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붉은 망태 (작가: 일월명, 작품정보)
리뷰어: 한켠, 4월 29일, 조회 85

육아가 가장 힘든 구간이 언제일까요? 자아가 강해지는 미운 네 살? 자기주장이 더 강해지는데 체력도 강해지는 더 미운 일곱 살? 아마 아직 아기가 제대로 언어를 구사하지 못 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시절 아닐까요. 아기가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양육자가 다 해 줘야 하는데 말로 설득하지는 못 하는, 그런 와중에 호기심은 강해서 뭐든 해 봐야 직성이 풀리고 고집을 부리는 딱 그 나이. 그 나이에 어린이집이나 보조 양육자(베이비시터, 아이의 조부모 등)의 도움을 받지 못 하면 배우자는 복직을 하고 보통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고립됩니다. 상상해 보세요. 말 안 통하는 치매 노인의 축소판과 하루 종일 단 둘이서만 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하루 종일 사고 치는 생명체를 지키고 길러야 하는 책임감은 있는데, 보상도 없고 ‘어른의 언어’로 대화할 수 없이 흘러만 가는 시간들. (요즘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같은 나이 아이를 기르는데도 아이는 귀엽고 집안은 깨끗하며 양육자는 행복해 보이는 영상, 사진이 많아서 ‘나만 사는 게 X 같은가’라는 박탈감, 우울감, 고립감이 더 심하지요.)

눈이 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를 아이와 단둘이 보내야 하는 엄마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좋은 엄마’입니다. 남편도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를 돌본 기간이 있고, 좀 이르긴 하지만 어쨌든 복직할 직장도 있고 가정보육을 더 해야 한다는 아이가 장애가 있는지 그냥 조금 발달이 더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도 그 정도면 귀여운 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요. 아이가 밥을 뭉개고 장갑 없이 밖에 나가는 것 쯤 객관적으로, ‘남의 애’라고 생각하고 인스타나 유튜브로 보면 재미있게 봐 줄 만 합니다. 하지만 한 명의 아이의 모든 것을 하루종일 혼자 책임지는 아이 엄마에게는 숨쉴 구멍 하나 없이 목이 졸려오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간 게 누구일까요? 여기에 악인은 없습니다. 누가 작정하고 주인공을 괴롭힌 것도 아니고요.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은 뭘까요. 남편의 육아 참여? 아이를 믿고 맡길 보육기관이나 베이비시터?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충분히 많은 돈? 이런 것들은 거대한 사회 복지 시스템을 소환합니다. 아이 부모가 최소 3년은 재택근무나 육아휴직, 반일 근무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또래보다 느린 아이도 받아줄 수 있는 어린이집, 단독 양육자에게 휴식을 줄 수 있도록 믿을 만 한 보육자에게 저렴하게 도움받을 수 있는 제도(서울 시장이 말하는 외국 출신 가사노동자 착취는 아닙니다)나 양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양육자의 스트레스를 상담할 수 있는 ‘1가정 1오은영 박사님’ 시스템, 등등.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언젠가 도달해야 하는 너무 크고 먼 미래’입니다. 그래서 아이 엄마는 작고 사적인 일탈을 합니다. 아이와 단둘이 있는 집 안에서 술에 취하고, 아마도 산타할아버지일 것 같은 ‘붉은 망태 할아범’에게 아이가 ‘나쁜 아이’라고 합니다. 이 일탈이 가정에, 혹은 사회에 균열을 냈을까요? 아마 아닌 것 같지요. 그럼 주인공은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요? 아이가 점점 자라서 혼자 장갑을 낄 나이가 되면 자연히 해결될 일들을 기다리지 못 하는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탈은 무엇일까요? 아이가 자라면 다 해결이 될까요? 주인공이 ‘육아가 힘들어’ 하면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 다음은요? 더 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아이 엄마는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일은 크리스마스에 벌어집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울지 않는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시지요. 착한 어른은요? 착한 어른이 받고 싶은 선물은 아마 ‘착한 아이’일 겁니다. 그 ‘착한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요? 주인공이 마음 속에서 정말로 바라는 건 무엇일까요? (산타 할아버지 말고도 ‘크리스마스’를 활용하는 소재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날이잖아요.) 아이가 자라서 학교에 가면 주인공의 문제는 해결이 될까요?

아이의 목에 졸린 자국이 남을 정도라면, 선물끈을 장식용이 아니라 교살용으로 묶었을 겁니다. 아이가 없으면, 아이 엄마는 원하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아이 엄마가 술에 취한’ 부적절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니까 주변 사람들이 아이 엄마를 탓할까요? 무서운 건, 이 모든 상황을 모르는 아이가 여전히 엄마를 부른다는 겁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은 아무 날도 아닌 그저 12월 26일이고 아이엄마는 내일 또 밥을 뭉개고 말이 안 통하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할 겁니다. 이 상황에 탈출구나 해결책이 있을까요? 아이 엄마가 복직하면 이 가족은 어떻게 될까요? <나이트비치>라는 소설에서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엄마가 대형견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아이와의 관계가 더 좋아집니다.(어린애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개와 더 비슷하니까요.) 아이 엄마의 탈출구가 있을까요? 이 ‘탈출’/’일탈’에 더 환상적/호러적 ‘한 끗’이 있을까요?

이 작품에서 ‘환상적'(혹은 ‘호러적’) 요소는 망태할아범/산타할아버지 입니다. 말 안 듣는 애들을 잡아가는/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대비되는 존재입니다. 큰 자루를 둘러멘 노인을 ‘망태 할아범’으로 보느냐 ‘산타할아버지’로 보느냐는 각자의 경험/바람에 따라 다를 텐데요. 이 흥미로운 소재가 더 도드라지면 어떨까요? 아이 엄마의 상황/심리에 따라, 혹은 아이 엄마/아빠에 따라 본 교관은 망태 할아범이 될 수도 산타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아니면 아이의 시선을 여기에서 한번 보여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사건사고, 돌발상황 없고 예상하고 계획하고 악인이 없어도 육아가, 가정이 버겁고 지치는 악몽이 된다면. 그 속에서 개인은, 양육자는, 특히 엄마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도움이나 구원이 있을까요? 그게 집 안에 있을까요 아니면 집 밖에 있을까요? 그 막막함이 공포가 됩니다. 전혀 메리하지 않은 크리스마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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