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픽션 형태의 리뷰입니다. 원작 초중반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감상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내가 아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 마치 흑요석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시선을 마주하는 사람마다 빠져들 듯한 깊고 고혹한 눈동자. 그것이 내뿜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강인한 시선. 그것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단 차라리 카리스마에 가까웠다.
왼쪽으로 살짝, 빙글 돌았다. 차분한 비단옷이 몸을 감싸고 있다. 그 옷 아래에 나의 것이 아닌 내 육체가 있다. 신이 빚어낸 조각이라 해도 믿을만한 탄탄한 몸매. 천하를 호령하는 굳센 우직함이 여인의 곡선에서 피어오른다.
다시, 몸을 원래대로 돌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나는 대한민국 공군, 그것도 기무사 출신의 남성이다.
그리고 나는, 샤흐라자드 여왕에 빙의했다.
나?
남성(이었던 것).
“폐하께 드릴 것입니다.”
연예인 같이 생긴 놈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tv에나 나올법한 외모의 소유자다. 욕 나올 정도로 잘생겼네. 아…
나는 그를 보며 웃으려 했지만, 차마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책 속 인물에 빙의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왜 하필 여자냐고!
게다가 이 여자, 소흐랍 총독인지 뭣인지 하는 놈부터 시작해서 남편이 줄줄이 딸려 있지 않나?
빙의하자마자 BL 찍게 생겼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아름다운 남자가 방에 들어온지도 오래였다. 아름답다는 형용사와 남자라는 명사가 결합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그 괴상한 조합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는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다가오지 좀 마라.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휘저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듯 남자는 다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상당히 침울한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봐, 이사야. 너도 내가 남자인 걸 알면 다가오기 싫을 거야. 같은 남자끼리 이해 좀 해줘.
그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놈의 이름은 분명히 이사야였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참으로 부담스러웠지만 피하면 지는 것이다. 제발 이상한 눈길이라고 오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궁정학자 이사야가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는 결국 시선을 떨구었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학자로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공연히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안 될 일일 것입니다. 하오나…”
흐려지는 말끝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여왕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다그칠 만한 태도였다.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한껏 위엄을 갖추며 나는 말했다.
“분명히 말하라. 무슨 일이지?”
“2왕자비 누르자한 님께서 서거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오나…”
일어서서 다가오려는 그를 나는 다시 막았다. 절로 표정이 찌그러졌으나, 상황과 입장이 상대로 하여금 그것을 좋을 대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라.”
“폐하의 아드님께서 돌아가시게 되옵니다.”
나는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그래. 이 여인에게는 아들이 몇 있었다. 그 중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에 앞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간 수많은 책에서 보아온 바에 따르면, 왕은 놀라도 놀라지 않은 척 해야 한다. 모름지기 진짜 왕이라면 경거망동은 삼가야겠지. 나는 그를 노려보는 척하며 물었다.
“누가 감히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는 것이냐? 너의 그 잘난 지식으로 알아낸 미래이냐? 그렇다면 그런 지식은 필요없다.”
“황송하옵니다. 시장통에서 떠돌이 점술가가 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예언이라 하였습니다. 저 역시 학자로서 헛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은 잘못된 태도이나,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맞받아쳐야 여왕답게 보일까. 그러나 그 다음에 들려오는 말은 하잘것없는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언자의 말에 따르면, 폐하께서도 같은 일을…”
신이 있다면 들으라.
여자에게 빙의해 BL 찍는 것도 모자라서, 아들을 잃고 급기야 죽을 운명에 처한다고?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굴려먹을 작정이냐?
내 눈에선 불똥이 튀었다. 물론 궁정학자 이사야는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했겠지만.
“궁정학자의 본분을 잊고 한갓 시정잡배의 헛소리에 놀아난다?”
“저는, 그저 폐하를 위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면의 생존본능이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죽는 법.”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나조차 흠칫할 뻔했다.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 인물을 최대한 흉내내서 말해보았는데, 그 강렬한 위엄에 나조차 숨죽여야 했다.
샤흐라자드. 내가 당신에게 빙의한 것인가, 당신이 나에게 빙의한 것인가.
내 것이 아닌 모습을 뒤로 하며 나는 외쳤다.
“당장 그자를 잡아올 것을 명한다.”
설마,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그건 ‘내’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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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여자에게 빙의하면 재미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