 앞에서 ‘하지 않음’으로 무너진다. 일을 할 수 없고, 돈을 벌 수 없고, 먹을 수 없으며, 여타 취미활동을 할 수 없다. 하다 못해 뜨거운 열기 탓에 밖으로 나가지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기도 힘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리는 것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라졌다.
그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말을 다 보고 난 뒤에 대뜸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상황에 놓여 본 적 없기에 쉽사리 답할 순 없지만, 나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할 것 같다. 상황은 대재앙이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바로 그래서 대재앙이 설득력 있었고, 수연의 마지막 선택이 슬프면서 이해가 됐다. 그녀에게 후일이란 게 있다면, 평온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